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짙은 그림자
“오퓨커스 경, 무슨 일이라도 있나?”
뒤따라가던 오퓨커스는 라이언의 물음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라이언의 뒤를 따르던 기사 하나가 병사로부터 무언가를 듣더니 말의 속도를 높여 선두로 다가섰다.
“폐하, 급보입니다. 베르디움 공작이…….”
이야기를 듣는 황제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로지 오퓨커스만이 어딘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드디어 움직였나.”
중얼거린 황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프레니티 영지를 향해 갈 뿐이었다.
그 결정에 놀란 건 지척에서 따라가던 헤겔이었다. 그는 말의 고삐를 쥐어 라이언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물었다.
“베르디움 공작이 배신했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가 군사를 이끌고 우리의 뒤를 쳤다는군.”
“뒤라면……! 병사들과 기사 몇 명만이 겨우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
짧게 대답한 라이언은 헤겔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이유가 되나?”
“그곳엔, 미렌 우드와 이올라오스 경이 남아 있습니다!”
“이올라오스는 나의 명령으로 그곳에 남았다. 베르디움 공작이 지금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미렌 우드는요? 미렌은 어떻게……!”
“그녀를 미렌이라 부르지 마라.”
흥분한 헤겔을 두고 라이언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에 헤겔이 하던 말을 관두고 입을 다물었다.
헤겔을 바라보는 라이언의 얼굴은 지독할 정도로 무감각했다. 미렌 우드라는 이름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헤겔은 깨달았다. 황제는 아직 미렌 우드가 미렌 에드가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아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이대로 미렌의 정체를 밝히고 그를 돌아가게 할지, 아니면 밝히지 않고 탈환 작전을 계속하게 둘지.
만일 전자를 선택할 경우…….
헤겔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렌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돌아가야겠습니다.”
헤겔의 말머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이언이 손을 들어 행군을 멈추었다.
“카르너 경, 지금 탈영하겠다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죗값은 돌아와서 달게 받을 테니.”
“어째서?”
말머리를 돌린 헤겔은 곧장 돌아가지 못하고 고삐를 꾸욱 눌러 쥐었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라이언이 연이어 물었다.
“미렌 우드가, 네겐 그렇게나 소중한가?”
“지고하신 폐하께선 하등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일 텐데요.”
“대답하라.”
라이언은 끈질겼다. 그의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헤겔을 따라다녔다.
헤겔은 그 눈빛이 싫었다. 자신은 꼭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 보고 있자면 지독한 압박감으로 무엇이든 말해 버리게 하는 황제 특유의 위압감이.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소중합니다. 제겐,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네가 마음에 담았다는 사람이…… 그자인가?”
“예, 폐하.”
헤겔은 라이언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또한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함 또한, 나는 이용하겠노라고.
처절하다 해도 좋았다. 치사하고 더럽다 하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헤겔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가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홀로 읊조린 라이언은 그대로 손을 들어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는 오로지 헤겔밖에 없었다.
자신을 제외하고서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던 헤겔은 결국 고삐를 움직였다. 조금만 더 멀어진 다음 이동 마법을 쓸 예정이었다.
탈환 작전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만큼 리키나 다른 마탑주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헤겔은 리키에게 눈짓으로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일행으로부터 멀어졌다.
오퓨커스가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홀로 애꿎은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
한편, 미렌은 이올라오스와 함께 막사를 나온 참이었다.
“대체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할 테니…….”
“이올라오스 경께서요? 아니요, 경께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올라오스가 눈을 찌푸렸다. 작고 연약한 그녀는 할 수 있지만, 자신은 할 수 없다니. 그런 작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이올라오스로서는 답답했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제게 설명한 후 그녀는 안전하게 숨어 있는 게 옳았기 때문이다.
검술조차 배워 본 적 없는 이가 이 위험한 전장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미렌은 이올라오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꼿꼿한 태도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말은 준비가 되었나요?”
“……예. 말을 탈 줄은 아십니까?”
“아니요, 따로 기마술을 배워 본 적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배웠다 하더라도 전투 기마술을 배우신 경들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겁니다.”
미렌과 이올라오스의 뒤로는 그의 장담대로 기사 스무 명 정도가 서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전 전투에서 어딘가 다쳐, 치료를 받고 있었거나 명령으로 인해 이곳에 남은 이들이었다.
이올라오스가 말에 오르자 미렌이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제가 이올라오스 경의 앞에 탈 것입니다.”
“예?”
“못 들으셨습니까? 경과 함께 말을 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리를 비워 주세요.”
이올라오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미렌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앞자리를 비워 줬다. 그러자 미렌이 말 잔등을 밟고 끙끙거리며 올라왔다.
기마술을 배워 본 적이 없던 그녀는 말에 오르는 것조차도 힘겨워했다.
이올라오스는 대체 왜 미렌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단숨에 말 등 위로 올려 주었다.
“되셨습니까?”
“고마워요. 이올라오스 경, 고삐를 단단히 쥐셔야 할 겁니다.”
