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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16화 (116/133)

116화

소원을 이뤄 주는 마법사

“저는 떨어지지 않을 테니 앞에 집중하세요, 이올라오스 경!”

빠르게 지나치는 바람결에 미렌의 목소리가 다소 작아졌다. 그녀는 이올라오스를 위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외쳐 댔다.

가냘픈 미렌이 떨어질까 걱정되어 허리를 붙잡고 있던 이올라오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어깨를 움찔했다. 걱정되어 말을 다루는 것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올라오스는 미렌의 허리를 놓은 채 고삐를 잡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미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이올라오스의 팔을 단단히 잡은 채였다.

“황후를 쫓아라!”

“황후를 쫓아―!”

그녀가 고개를 힐끗 돌리자 뒤에선 베르디움 공작과 더불어 그의 수하들이 이쪽을 쫓아오고 있었다.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거기다 이미 처음 함께 달리기 시작했던 스무 명 남짓의 기사들은 그녀와 이올라오스의 길을 터 주느라 이제는 몇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을 벌기 위해 베르디움 공작의 시선을 끄는 건 좋았다. 그러나 다음 작전을 실행하려면 뒤를 쫓아오는 이들과의 거리를 제법 벌려야만 했다.

“이올라오스 경, 잘 들으세요.”

“……말씀하십시오.”

“저들은 이제 이올라오스 경이 아니라 저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절 잡는 순간, 전황은 뒤집힐 테니까요.”

이올라오스는 묵묵히 미렌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아니,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미렌 우드가 미렌 에드가 황후였다는 것부터가 전혀 현실성 없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올라오스는 황후를 모시는 것처럼 조심히 굴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가며 고민하는 그녀의 얼굴이, 살아생전 황제를 위해 움직이기 바빴던 미렌 에드가와 닮아 있었으니까.

“그러니 절 버리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와 이올라오스 경이 나뉜다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겁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마십시오. 저들은 무예를 배운 기사와 병사들입니다. 그런데 우드 님, 이…….”

저도 모르게 우드 님을 불렀던 이올라오스는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정말 황후 전하라고 불러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렌은 개의치 않고 이어 말했다.

“이올라오스 경, 아직도 제가 누군지 헷갈리십니까?”

“예?”

“미렌 우드입니다, 저는. 이곳 프레니티 영지와 산맥에서 평생을 살았던 미렌 우드요.”

이올라오스를 바라본 미렌이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이올라오스는 멍한 얼굴로 그녀의 온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그는 예전에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밤에도 올라올 만큼 산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물론 저는 빼고.’

‘우드 씨가 범인인 겁니까?’

‘그럴 리가요.’

농담처럼 나누었던 대화들. 미렌 우드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이 산맥에서 길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그 사실을 떠올린 이올라오스는 그제야 제 앞에 앉은 이가 미렌 우드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저 막사를 넘으면 프레니티 산맥의 초입이 시작됩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나무가 많고 산세가 험한 것으로 압니다. 거기서…… 갈라지는 겁니다.”

“좋아요. 뒤를 따르는 기사들은 이올라오스 경이 데려가세요. 저는 제 몸을 숨겨야겠습니다.”

처음에는 스무 명 남짓이었던 기사들이 이제는 다섯 명 안팎으로 줄어 있었다. 미렌과의 대화를 마친 이올라오스가 뒤쪽으로 수신호를 보내었다.

그와 동시에 말머리가 갑작스럽게 돌아갔다. 미렌은 반동으로 인해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 매달렸다.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꾼 탓에 지척에서 따라오던 베르디움 공작 측의 기사 몇 명이 나가떨어졌다. 물론 아직도 따라오는 기사들은 많았지만 가장 가까웠던 놈들을 떨어트리니 그나마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속도를 높여야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이올라오스가 말을 채찍질해 산속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거리는 더욱 벌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산속 한가운데에 도착한 이올라오스가 서둘러 말의 속도를 늦췄다. 말이 멈추자 가볍게 뛰어내린 그가 아래에서 미렌을 향해 팔을 내뻗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이올라오스의 어깨를 짚고 바닥에 내려섰다. 이윽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최대한 멀리 가시는 겁니다.”

