120화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라이언이 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오퓨커스가 보였다. 갑작스럽게 바뀐 풍경에 라이언조차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라이언과 미렌을 발견한 오퓨커스가 경악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폐하, 여긴, 어떻게……! 헤겔, 헤겔이 보내었습니까?”
“그런 것…… 같군.”
어지러운 듯, 눈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던 라이언은 어서 걸음을 옮겼다. 아직 그의 품에는 미렌이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불이 난 동굴 속에서 미렌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연기를 마셨다. 라이언은 무엇보다도 미렌의 생명을 우선으로 했다.
주변은 아직 프레니티 영주 성 내부인 듯 보였다. 어느 시녀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 들이닥친 라이언이 침대 위로 미렌을 눕혔다.
그 즉시 오퓨커스가 눈치 빠르게 다가와 미렌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초록색으로 빛이 났다.
“폐하, 이곳 영주 성은 무사히 탈환이 끝났습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곧 베르디움 공작이 쫓아올 테니.”
“네?”
힐링 마법을 계속하던 오퓨커스가 놀라 되물었다. 미렌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라이언이 연이어 말했다.
“베르디움 공작이 날 죽이고 싶은 모양이더군.”
“그런……!”
오퓨커스의 손에서 나오던 초록빛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곧 급한 처치를 끝낸 오퓨커스가 라이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습니다. 급한 처치는 모두 해 두었으나…… 언제 정신을 차릴지는 알 수 없어요.”
“오퓨커스 경.”
“네?”
“이후 있을 전쟁에 경은 참여하지 않는다. 미렌 우드의 치료를 전담하도록.”
오퓨커스가 두 눈을 치떴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퓨커스의 눈길이 곧 정신을 잃은 미렌에게로 향했다. 어쩌면……. 오퓨커스의 머릿속으로 제 예측이 맞아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오퓨커스는 곧 짧은 인사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이 좁은 시녀의 방에는 오로지 라이언과 미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봤다.
기실, 아직도 완전히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렌 우드가 사실 미렌 에드가였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미렌.”
“…….”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미렌 우드든, 미렌 에드가든. 이제껏 미렌이 자신을 평생에 걸쳐 속여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배신감조차 들지 않았다.
라이언은 그저 기꺼웠다. 미렌이 살아서 다시 제 곁으로 돌아와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속였건, 미쳐 날뛰는 저를 보고도 돌아오지 않았건,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라이언의 사랑은 그토록 단순했다.
그렇게 단순하고 멍청해서…… 그녀를 잊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살아 줘, 제발…….”
미렌을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문득 쿵, 침대 옆으로 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그의 시선과 침대에 누워 있는 미렌의 눈높이가 그나마 맞았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렌의 손을 힘없이 움켜쥐었다.
“더는 못 버티겠어.”
“…….”
“살려 줘, 제발―.”
한 번 더 당신이 죽은 모습을 봤다간, 나는 버티지 못해.
아직도 라이언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방 안에 쓰러져 있던 미렌의 모습이 선연했다.
그날, 정무를 마친 그가 방에 찾아갔던 날.
그녀는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누워 있던 곳이 침대가 아니라 바닥이었을 뿐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라이언은 그런 미렌을 두고 자신을 속였다. 그저 잠이 들었을 뿐이라고. 그녀는 죽지 않았다고.
그러지 않았다간, 자신이 제 목을 조여 죽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미렌을 보고 있자면, 보이지 않는 뱀이 스멀스멀 기어와 제 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곧 저 뱀이 목까지 타고 올라와 자신을 죽여 버릴지도 몰랐다.
라이언은 때때로 차게 식은 미렌의 손을 쥐고 있으면 제 심장이 싸늘하게 죽어 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그래서.
그래서…….
자꾸만 이렇게, 그녀가 살아 숨 쉬는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고개가 미렌의 심장 위로 올라갔다. 귀를 가져다 댄 순간, 미약하지만 분명한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언은 그 순간 깊은 숨을 토해 냈다. 그제야 목까지 올라왔던 조각난 환영처럼 파스스 흩어져 가는 게 보였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잠든 미렌을 보고 있자면 제 신경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잃은 그녀에게 당장이라도 일어나라며 애원하고 싶었다.
결국 라이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까지 미렌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뒤돌아 방을 나갔다.
겨우 조여진 목줄이 다시 느슨해질까 두려우면서도, 제 손으로 그것을 조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황제의 군사들이 정리한 영주 성은 아직 상황이 어수선했다. 이미 승세가 기울어졌음을 안 테룬 공국의 병사들이 살려 달라며 투항해 왔기 때문이다.
