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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19화 (119/133)

119화

유성은, 소원을 이뤄 준다

“미렌. 미렌, 정신 차려 봐.”

서둘러 미렌에게 다가간 헤겔이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몸은 이미 연기를 과도하게 마신 듯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헤겔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되었다.

손에 힘을 주어 꽉 한 번 쥐었다 편 헤겔이 침착하게 이동 마법의 주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눈마저 감은 채였다.

“욱…….”

그러나 마법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렌을 끌어안은 헤겔의 신형은 반쯤 일그러지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가 피를 쏟아 냈기 때문이다.

툭……, 투둑.

새까만 동굴 바닥으로 무언가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제 피임을 깨달은 헤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입가를 대강 닦은 헤겔은 한 번 더 자신의 마나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전과 달리 공간이 일그러지지도 않은 채 끝이 났다.

마나 서클이 완전히 망가졌다.

어쩌면 다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미 이곳에 연기가 가득 들어찼다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모포를 발견한 헤겔이 그것으로 미렌의 입가를 막았다. 자신의 숨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다.

“미렌, 미렌…… 제발. 제발!”

여길 나가야 해.

그녀를 안아 든 헤겔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을 때였다. 그는 어깨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제 숨을 들이켰다.

헤겔의 호흡이 가빠졌다. 설마 싶어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던 헤겔은 조금 전 해 두었던 힐링 마법마저 사라져 버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어깨로는 미렌을 안아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헤겔이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이토록 자신이 무력하다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하지만, 미렌은. 동생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미렌은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

스으으…….

태생부터 마법사였던 헤겔은 제 주변 마나의 흐름이 뒤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의 앞쪽 공간이 일그러지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미렌을 끌어안느라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헤겔은 그 걸음의 주인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라이언 토르 워로덴.

그가…… 이곳에 왔다.

“어떻, 게…….”

그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우습게도 이것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헤겔은 자신을 비겁하다 여기면서도 끝까지 라이언에게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미렌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머릿속 어딘가로는 이미 미렌은 라이언만을 바라고 있노라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헤겔은 내내 그것을 무시해 왔다.

그런데 황제가, 제 앞에 나타난 것이다.

“헤겔, 카르너.”

“…….”

“내가 그토록 우스웠나?”

깊은 동굴 속에선 라이언이 한 걸음씩 내딛는 소리마저도 깊게 울려 퍼졌다. 헤겔은 멍하니 그 모습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라이언은 막상 쓰러진 미렌과 헤겔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가장 먼저 누워 있는 그녀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경건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는 미렌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헤겔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마침내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겔을 힐끗 바라보던 라이언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라이언은 미렌을 들고 일어설 때까지, 헤겔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를 향해 욕설이라도 지껄였다면 이토록 비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미렌의 목숨만이 중요하다는 듯…….

헤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게 라이언의 전부였다.

그 사실이 헤겔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봐, 황제.”

“……말하라.”

“이 앞은 베르디움 공작이 지키고 있어. 동굴을 나간다고 해서 해결되진 않을 거야.”

“그래서?”

미렌을 품에 안은 라이언은 그게 무엇이 문제냐는 듯 굴었다. 이올라오스도 없는 그가 혼자서 미렌을 구출해 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라이언은 망설이지 않았다.

미렌이 살아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그에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렌 에드가가 죽은 뒤 미쳐 버린 황제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미렌을 대했다. 그 사실이 헤겔에겐 절망스러웠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

“어떻게 해야 내가 널 이길 수 있는 거지?”

헤겔은 단 한 번도 저 사내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추잡한 방법을 동원해도 저 황제를 이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헤겔을 단 한순간도 돌아봐 준 적이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무시한 건 헤겔 자신이었다.

“과연 그러할까.”

“……뭐?”

“나는 미렌에게 제대로 된 도움이 된 적조차 없지. 그녀는 내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달랐지 않나.

덧붙여진 그의 간결한 한마디가 헤겔의 귓전을 때렸다.

