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14)화 (114/133)

같은 마음으로

“우드 님, 움직이셔야겠습니다.”

“이올라오스 경, 지금, 이게 무슨……!”

이올라오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향해 오는 베르디움 공작을 발견한 순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은 미렌이 머뭇거렸을 때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올라오스가 미렌의 무릎 뒤에 손을 넣고 그대로 안아 들었다. 강제로 발이 떼어진 미렌은 그대로 그의 어깨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베르디움 공작은 정확히 미렌이 있는 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올라오스는 서둘러 그녀를 안고 막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임시 천막들이 잔뜩 세워진 곳이라 길이 어지러웠다.

품에 안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이올라오스의 어깨만 꽉 잡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이올라오스와 미렌이 그나마 몸을 숨길 수 있는 천막에 들어왔을 때였다.

“우드 님, 잘 들으십시오.”

어느 기사의 천막으로 보이는 이곳에는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올라오스는 미렌을 그곳에 앉혔다.

그리고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미렌을 지그시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저들은 저를 찾고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베르디움 공작은 폐하를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왔습니다. 프레니티 영지에 있는 테룬 공국과 힘을 합쳐서요.”

이올라오스의 설명을 들은 미렌이 침대 시트를 구겼다. 저들은 프레니티 영지로 떠난 제국의 군대를 뒤에서 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라이언뿐만 아니라 그곳엔 헤겔을 비롯해 마법사들도 있으니 쉽게 당하진 않을 터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테룬 공국과 양동 작전이라도 펼쳤다간.

아무리 라이언이 이끌고 있는 군대라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미렌이 이올라오스를 바라봤다. 그의 말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이곳엔 저 말고도 남아 있는 기사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이끌어 최대한……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 생각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헤겔과 라이언이 돌아올 때까지.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을 때까지라도.

이올라오스가 굳은 눈으로 미렌을 바라봤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 막대한 군대를 고작해야 수십 명밖에 없는 기사들로 상대한다는 건 아무리 이올라오스라 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의 앞에 있는 미렌 우드가 이 일과는 관련이 없는 평민이라는 점이었다.

조금 전에는 몸을 숨기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으나 이올라오스가 이곳을 나가면 적어도 미렌은 안전할 터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단단히 숨어 있을 것을 당부하려 했을 때였다.

“어떻게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시간을 끌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올라오스 경.”

“그건…….”

이올라오스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도 시간을 끌어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딱히 이렇다 할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해내야 했다. 그러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이용해 볼 생각입니다.”

“베르디움 공작이 끌고 온 군대는 적어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사들은, 몇 명입니까?”

“스물, 아니, 스물다섯 정돕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이올라오스 경. 스물다섯의 기사들로 감당이 가능합니까?”

그들 개개인이 아무리 대단한 검기와 검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수백 명을 모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더군다나 베르디움 공작은 마법사들도 몇 끌고 온 것 같았다.

개죽음을 당하는 건 당연했다. 미렌은 담담히 그 점을 짚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돕겠습니다.”

“우드 님이요? 검술이라도 배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라이언, 아니, 폐하께서 오셔도 저들을 감당키는 불가능할 겁니다.”

이올라오스는 문득 미렌의 입에서 실수처럼 나온 ‘라이언’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익숙하게 들린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꼭…….

죽은 미렌 에드가 황후가 폐하를 부를 때처럼.

미렌은 침대에서 일어나 한 걸음 더 이올라오스에게 다가갔다. 그다음, 그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갑옷조차 입지 않은 너른 어깨는 오랜 기간 단련해 온 기사의 것답게 단단했다. 미렌은 이올라오스의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그의 두 눈을 내려다봤다.

“저를 믿으세요.”

“……우드 님.”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미렌은 자신이 이올라오스에게 이런 말을 해 대는 게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알았다. 그래 봤자 평민인, 검술도 모르는, 작고 약하기만 한 자신이 이올라오스를 돕겠다니.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라이언과 헤겔이 돌아오기 전까지, 고작 스물다섯의 기사와 이올라오스만으로 버텨 낼 수 있을지.

***

“야, 알페카.”

“응?”

말을 타고 가던 알페카가 속도를 늦추더니 오퓨커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지금 마법사단의 일원으로서 황제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퓨커스는 앞서가는 라이언, 그리고 그 뒤에서 바로 따라가고 있는 헤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뭘 말이야?”

“그…… 미렌 우드라는 여자.”

오퓨커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직접 진찰했던 미렌 우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알페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죽은 미렌 에드가 황후와 너무 닮지 않았어?”

“으응? 전혀 닮지 않았는데?”

동시에 알페카도 미렌 우드에 대한 첫인상을 떠올렸다. 분홍색 머리와 분홍색 눈동자라는 독특한 색을 지닌 그녀는 미렌 에드가 황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한 미인이었다.

