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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11)화 (111/133)

기만

“프레니티 탈환 작전이라고요?”

“네. 이제야 준비가 끝난 모양이에요.”

“하지만 폐하께서 직접 참전하신다니요?”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사실 데저트 영지에서도 참전하셨거든요.”

그쯤이야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다. 황제가 직접 전쟁에 참전해 명령을 내리는 것쯤이야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리키의 태도가 이상했다. 미렌이 설마 싶어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전쟁에서 앞장서셨던 겁니까?”

“……네, 맞아요. 이제껏 일어난 모든 전쟁에 직접 검을 들고 참전하셨어요.”

미렌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직접 검을 들고 참전해?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인 그가……?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전투에 직접 나섰다는 것은 하나밖에 뜻하지 않았다.

그는 죽고 싶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폐하께…….”

“미렌.”

“폐하께, 가 봐야겠습니다.”

“미렌.”

미렌이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헤겔이 문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멈춰 선 미렌이 고개를 돌려 헤겔을 바라보자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내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내게 와.”

“어째서요?”

“보호 마법을 걸어 줄게. ……참전하기 전까지 나는 움직일 수 없으니까.”

헤겔의 말은 사실 이상했다. 보호 마법을 걸어 주겠다니.

기사도, 병사도 아닌 미렌은 전쟁에 참전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 주겠다 말하는 것이다.

“제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헤겔 씨의 몸이나 챙겨요. 첫…… 참전이지 않습니까?”

“설마 내가 죽기라도 할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헤겔 카르너가.”

그의 자신감 가득한 말에 미렌도 안심했다. 여전히 헤겔 카르너는 헤겔 카르너였다.

“이곳도 전장에서 멀지 않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거야. 탈환 작전이 시작되고 나면 여긴…… 텅 빌 테니까.”

“알겠습니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여기로 올게요.”

괜한 걱정임을 알지만 미렌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면 보호 마법쯤이야 얼마든지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을 마친 미렌은 놓아 달라는 듯 제 손목을 눈짓했다. 뒤늦게 자신이 여태껏 잡고 있음을 알아챈 헤겔이 손목을 툭 놓았다.

“……그러니까, 꼭 와.”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툭.

손목을 놓자마자 미렌이 서둘러 달려 나갔다. 방향은 황제의 막사가 있는 곳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헤겔의 옆으로 리키가 다가섰다. 평소의 어리고 귀여운 리키답지 않게 다소 가라앉은 태도였다.

“황후 전하 아니셨어요?”

“……뭐?”

“탑주님이 마음에 담은 사람이요.”

헤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알페카에 이어 리키까지 눈치를 채다니, 자신이 그토록 티 나게 행동했나 싶었다.

“황후, 아니야. 그 사람 이미 죽었잖아.”

“슬퍼하는 기색도 없으셨잖아요. 쓰러졌다는 소식엔 그렇게 걱정하셨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리키를 힐끗 바라보던 헤겔은 결국 그의 머리를 엉망으로 망가트려 버렸다. 리키가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렌 우드야.”

“네?”

“내가 좋아하는 건 미렌 우드라고.”

그러니까…… 황후, 그 사람 아니야.

헤겔은 담담히 말했다. 그가 만났던 건 처음부터 미렌 우드였으며, 마음에 담은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렌 에드가 따위 단 한 번도 제 마음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 상관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렌 우드 정도는…… 내가 좋아해도 되는 거잖아. 차마 덧붙이지 못한 한마디가 헤겔의 마음속을 헤집었다.

***

“폐하.”

막사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미렌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라이언은 의자에 앉아 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곧 출정이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신다는 게 사실이었습니까?”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푹 꺼진 뺨과 더불어 메마른 그의 몸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근에야 미렌이 그의 식사를 챙기기 시작해 제법 나아졌지만 그것도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은 터였다.

그런 이가 전쟁에 참여하다니. 그것도 전투의 가장 선두에 서서.

“그래.”

“테룬과의 전쟁이 끝나려면 멀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나서다니요. 아직 건강도 좋지 않으신 분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을 내려 둔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미렌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내가 황후를 잊을 수 있게 도와줄 뿐, 내 아내는 아니지.”

“…….”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건가?”

차가운 물음에 미렌이 제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의 말이 옳다. 이렇게 갑작스레 막사를 찾아와 따져서는 안 되었다, 평민인 미렌 우드는.

라이언이 자신에게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마음이 해이해진 것이다. 자신은 이미 미렌 에드가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미렌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라이언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털썩 앉으며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헤겔 카르너를 찾아갔다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올라오스가 나의 기사라는 걸 잊은 건가.”