미렌을 두고 밖으로 나온 라이언은 그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다. 보고를 위해 다가온 로이아가 고개를 조아려 왔다.
“폐하, 일부 잔당은 도망쳐 베르디움 공작에게 간 것 같습니다.”
“베르디움 공작이라. 모두 죽으러 간 모양이군.”
“예?”
로이아가 눈을 끔뻑거리며 저도 모르게 라이언을 바라봤다가, 급하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라이언은 이미 로이아에게서 시선을 뗀 지 오래였다.
“받아 주지 않을 테지. 베르디움 공작은 애초부터 테룬 공국을 이용할 생각이었을 뿐이니까.”
“이용, 이라니…….”
“이들이 이토록 쉽게 당해 준 것을 보고도 모르겠나? 어느 순간부터 버림받은 거였겠지.”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영주 성은 테룬 공국의 사람들 손에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보급을 전달받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지 더러워진 보급품 따위가 마구 널브러진 채였다.
로이아는 그제야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곳을 소탕하는 작전이 너무도 쉽게 해결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다만 로이아는 문득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영주 성을 정리한 뒤 우리는 바로 다시 출정한다. 마법사들에게도 준비를 하라 전하도록.”
“예! 폐하.”
라이언은 그 뒤로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움직였다. 그 모습이, 로이아에겐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근 몇 달간 라이언은 모든 일에 있어서 수동적이었다. 이올라오스가 그토록 걱정한 이유기도 했다.
테룬 공국과 제국의 엄청난 국력 차이에도 전쟁이 이토록 지지부진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황제인 라이언이 모든 것을 놓아 버렸으니까.
그런데, 그가 달라져 있었다.
“아, 곧 이올라오스가 돌아올 터다. 준비해 두어라.”
“예!”
몇 시간 전, 미렌 우드를 품에 안고 돌아온 황제는…… 다시 제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게 로이아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기사로서, 자신의 주군이 다시 살 의지를 가진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으므로.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로이아가 아래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미 새벽이 훌쩍 넘은 시간이라 지칠 법도 했건만 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로이아가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녀의 눈에 저 멀리 영주 성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보였다.
이올라오스 트리온.
기사단장이 돌아왔다.
“단장님!”
“폐하께선 어디 계시지?”
“폐하께선, 저곳에…….”
로이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올라오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라이언의 모습이 보였던 탓이다.
이올라오스가 다가가자 라이언 또한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이올라오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검, 이올라오스 트리온. 복귀하였습니다. 폐하, 드릴 말씀이…….”
“늦었군.”
“……송구합니다.”
미렌 우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답지 않게 성급히 말을 꺼내던 이올라오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곤 문득 눈을 치떴다.
‘늦었군.’이라니.
황후인 미렌 에드가가 죽은 뒤로, 그는 이올라오스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오로지 단순한 명령만을 내려 왔으니까.
설마.
숨을 들이켠 이올라오스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봤다.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한 채 물었다.
“아셨……습니까?”
무엇을 알았는지에 대한 말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진 이올라오스도, 받은 라이언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미렌 우드’가 ‘미렌 에드가’인지 알았냐는 물음.
이올라오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간결한 대답 한 번에 이올라오스는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잊고 라이언의 얼굴만 올려다봤다. 이제껏 죽어 있는 것 같았던 제 주군이 드디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올라오스가 벅찬 얼굴로 고개를 숙여 충성을 다했다.
그 순간, 라이언이 속삭이듯 말했다.
“날 두고 미쳐 버린 황제라 하더군.”
“……폐하.”
라이언은 제 앞에 붙은 수식이 우스운 듯 픽 웃었다. 이올라오스가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였다.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지.”
“…….”
“베르디움 공작은, 더 이상 내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야.”
나지막한 숨결이 이어졌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저 멀리 베르디움 공작이 있을 방향을 향해서 돌아갔다.
오직 짙은 검정밖에 없던 라이언의 눈가로 저 멀리 흰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느새 새벽은 물러가고 해가 뜨고 있었다.
그 해를 바라보던 라이언이 말했다.
“이제 다시, 완벽한 태양이 되어야지 않겠나.”
내 아내의 소원이었으니까. 짧게 덧붙인 한마디가 이올라오스의 귓가에 내리박혔다.
태양이 다시 뜰 시간이었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