키는 다소 작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면 특유의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죽어 가느라 안색이 좋지 않았던 미렌 에드가 황후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런데 닮았다니. 알페카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 그 둘이 설마 잃어버린 자매라도 된다는 소리야?”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하아……. 오퓨커스가 답답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렌 에드가 황후를 진찰했던 적이 있는 거,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오퓨커스가 시한부 황후 미렌 에드가를 본 건 몇 년 전이 처음이었다.

신이 내린 손, 치료 마법의 대가라고 불렸던 오퓨커스는 어느 날 황제의 명령을 받고 황성을 찾아갔다.

‘내 아내를 살릴 수 있겠나?’

‘……함부로 말씀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저 황후 전하를 뵙게 해 주세요.’

무덤덤한 눈으로 오퓨커스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그대로 일어서 황후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 들어선 오퓨커스가 처음 느낀 것은, 새파란 낮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이 꼭 죽은 자의 공간처럼 어둡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의 한가운데에 미렌 에드가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가간 오퓨커스는 조심스레 메마른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마법사이자 치료사인 오퓨커스는 상대를 진찰할 때 손목을 이용했다.

오퓨커스는 눈을 감고 그녀의 상태에 집중했다.

‘이건 제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어째서지?’

‘진찰해 본 바, 황후 전하께서는 선천적으로 마나가 거의 없으시더군요.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침대 옆에 서서 잠든 황후의 얼굴만 내려다봤다. 오퓨커스는 감히 그 모습을 보아선 안 될 것 같아 푹 고개를 숙였다.

다만, 고개를 숙이면서도 잠시 고민했다.

조금 전 진찰한 에드가 황후의 몸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꼭…… 누군가의 몸과 이어진 것 같달까.

오퓨커스가 보고를 올릴까 고민하던 때였다.

‘폐하, 실례하겠습니다. 황후 전하의 약재를 챙길 때입니다.’

밖에서 들어온 이는 아마도 에드가 황후의 시녀로 보이는 여자였다. 마리아라고 불렸었나.

트레이를 끌고 들어오던 그녀는 오퓨커스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고개를 조아린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폐하,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상관없다. 우린 곧 나갈 예정이니, 미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정리해 두어라.’

‘예, 폐하.’

말을 마친 라이언과 오퓨커스는 그 마리아라는 여자를 지나쳐 나갔다. 그 순간 오퓨커스는 스쳐 지나가는 트레이 위에 놓인 약재를 살폈다.

밖으로 나간 다음 오퓨커스가 한 번 더 보고를 올렸다.

‘어떤 약을 쓰고 계십니까?’

‘미렌이 공작 성에서부터 먹어 온 약이라더군.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으니.’

‘그렇군요. 폐하, 황후 전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아르테미스가 아니면 없을 것입니다.’

‘아르테미스?’

‘복용자의 마나를 가라앉게 해 주는 약초입니다. 전하처럼 선천적으로 마나가 없으신 분들에겐 마나 서클이 제대로 순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초고요.’

‘구할 수 있겠나?’

‘……예전에 그걸 구하고자 했던 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뒤로 오퓨커스는 황제를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 아르테미스를 알고 있는 건 헤겔이었고, 이후 모든 일은 헤겔에게 맡겨졌으니까.

그때 오퓨커스는 괜한 보고라고 생각해 말하지 않았었다. 사실 시간 내에 아르테미스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어차피 죽을 이라면 괜한 말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듣던 알페카가 문득 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 그, 미렌 우드라는 여자가 우리 마탑에 찾아오고 나서 헤겔이 황후에 대한 일로 화를 냈거든.”

“뭐? 대체 왜?”

“아아, 그게.”

알페카가 머리를 긁적이며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헤겔이 황후에게 가진 마음을 미렌 우드라는 여자에게 말해 버렸단 내용이었다.

“……진짜 이상하네. 미렌 우드와 미렌 에드가가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

“그러게, 네 말을 듣고 보니 좀 이상해.”

오퓨커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헤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전에 황성에 무단 침입했다며?’

‘그런데 진짜 우리랑 돌아가야 해, 안 그러면…….’

문득 숨어 있던 헤겔을 찾아 데려가기 위해 미렌과 그의 보금자리에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헤겔은 분명.

‘못 가.’

‘어째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의 수가 제법 돼. 전쟁 중인 지금, 이 많은 사람을 데리고 한 번에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무척이나 교묘한 대답이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라니.

그곳에 간 마법사는 다른 이들도 아니고 ‘별의 세대’라 불리는 오퓨커스와 멜리크, 알페카였다. 거기다 이동 마법의 신이라고 불리는 리키마저 있지 않았던가.

그들이 모인 순간, 그 정도 인원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못 간다고?

“못 간 게 아니라 가기 싫었던 거지.”

“뭐? 오퓨커스, 너 뭐라고…….”

눈을 크게 치뜬 오퓨커스가 소리 질렀다.

“헤겔 카르너, 저 자식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앞서가던 라이언과 헤겔이 뒤를 돌아봤다. 오퓨커스는 두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두 남자의 표정이…… 두려울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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