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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12)화 (112/133)

참전

막사 안쪽 침실에 들어온 미렌은 홀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라이언은 잘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터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전에 왔을 때는 분명 한기가 느껴지는 데다 침대 위로도 무언가 있는 것 같았건만, 이제는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침대 옆에 놓인 촛불들이 바람결에 작게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라이언이 돌아왔다.

어색하게 앉아 있는 미렌을 바라보던 라이언이 툭 말했다.

“내 아내의 시체는, 황성으로 돌려보냈다.”

“황성으로요?”

“내 무덤이 될 곳에 함께 묻어 주었어.”

그는 아내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덤덤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아내의 죽음을 잊지 못해 오열하던 사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라이언을 멀거니 바라보던 미렌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직도…… 죽고 싶으십니까?”

“무척 건방진 질문이로군.”

“대답해 주세요, 폐하. 하지 않아도 될 전쟁에도 직접 참전하셨지 않습니까.”

“글쎄…….”

대답을 미룬 라이언은 털썩 미렌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느라 너른 침대가 가볍게 울렁였다.

미렌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그쯤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침대에 누워 버렸다.

훅.

라이언의 손짓 한번에 침대 옆에 켜 두었던 촛불이 꺼졌다. 그 순간 막사에 어둠이 들이닥쳤다.

어둠 사이로 라이언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잘 건가?”

눈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던 미렌은 결국 낮게 한숨 쉬며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어색하게 라이언의 옆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미렌이 슬쩍 옆을 눈짓했지만 라이언은 이미 눈을 감은 듯 고요했다.

그녀가 이대로 잠이 들 수 있을까, 싶어 고민하던 때였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따라가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무슨…….”

“아내의 시체를 보았을 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치될 거라고 하던 이였으니까.”

어둠 속에서 라이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알고는 있었다. 그녀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그리고 다시는, 그 웃는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

눈을 감은 라이언은 오래도록 미렌을 떠올렸다.

침대에 기댄 채 새하얀 얼굴로 창문만 바라보던 미렌은 라이언이 침실에 들를 때면 그토록 아름답게 웃어 주었다. 그 웃음이 처연해서 몇 번이고 라이언의 가슴이 할퀴어졌지만 그쯤이야 얼마든지 좋았다.

그 미소만 더 볼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라이언은 몇 번이고 미렌이 건강해지고 나면, 이라며 그 모든 것들을 미뤄야만 했다.

자신이 그러하니 평생을 아파했던 그녀는 어땠을까. 라이언은 미렌을 떠올릴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제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그의 자조적인 한마디에 미렌은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다 못해 절망스러웠다.

“아니, 그럴 수 있을 리가.”

“……폐하.”

“아마 나는 이렇게 되리란 걸 알았어도 그 사람을 좋아하고 말았을 테지.”

멍하니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바라보던 미렌은 생각했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을 진두지휘하셨지 않습니까. 이올라오스 경께 맡겨도 충분했을 일을요.”

“답지 않게 무리했다는 건 인정하지. 단지 나는 죽어도 상관없을 뿐이었어.”

라이언의 덤덤한 한마디에 어둠 속에 가려진 미렌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이곳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고작 자신이 뭐라고.

그렇다고 죽으려 해…….

“미렌.”

문득 미렌 우드를 향한 라이언의 나직한 부름이 이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이쪽으로 몸을 돌려 왔다.

어둠 속이라 정확히 눈이 마주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라이언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다가왔다.

“내가 어째서 살아야 하지?”

“……폐하께선, 황제시고…….”

“내가 황제가 된 것은 오로지 미렌 에드가를 위해서였다.”

“모두가 폐하만을 믿고 있습니다. 백성들도, 귀족들도…….”

“그럼, 나는?”

나는 누굴 믿어야 해?

어쩌면 간절한 물음이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선, 미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오늘 밤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녀가 미렌 에드가가 아닌, 그저 조금 닮았을 뿐인 미렌 우드기에 그랬을지도 몰랐다.

“미렌은 내 연인이자 가족이었고, 또한 신앙이었어.”

“대체 왜…… 그토록 사랑하신 겁니까?”

“내가 모든 걸 잃어버렸을 때……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니까.”

픽. 라이언이 허탈하게 웃었다. 씁쓸한 미소였다.

“밤이 깊었다. 이만 자도록 해.”

“주무실 수 있으십니까?”

“왜, 네가 내 아내를 대신해 날 안아 주기라도 할 건가?”