미렌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올라오스도 자연스럽게 고삐를 한 번 더 다시 잡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렌의 말을 따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령을…… 내려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의문을 비칠 수는 없었다. 미렌 우드, 그녀의 다음 명령이 너무나도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베르디움 공작을 찾아갈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찾아가다니요?”
“베르디움 공작은 현재 이올라오스 경을 찾기 위해 이 넓은 부지를 흩어져 뒤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이 적기예요.”
이올라오스가 침을 삼켰다. 그는 잠시 제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스무 명 남짓의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대로 그녀의 명령을 따라도 되는 걸까.
그런 고민이 자꾸만 들었다. 자신은 혼자도 아니었고, 적지만 따르고 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이올라오스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앞에 앉은 미렌이 나직이 말했다.
“제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 알고 있습니다.”
“……우드 님.”
“하지만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이올라오스 경,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지겠다.
그 한마디의 무게를 그녀는 알고 있을까. 이올라오스는 문득 제 앞에 앉은 미렌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이미 고개만 돌려 이올라오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둘 사이의 눈이 마주치자 그 순간 이올라오스가 말고삐를 거칠게 움직였다.
이 조그맣기 짝이 없는 등이…… 왜인지 너무도 단단해 보였다. 이올라오스는 그것을 믿기로 했다.
그게, 이올라오스 트리온이라는 기사의 직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베르디움 공작을 찾았습니다!”
뒤에 있던 기사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이미 이올라오스와 일행의 뒤로는 베르디움 공작의 병사들로 보이는 이들도 몇 명 따라붙었다.
베르디움 공작을 찾자마자 방향을 바꾼 이올라오스는 그와의 거리가 열 걸음쯤 된 곳에서 말을 멈추었다.
더 이상 이동하지 않자 뒤에서 따라오던 병사들은 당장에 그를 치려 했다. 그걸 막은 건 베르디움 공작이었다.
“멈춰라. 죽고 싶어서 제 발로 찾아온 건가, 이올라오스 경?”
“……배신자는 그 입을 닥치십시오.”
“하하. 그 고귀하신 기사의 입에서 욕설이라니. 제법 들어 줄 만하군.”
이미 이올라오스의 주변에는 베르디움 공작의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베르디움 공작은 급하게 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이 조심스레 이올라오스를 향해 속삭였다. ‘주의를 끌 테니 뚫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보라’고.
순간 이올라오스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제 말 위에 타 있는 그녀가 어떻게 베르디움 공작의 시선을 끈단 말인가.
“이올라오스 트리온 경, 앞에 태운 여자는 누구지?”
베르디움 공작의 시선이 미렌을 향했다. 그녀는 공작의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뭐?”
미렌은 꼿꼿이 목을 세운 채 베르디움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순간 그 모습이 누군가와 겹치는 듯한 기억에 눈을 찌푸렸다.
“에드가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
“힘없이 죽어 가던, 폐하의 오점.”
그쯤 되자 베르디움 공작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저 꼿꼿한 태도가 누구를 떠올리게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미렌 에드가 워로덴.”
“그 사람은, 이미 죽었…….”
“글쎄요.”
미렌의 입꼬리가 매혹적으로 올라갔다. 미렌 에드가 황후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귀족파의 수장이셨지요.”
“……그렇다면.”
“제 아버지께 물려받은 자리가 그리도 좋으셨습니까?”
그 순간 베르디움 공작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제 아버지께서는 베르디움 공작을 두고 늘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자리를 차지하고 말, 역겨운 여우.’라고.”
베르디움 공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의 머릿속으로 에드가 공작의 살아생전 모습이 떠올랐다.
‘이봐, 베르디움 공작.’
‘……에드가 공작이 제겐 어쩐 일입니까?’
‘귀족파를 이끌고 싶나? 제국을 가지고 싶어?’
‘……!’
‘그럼, 네 아내부터 죽여라.’
그 뱀 같던 사내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에드가 공작, 그는 제 아내가 죽은 뒤 단단히 미쳐 버린 사내였다.
“아내도…… 그래서 죽였지 않습니까?”
베르디움 공작 부인이 살해당했을 때, 미렌은 라이언으로부터 ‘죽였으니 사랑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움켜쥐기 위해서, 라는 말 또한 들었다. 그때 미렌의 머릿속으로는 제 아버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뒤 잘못된 방향으로 파멸해 가던 제 아버지.
베르디움 공작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닮았다.
“공작 각하.”
“너, 너……. 정말 미렌 에드가 황후인가?”
공작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미렌을 가리켰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전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에드가 공작의 유일한 자식, 미렌 에드가가 아니고선 알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알고 싶다면 절 쫓아오십시오.”
그와 동시에 미렌이 이올라오스의 이름을 외쳤다. 이올라오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머리를 돌려 미리 봐 두었던 경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당장 황후를 쫓아라!”
베르디움 공작의 벼락과도 같은 노성이 내려앉았다.
미렌 에드가 황후, 그녀는 죽어서도 황제의 그림자가 되었다. 가장 고귀한 태양을 빛내기 위한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