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별의 몰락
“황후를 찾았다……! 모두 쫓아!”
이올라오스와 떨어진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어느새 저 멀리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만큼 베르디움 공작 측의 수색망도 좁혀졌다. 우거진 숲을 이용해 도망치던 미렌도 결국엔 그들의 눈에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외침으로 인해 점차 뒤를 따라오는 인원이 많아지자, 미렌은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굴러 내린 미렌이 돌 뒤로 힘겹게 몸을 숨겼다. 조금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던 병사들의 의문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분명 이쪽으로 갔는데?”
내도록 달리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던 미렌은, 잠시 눈을 앞으로 돌렸다. 그러자 때마침 저 멀리 조그만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분명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테니까.”
순간적인 기지로 겨우 몸을 숨겼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아 발각될 터였다. 미렌은 별수 없이 저 동굴을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다행인 것은 동굴의 입구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그나마 눈에 덜 띈다는 점이었다. 빠르게 동굴로 입성한 미렌이 가볍게 안을 살폈다.
그런데 동굴이 어딘지 익숙했다.
“……아.”
문득 미렌의 머릿속으로 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미렌이 어릴 때 아버지와 자주 놀러 왔던 동굴이었다.
산속에 있는 계곡을 가거나 하면 잠시 이곳에 들러 쉬곤 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미렌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이곳에는 미렌이 어릴 때 사용하던 장난감 같은 게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용 모포를 찾은 그녀가 그것을 들고 가볍게 먼지를 털었다.
바람이 통하는 동굴 내부는 바깥에 비해 기온이 낮았다. 모포를 어깨에 두른 미렌이 튀어나온 돌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아빠 보고 싶다.”
이러고 있으면 아버지가 생각났다. 미렌과 놀아 주다 잠시 쉬기 위해 이곳에 오셨던 아버지는 가볍게 불을 피워 잡은 물고기를 구워 주곤 하셨다.
주변을 둘러보던 미렌은 제 무릎을 모아 푹 고개를 묻었다. 혼자 있을 때가 생기면 가끔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때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갔다면, 괜찮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미렌이 가볍게 머리를 휘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까 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턴 부러 그렌의 생각만 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그래야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늦으면 그렌이 걱정할 텐데…….”
거기까지 중얼거리던 미렌이 문득 입을 닫았다. 동굴의 제법 깊은 곳까지 들렀던 미렌은 어디선가 자신 말고도 기묘한 소음이 나는 것 같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정한 발걸음 소리.
그건 분명…….
일부러 맞춘 듯한 걸음 소리였다.
“……봤다니까.”
“쥐새끼도 아니고, 설마 여기 들어왔을까 봐?”
처음 들어 보는 남자의 목소리까지 들려오자 황급히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포가 굴러 떨어졌다. 그녀가 당황스러운 낯빛으로 동굴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동굴 속은 빛이 잘 새어 들지 않아 사내들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동굴은 입구만 있을 뿐, 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렌이 뒷걸음질 쳐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그녀의 발에 걸린 돌멩이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러느라 동굴 속에는 돌멩이의 소음이 가득 울려 퍼졌다.
“누가 있는데?”
기사 하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렌이 순간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청각에 예민한 기사들이 이질적인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곧 그들이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미렌은 기사 두 명과 마주했다.
“찾았다.”
사냥감을 발견한 그들은 미렌을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검을 빼 든 그들이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미렌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요, 황후 전하. 아니…… 황후 전하가 맞긴 한가?”
“됐어, 그런 건. 우린 공작 각하의 명만 들으면 됐지.”
기사들은 한 걸음씩 미렌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물러서던 미렌은 동굴의 끝에 등을 부딪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음을 직감한 순간, 미렌이 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만.”
“이봐!”
“더 다가오면, 이대로 죽음을 택하겠어.”
미렌의 가슴팍에서 나온 건 단검이었다. 이올라오스가 혹시 몰라 공작을 만나기 전부터 그녀에게 쥐여 준 것이었다.
단검을 빼 든 미렌이 그것을 단번에 제 목에 가져갔다. 기사들이 한 발짝이라도 떼려 하면, 그대로 손에 쥔 단검으로 목을 얇게 베어 냈다.
기사들을 바라보는 미렌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물었다.
“베르디움 공작이 날 생포하라 명하던가?”
“……그걸 어떻게…….”