그녀가 황후였을 때, 라이언은 종종 미렌의 품에 안겨 잠이 들곤 했었다.

그의 향기, 체온, 고조 없는 숨소리까지…….

너무나도 그리웠던 모든 게 이곳에 있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폐하께서 잠들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녀는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아니, 그건 사실 같잖은 속임수일 뿐이었다.

라이언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도와줄 뿐이라고. 그가…… 괜찮아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미렌은 그렇게 자신을 속였다.

“그래.”

그 순간 라이언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끌어당겨 제 품 안으로 넣어 버리자, 그녀는 순식간에 시야가 답답할 정도로 좁아졌다.

그러나 라이언은 팔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꽉 껴안으며 속삭였다.

“나는 이미 미쳐 버린 황제니까.”

“…….”

“그러니 조금만 더 널 이용하마.”

아주 조금만 더…….

그렇게 중얼거린 라이언은 미렌의 머리칼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제 아내와는 전혀 닮지 않은 질 낮은 향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이미 지쳐 버린 육신을 조금이나마 쉴 수 있다면.

그날 밤.

라이언은 미렌 에드가가 죽은 뒤 처음으로 깊은 잠이 들었다. 이날 그의 꿈속에선, 웃는 얼굴로 라이언을 맞이하는 제 아내가 나왔다…….

***

다음 날 새벽, 미렌은 라이언의 품속을 겨우 빠져나왔다. 깊은 잠이 든 그는 그녀가 살금살금 막사를 빠져나갈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막사를 나가기 전 잠든 라이언의 얼굴을 바라보던 미렌은 무거운 죄책감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껴야만 했다.

오늘도 그를 속이고 말았다는 후회. 또한, 점점 나아지고 있는 라이언을 발견하며…… 일말의 기쁨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 대한 원망.

그를 보고 있자면 복잡한 마음이 한데 얽혀 진흙 속을 나뒹구는 것만 같았다.

미렌이 무거운 낯빛으로 새벽이슬도 미처 떨어지지 않은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왜 이제 와?”

“헤겔 씨? 여긴 어떻게, 근신 중이었잖아요.”

“오늘부터 참전해야 하니까. 뭐, 나가도 상관없겠지.”

참전이라는 말에 미렌은 뒤늦게 헤겔의 복장을 발견했다. 차분하지만 고급스러운 로브를 걸친 그는 누가 보아도 고귀한 마법사 중 한 명으로 보였다.

그제야 참전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그 또한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조심히 다녀와요.”

“설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려고? 내가? 이 헤겔 카르너에게?”

“알겠어요, 그만해요. 자신감이 너무 넘치면 독이 되는 건 아시죠?”

그는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렌을 걱정시키기 싫은 건지, 헤겔은 평소보다도 더 과한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의 가벼운 태도에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헤겔은 손을 들어 미렌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 주기 시작했다. 그가 조그맣게 ‘눈 감아도 좋아.’ 하고 속삭여 오기도 했다.

“무슨 마법이에요?”

“간단한 마법이야. 적의를 가진 누군가 네게 공격을 하면, 딱 한 번만 막을 수 있는.”

“한 번이요?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있지. 왜 없어?”

사실 걸어 준 마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렌이 위험해질 경우 마법의 시전자인 헤겔에게도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프레니티 영지에 갇혀 있을 테룬 공국 놈들이 여기까지 들어올 일은 전혀 없었다.

“다녀오면…… 그렌에게 가자.”

“그래요.”

“이번엔 그럴듯한 지팡이도 사 갈 거야. 그걸 보여 주면 녀석도 기사보단 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겠지.”

“음……. 그렌이라면 아마 마음을 바꿀 거예요. 꿈이 워낙 많잖아요.”

그렌의 이야기를 하다 눈이 마주친 미렌과 헤겔이 웃음을 터뜨렸다.

곧 전쟁을 앞둔 이들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분위기였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말들을 내뱉어 봤자 서로에게 짐만 될 테니까.

물러선 헤겔이 그럼 가 보겠다며 등을 돌렸다. 그의 어깨 너머로 출정 준비를 하고 있는 다른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녀는 한곳에 멈춰 서 오랫동안 헤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며.

피곤이 짙게 내려앉은 그의 얼굴은 미렌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날 밤 미렌이 어디에서 잠을 잤는지. 그녀에 관한 소문은 언제나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헤겔은 마지막까지 그렌의 이야기만 하다 떠났다.

“잘 다녀오세요.”

닿지 않는 속삭임이 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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