그새 이올라오스가 보고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토로했다.

“그가 마을 사람들을 데려갔습니다. 잘 보호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간…….”

“그건 이올라오스도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내가 그에게 프레니티 영지민들이 임시로 머물 거처를 구하라 명했으니.”

미렌의 변명 같은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라이언이 딱딱하게 받아쳤다.

다만 미렌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눈을 치뜬 그녀가 중얼거렸다.

“전혀…… 몰랐어요.”

“프레니티 영지민이라고 해서 내가 차별이라도 했을 줄 알았나? 제국의 영지민이라면 누구나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폐, 폐하께서는 테룬 공국에게 반감이 있으시잖습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내 국민을 죽인 이들을 용서할 수는 없어.’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다. 이 한마디에 가로막혀 그에게 자신의 삶을 토로하지 못했던 게 몇 번이던가.

그러나 그는 잠시 눈썹을 까닥이며 미렌을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테룬 공국에게 반감이 있을 뿐, 그들이 제국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들을 보호한 게 문제가 되나?”

“그렇……군요.”

“무엇보다.”

어딘지 허탈한 얼굴이 되었던 미렌이 라이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가 이쪽을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나의 아내가 생전에 프레니티 영지를 아꼈으니까.”

“황후, 전하께서요?”

“그래. ……미렌은, 언제나 내 입장만 생각하느라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머리가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미렌이란 이름이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들렸다. 라이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늘 내가 먼저 나설 수밖에 없었지. 한 번이라도, 내게 그 속마음을 털어놓았으면……. 그랬으면 무엇이든 해 주었을 터다.”

라이언이 씁쓸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나는 오로지 그러기 위해서 황제가 되었으니까.”

“…….”

“그런데 그녀는 내게 무엇도 말한 적이 없어. 아직도 모르겠더군. 미렌이 품은 고민들은 황제인 나조차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던가.”

그때 그에게 조금이라도 기대었다면, 이 상황은 달라졌을까.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라이언이 미렌 에드가와 미렌 우드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게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있었다. 자신은 지금…… 그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헤겔 카르너에겐 어째서 간 건가.”

“이올라오스 경이 관련된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동생이 걱정되어서요.”

“동생? 동생이 있었나?”

“예,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동생과 저만 남았습니다.”

“전쟁 중에?”

그녀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렌의 낯빛을 힐끗 확인한 라이언이 나직이 말했다.

“사과하지.”

“……예?”

“내가 프레니티를 어서 구하러 왔다면, 네 부모님이 전쟁에 휘말릴 일도 없었을 테니까.”

라이언은 덤덤하게 그 모든 잘못마저 제 것이라 말했다. 프레니티 영지보다 데저트 영지에 먼저 간 것은 모두 회의를 통해 결정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란 그런 자리였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마저 모두 제 것이 되고 마는.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데저트 영지에도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늦은 거니까.”

“그게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하지.”

라이언이 픽 웃었다. 그가 눈을 내려 제 검을 도로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원망할 사람이 없다면 원망해도 좋다. 허락하지.”

“아니……! 전혀요, 폐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래? 이상한 일이군.”

보통은 모두 나를 원망하던데.

그는 익숙하다는 듯 읊조렸다.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언이 정리한 검집을 도로 허리에 차며 말을 이었다.

“헤겔 카르너에겐 다시 갈 건가?”

라이언은 이상할 정도로 헤겔의 이야기에 집착했다.

그것이 의아하면서도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어서, 미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헤겔과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잠시 들르라고 했습니다. 보호, 마법을 걸어 주겠다고…….”

“아아.”

라이언이 비스듬히 웃었다. 선명한 비소를 매단 그는 미렌에게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낯빛을 가다듬었다.

“나도 부탁할 게 있다.”

“무엇입니까?”

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하물며 당장 해가 뜨면 참전해야 할 그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한 지가 벌써 석 달이 넘었더군.”

“……석 달이요?”

“악몽을 꿔. 꿈에선 미렌이 나와 자길 살려 달라고 울지.”

다가온 라이언이 자연스럽게 미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황후를 잊게 해 준다고 했었나. 그럼 도와주어.”

“…….”

“오늘 밤, 내가 잠들 수 있도록.”

품 안에 갇힌 미렌은 라이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이 저지른 이 행동이 라이언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앎에도 그러했다.

비겁한 것은 헤겔 카르너가 아니라 미렌 우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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