“우드 님, 아니…… 전하. 하지만, 전하께서는…….”

“이올라오스 경,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우리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낮게 웃은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여전히 이올라오스의 한쪽 어깨를 짚은 채 읊조렸다.

“우리는 친구지 않습니까?”

그녀는 자신이 ‘황후 전하’인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미렌 우드와 미렌 에드가가 동일 인물인 것은 맞을 터였다.

이올라오스는 시한부 황후인 미렌 에드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주군인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야 했음을, 이올라오스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 나약하기 짝이 없던 시한부 황후가 미렌 우드와 같은 사람인 것을 알자…… 어쩐지 다르게 보였다.

“……꼭 무사하십시오.”

“제 걱정은 마세요. 이올라오스 경께서는 폐하의 걱정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폐하의 검이시니까요, 하며 웃는 그녀의 얼굴은 몹시도 상쾌해 보였다. 어쩌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반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결국 이올라오스는 미렌을 남겨 둔 채 홀로 말에 올라탔다. 말고삐를 쥐고 힘껏 달려 나갈 때까지, 이올라오스는 몇 번이고 미렌을 돌아봤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돌아볼 때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웃어 주었다.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날, 이올라오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황제의 검이 된 것을 후회했다.

***

한편, 헤겔은.

베르디움 공작이 배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움직였지만, 곧장 미렌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대열에서 빠져나온 다음 말에서 내려 홀로 이동 마법을 시전한 게 조금 전이었다. 자신이 지냈던 막사로 워프한 그는 밖으로 나왔다가 눈을 찌푸렸다.

베르디움 공작 측이 남아 있던 이곳의 병사들을 모두 죽이거나 잡아가고 있었다. 이미 저쪽에서는 큰불이 사방팔방으로 번져 가는 채였다.

아비규환인 이곳에선 아무리 헤겔이라도 당장 미렌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그가 서둘러 그녀를 찾기 위해 한 걸음 떼었을 때였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윽, 커억!”

누군가가 발에 채는 소리가 헤겔의 귓가에도 선명히 들려왔다. 그 사내가 불쌍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헤겔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헤겔은 사내의 비명을 못 들은 척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아이가, 제게는 아이가 있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하? 프레니티에서 끌려온 노예 주제에 아이는 무슨! 어서 움직이지 못해?!”

“다, 다리를 다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이 또한 정, 정말입니다……. 프레니티에 가면, 제 애가…….”

사내의 간절한 외침을 듣는 순간 자신이 구해 줬던, 그리고 자신을 구해 줬던 그 아이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엄마랑 아빠의 집이 다시 생기는 거요.’

‘……그래?’

‘많이 많이 우셨어요. 저한테두 미안하대요.’

잡혀간 아이의 아버지와 저 사내가 같은 사람일지는 모른다. 아주 낮은 확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당장 발을 떼지 못했다.

결국 돌아선 그가 한 번 더 사내를 발로 차려는 병사에게 다가가 단숨에 그 목을 쥐었다.

“크윽, 누구, 누구냐……!”

“아이가 있다고?”

목이 졸린 병사는 헤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헤겔은 누구냐는 질문엔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봤다.

엎드려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헤겔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어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프레니티에서 끌려왔나?”

“예? 예…….”

“집을, 잃었고?”

“맞, 맞습니다. 테룬 공국 놈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집이 타 버려서…….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다음에 끌려오다 보니 이곳이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내가 억울한 눈으로 헤겔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사이 헤겔이 목을 낚아챘던 병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병사가 정신을 잃자 헤겔은 그대로 손을 놓았다. 기절한 병사를 바닥에 내려 두고 사내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네 딸을 만나면, 그렇게 말해 줘.”

“예……?”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가 소원을 이뤄 주었노라고.”

알겠어?

덧붙인 헤겔은 사내의 얼떨떨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단번에 일으켰다. 그리고 따악, 가볍게 손을 부딪쳐 마법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사라졌다. 그가 프레니티 영지민들이 안전하게 모여 있는 곳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약속한 소원을 이뤄 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

헤겔의 입가로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연속된 이동 마법의 대가였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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