그 순간 헤겔은 탁, 허탈하게 웃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을지도 몰랐다.

헤겔이 어깨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상과 외상을 동시에 입은 터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가 다가왔다.

헤겔은 미렌을 안은 라이언의 앞에 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봐, 워로덴 황제.”

“…….”

“소원이 있나?”

라이언은 그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그가 서슴없이 말했다.

“미렌이…… 오랫동안 사는 것.”

“하.”

“자신이 시한부라며 모든 걸 포기하지 않고, 나를 위하지도 않고, 오로지 본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

그게 전부다.

라이언의 기나긴 말에 헤겔은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이윽고 그의 손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마법이 이뤄지지 않아 아무 변화도 없던 것과는 달랐다. 헤겔의 손에서 터져 나온 빛은 곧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갑작스러운 섬광에 라이언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귓가로 헤겔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미렌의 눈을 가려 줘.”

“……그게 무슨.”

“내 이동 마법은 어지러우니까.”

입을 다문 라이언은 의심하면서도 미렌의 두 눈 위로 제 큰 손을 덮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헤겔이 씩 웃었다.

이윽고 그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는…….

동굴 속에는 오로지 헤겔만이 남아 있었다.

점차 동굴 속으로 불이 번져 왔다. 그 붉은 지옥 속에서 헤겔이 중얼거렸다.

“네 소원을 이뤄주지, 황제.”

***

헤겔은 문득 미렌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을 두고 오징어라 부르던, 건강하고 씩씩한 미렌 우드.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기에, 그녀가 미렌 에드가인 것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아는 미렌은 죽어 가는 시한부 황후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죽을 몸입니다. 헤겔 씨, 모른 척 눈감아 주세요.’

그랬기에…… 더 애처로웠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그녀를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도와 달라는 그 쉬운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죽어 가는 그 황후가 안쓰러워서.

‘이대로 멍청하게 죽어 버린 폐비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요. 그 삶도 내가 살아온 삶이야.’

그녀를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목숨이라면 자신이 가져가겠다며.

몇 번이고 한계에 치달은 다음에야 살고 싶다고 외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음습한 생각을 했다.

자신은 그저 도와주고 싶을 뿐이라고.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헤겔은 조금도 깨닫지 못했었다.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부질없는 후회가 맴돌았다. 어차피 평생이 가도 말하지 못했을 것을 알면서도 그러했다.

제 사랑은 그녀에겐 모욕이었다. 헤겔은 미렌을 사랑하기 위해선 비겁해져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는, 헤겔을 두고 비겁해지지 말라 했다.

그러니 전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네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더는 아쉽지 않도록, 황제를 마음껏 사랑하면서.

자신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미렌의 가장 소중한 기억 일부분을 앗아 갈 것이다. 헤겔은 그런 자신의 질 낮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점점 힘이 빠지자 헤겔은 동굴 벽에 몸을 기대었다. 저 멀리 시야 너머로 새빨간 불꽃이 보였다. 불은 점차 커져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하하……. 정말 멍청하네.”

이제 헤겔의 속에는 조금의 마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나 서클이 무너진 것은 고작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도지만, 그 상태에서 모든 마나를 소진했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부서진 마나 서클은 새로운 마나를 만들어 내지 못하니까. 생명체는, 마나가 없으면 죽는다.

헤겔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마나를 짜내 마법을 행했다.

멍청하디 멍청한, 이전의 헤겔 카르너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

“미렌.”

미렌…….

대답 없는 부름이 이어졌다. 헤겔은 무엇이 아쉽다고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만 불러 댔다.

동굴을 잠식한 연기로 인해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자 헤겔은 두 눈을 감고 그녀를 떠올렸다.

미렌.

나는 네가, 다음 생에도 미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너를 조금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저 황제보다도 더 빨리.

그리고 그때는, 나는 조금만 덜 똑똑하게 태어나야겠다.

실실 웃으며 네 생각만 하고 살게.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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