“공작에게 전하거라. 황후, 미렌 에드가는 폐하께 피해를 끼치느니 죽고 말겠다고.”
미렌은 자신의 결심을 다짐하듯 조금 더 목 주위를 베어 냈다. 그녀의 목으로부터 실금 같은 피가 흘러나왔다.
놀란 기사들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일단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저 황후라 의심되는 여자가 죽었다간 공작의 분노를 살지도 몰랐다.
“……돌아가자.”
“뭐? 사냥감을 다 잡아 놓고선 왜…….”
“어서 움직여. 공작 각하께 보고하는 게 우선이야.”
결국 기사들 중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였던 이가 낸 의견으로 인해 그들은 점차 물러섰다. 그러나 두 기사 중 한 명은, 미렌을 끝까지 노려보며 말했다.
“황후 전하, 이게 아주 조금의 시간만 벌 뿐이란 걸, 알고 있겠지요?”
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을 뿐이었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건 미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그제야 목에서 단검을 떼어 냈다.
“하…….”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저 기사가 한 말대로 아주 조금의 시간만 더 번 것이었다.
이 동굴은 따로 출구가 하나 더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 한 줌 불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기사들도 그것을 알기에 순순히 물러간 것이리라. 어차피 때가 되면 미렌이 나와야 했기에.
기사들과의 대치로 인해 긴장이 풀린 미렌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서 살아날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에 잠겼을까.
미렌은 문득 동굴 내부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냄새가 나는 방향을 향해 몇 걸음 내디뎠다.
“……!”
몇 걸음 걷지 않아 미렌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냄새가 무엇인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베르디움 공작이, 이 동굴을 향해…… 불을 피웠다.
폐쇄된 동굴 속으로 연기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꼭 굴에 들어간 뱀을 몰아낼 때처럼.
살고 싶으면 나오라는, 베르디움 공작 특유의 잔인한 뜻 또한 그대로 전해졌다. 동굴 한가운데서 납작하게 웅크린 미렌은 생각했다.
이대로 나가 공작에게 붙잡혔다간 또다시 라이언을 고통스럽게 하고 말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미렌 에드가란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모든 걸 포기하고 달려올 사내였다. 어쩌면 그 자신의 목숨조차도.
그렇기에 미렌은 나갈 수가 없었다. 웅크린 그녀는 쏟아지는 연기 속으로 점점…… 정신을 잃어 갔다.
라이언이 보고 싶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그게 미렌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쓰러지는 미렌의 시야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라이언.
이번엔…… 당신일까요.
***
헤겔은 제 입가로 비죽 흘러나온 것을 닦다 붉게 물든 손을 발견하곤 실소를 터뜨렸다. 대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마법을 사용하는 게 힘들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으아아!”
헤겔이 방심했을 때였다. 분명 기절한 것 같았던 병사가 대체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헤겔을 향해 검을 휘둘러 왔다.
푸욱!
가까스로 심장은 피했지만,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그의 너른 어깨로 검이 깊숙이 박히며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헤겔 또한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짧은 주문이 외워짐과 동시에 검을 휘두른 병사에게로 마법이 쏘아져 나갔다.
퍽,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병사는 신형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발아래로 피 웅덩이가 고여 들었다.
“망할…… 더럽게 아프네.”
중얼거린 헤겔이 제 어깨를 매만졌다. 어깨에 꽂힌 검은 단단히 박혀 쉽사리 빠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단숨에 그 손잡이를 잡고 빼내었다. 헤겔의 입가에서 다시 한번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헤겔이 제 어깨에 대강의 응급 처치를 위해 힐링 마법을 쏟아부을 때였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둔탁한 감각이 치고 갔다.
헤겔은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 자신이 미렌에게 걸어 주었던 보호 마법.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헤겔은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 어깨가 엉망이라는 것도, 이미 연속해서 사용한 이동 마법과 다른 마법들로 인해 더는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도.
그는 미렌이 마지막으로 보내온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이동 마법을 실현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순간,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연기에 휩싸여 쓰러진 미렌.
가물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미렌.
그리고.
“라이언, 이번엔…… 당신일까요.”
정신을 잃어 가는 미렌의 조그맣고 간절한 한마디.
그 순간 헤겔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자신은 미렌을 도와주겠다는 미명하에 그녀의 곁을 맴돌았지만, 그녀는, 사실…….
언제나 헤겔이 아니라 라이언을 바라 왔단 것을.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