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13)화 (113/133)

그림자는 당신의 발목을 얽고

“여기, 손이 좀 부족한데! 도와줄 사람 없어?!”

“제가 갈게요!”

일손을 구하는 목소리에 미렌은 서둘러 걸음을 움직였다.

오전에 라이언과 헤겔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떠난 뒤였다. 중요한 군사들은 모두 출정했지만 남은 인원들은 여전히 이곳을 관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당장 할 일이 사라진 미렌도 마찬가지였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일들에 미렌이 쥐고 있던 도끼를 놓으며 부름에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을 때였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십니까?”

제 팔을 잡아채는 손길에 그녀가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황성 특유의 금수가 놓인 제복을 입은 이올라오스가 서 있었다.

“……이올라오스 경?”

“예, 우드 님.”

“제발 처음처럼 우드 씨라고 불러 주세요. 평민인 제가 이올라오스 경에게 경칭을 듣다니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드 님을 보호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폐하의 기사인 이상, 우드 님을 편하게 부를 순 없습니다.”

보호……? 그 두 글자에 미렌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지금 당장 이올라오스가 있는 것조차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아침 일찍부터 헤겔과 라이언 모두가 출정을 했는데 정작 기사단장인 이올라오스가 남다니?

그녀는 설마 싶어 물었다.

“이올라오스 경께서 이곳에 남으신 게…… 그 명령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올라오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렌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돌려보낼 생각은 마십시오.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요! 폐하께선 그럼 이올라오스 경도 없이 홀로 가셨단 말입니까? 그건 너무 위험……!”

“그걸 어째서 우드 님이 걱정하시는 겁니까?”

이올라오스의 물음은 싸늘했다. 저도 모르게 라이언을 걱정하느라 빠르게 말을 내뱉던 그녀조차도 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타당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황후인 미렌 에드가가 아니니 모든 걱정은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속이 갑갑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미렌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눈치챈 이올라오스가 뒤늦게 그녀를 위로했다.

“폐하께선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언제나 그러셨으니까요.”

언제나 그러했다.

그녀는 그 말만큼 우스운 게 없다고 생각했다. 라이언이 죽어서 돌아온 다음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라이언이 어째서 살아야 하는지 묻던 게 어젯밤이었다. 그는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만 살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뿐이다.

그런 이를 전쟁터로 보내 놓고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가 걱정할 주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요. 부디 이올라오스 경께서 폐하를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드 님께서 그토록 걱정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설마, 폐하를 마음에 담으셨습니까?”

이번에도 이올라오스의 물음은 미렌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도 들은 것처럼 굴었다. 딱딱하게 낯빛이 굳은 이올라오스가 미렌의 양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될 분입니다.”

“제가…… 평민이니까요?”

“우드 님.”

이올라오스로부터 무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분께는 누구도 대신 못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요.”

“죽어 버린 에드가, 황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씀 조심하십시오.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미렌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죽어 버린 자신 때문이라니.

그 말이, 그리고 제 꼴이 우스웠다.

자신은 라이언, 그가 제 아버지를 죽였단 사실을 알고서도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자꾸만 그의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폐하께선 단지 우드 님을 통해 전 황후 전하를 보고 계시는 겁니다. 부디 그것에 속지 마십시오.”

“제가, 그래도 상관없다면요?”

“……우드 님.”

“그러면 감히 마음에 담아도 되는 겁니까?”

이올라오스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그는 표정을 굳힌 채 삭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뤄지지 않으리란 것,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의 비수 같은 한마디가 미렌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쯤이야 알고 있었다.

미렌 우드가 이제는 한낱 평민이라는 사실도, 자신이 라이언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도, 그가 제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도…….

그 모든 문제를 넘겨 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확신마저 사라졌다.

온전히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저는 단지……. 우드 님께서 그런 힘든 길로 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젖어 들어갔다. 미렌을 마주 보던 이올라오스의 말간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흘러내렸을 뿐이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이올라오스는 결국 손을 뻗어 그녀를 제 품에 안았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럴까요.”

“예, 우드 님. 그러니…… 포기하십시오.”

이올라오스로서는 이렇게까지 말해 버리고 마는 제 자신이 이해 가지 않았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적당히 웃으며 듣기 좋은 말이나 해 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렌 우드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입술이건만 입은 멋대로 움직여 그녀의 심장을 멋대로 상처 내고 말았다.

하지만.

제 기분이…….

“알겠습니다.”

썩 나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

“다 우셨습니까?”

이올라오스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은 미렌이 서둘러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는 구태여 잡지 않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손수건을 꺼내 든 이올라오스가 조심스레 그것을 건네었다. 미렌은 거부하지 않고 손수건을 받아 제 얼굴을 정리했다.

“폐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우드 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저는 폐하를 이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이올라오스 경께서요?”

“예. 아마도 경험의 차이일 겁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이올라오스를 바라봤다. 어느새 제 페이스를 되찾은 이올라오스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억도 나지 않으실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검을 드셨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위험하실 리가요.”

“살아남기 위해서…… 라고요.”

“어렸을 때는 암살의 위험 탓에, 조금 크고 나선 어머니셨던 선 황후 전하를 위해, 그 이후엔 아내인 전 황후 전하를 위해 검을 드셨습니다.”

또다시 제 이름이 나오자 미렌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초조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한번 다독인 미렌이 조심스레 물었다.

“조금만 더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폐하께선 지금은 죽어 버린 에드가 공작으로부터 숱한 암살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장성하실수록 암살은 힘들어졌고, 그는 곧 선 황후 전하를 노렸습니다. 이게 아마 우드 님도 아시는 ‘황위 찬탈 전쟁’의 시작점일 겁니다.”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배어났다. 미렌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손을 꾹 쥘 수밖에 없었다.

“선 황후 전하께서는……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폐하의 어머니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 에드가 공작은 곧바로 황제 폐하의 목을 조여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죽은 폐하의 수발들만 해도 서른이 넘어갔으니까요.”

“폐하께선, 그 모습을 모두 보셨던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때 폐하의 연치가 고작 열둘이셨습니다.”

열두 살의 꼬마 아이는 그때부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은 에드가 공작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라이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하나씩 죽어 갔다. 그는 두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봐야 했다.

또한 죽어 가는 모든 이들의 비명을, 그리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원망을…… 들어야만 했다.

그게 모두가 지고하다 외치는 ‘황제의 자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불현듯 황후 전하와의 결혼을 수락하셨죠. 우드 님, 그 일이 불러온 파장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

“모두가 떠나갔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분과 결혼하신 뒤부터 8년간 폐하께선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셔야 했습니다.”

그게 폐하의 사랑이었습니다.

지독히도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그제야 어째서 이올라오스가 그토록 황후인 미렌 에드가를 싫어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라이언이 어째서 자신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던 건지도 알고 말았다.

이 이야길 미렌 에드가가 알게 된 순간, 마음껏 그를 사랑할 수 없었을 테니까.

젖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아,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그림자밖에 될 수 없었구나.

한동안 미렌과 이올라오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오갔다. 이올라오스는 오로지 그녀를 기다려 주기 위해서였고, 미렌은 복잡한 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침묵은 깨졌다. 그들 뒤로 있는 초소 쪽에서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적,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으아악!”

미렌과 이올라오스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 그 순간 미렌이 말을 잃었다.

말에 탄 기사들은 물론 수백이 넘어 보이는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사내는…….

“베르디움 공작……?”

무감각한 얼굴의 베르디움 공작이 말에 탄 채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오로지 이올라오스와 미렌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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