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10)화 (110/133)

공정하게

“아이 참, 그렇다니까.”

“그럴 리가 있나! 폐하께서 얼마나 애처가였…….”

수군수군.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시종들이 문득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종들의 앞으로 미렌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눈치챈 미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정부니, 뭐니 하는 소문이 나도는 것이다.

결국 배식을 마친 미렌은 식판을 들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도저히 사람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밥 먹을 자신이 없었다.

나무 밑동에 앉은 그녀가 겨우 무릎 위에 식판을 올렸을 때였다.

“혼자 드십니까?”

식판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미렌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이올라오스가 서 있었다.

“왜 식당에서 드시지 않고요.”

“아……. 사람이 많다 보니 영 불편해서요. 하하…….”

“폐하와 관련된 소문이 돌아서가 아니라요?”

뜨끔한 미렌이 스푼을 꾹 눌러 쥐었다. 이올라오스는 정곡을 찔러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옆에 있는 넓적한 돌 위에 털썩 앉았다.

“……들으셨습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미렌 우드 님께서 폐하의 정부라는 소문.”

“터무니없는 소문입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미렌은 단지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한 라이언이 자꾸만 걸려 그의 고통을 함께했을 뿐이었다. 정부라는, 성애의 의미가 담긴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토록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한편으로는 미렌 에드가였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아직도 제 아내를 사랑했다. 온 마음을 담아서.

“물론 그럴 겁니다.”

“예? 이올라오스 경, 지금 뭐라고…….”

“폐하께선 우드 님에게 아무 마음도 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기대는 마십시오.”

딱딱하게 굳은 낯빛의 이올라오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미렌이 잠시 멈칫했다.

물론 폐하와 평민이라니, 이올라오스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관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 차가운 태도는…….

꼭 에드가 황후를 대할 때 같지 않나.

“이올라오스 경께선 폐하께서 혼자이길 바라십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예전 황후 전하의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제게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올라오스가 먼저 ‘친구’ 같은 귀여운 단어를 꺼내기에 황후일 때보다는 가깝구나 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왜인지 서운해진 미렌이 툭, 제 마음을 털어놨다.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서운합니다.”

“친구…….”

“예, 친구요.”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올라오스의 표정이 뒤바뀌더니 그가 허둥지둥하며 사과를 해 왔다. 그러며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놀랍게도 복숭아였다.

“이걸로 용서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복숭아요? 지금은 복숭아 시기도 아닌데 어떻게 구했어요?”

“카르너 경과 함께 거처를 구하러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보관 마법을 걸어 둔 모양이더군요.”

식판을 내려 둔 미렌이 두 손으로 복숭아를 받아 들었다. 탐스러운 분홍색의 과일은 미렌이 이제껏 보았던 어떤 복숭아보다도 상등급 같았다.

“먹어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아, 칼이 없으니 제가…….”

뚜둑.

미렌은 가볍게 그것을 반으로 쪼개었다.

그녀가 약하지 않단 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렌을 볼 때마다 가녀리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올라오스는, 민망해진 손을 거둬야만 했다.

반으로 쪼개진 복숭아 중 한쪽이 이올라오스에게 내밀어졌다. 그가 고마운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저는 폐하께서 혼자이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외로우신 분이니 그분께도 함께할 배우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다만 그 자리가 우드 님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제가 평민이라서요?”

“아니요! 아닙니다. 단지……. 우드 님은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길 바랐을 뿐입니다.”

가볍게 말하던 이올라오스도 제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미렌이 픽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올라오스 경께선 지금 폐하를 위해 말하는 겁니까, 절 위해 말하는 겁니까?”

“그건…….”

이올라오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미렌을 바라봤다. 어려운 선택이었다.

평생을 바쳐 모셔 온 황제 폐하와 처음으로 사귀어 본 친구인 미렌 중 하나를 선택하라니.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물음에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이올라오스 경. 전 단지 경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셨으면 해서 말한 겁니다.”

“……멀리하다니요?”

“폐하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친구지 않습니까?”

말을 마친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빈 식판이 덜렁 쥐어진 채였다.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복숭아를 반대편 손에 든 그녀가 가볍게 그것을 흔들었다.

“잘 먹을게요. 전 헤겔 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결국 미렌은 가벼운 걸음으로 떠났다. 이올라오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답지 않게 눈을 찌푸렸다.

사실 저 복숭아는 이올라오스가 준비한 게 아닌 헤겔 카르너가 가져다주라 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사과할 일이 생겨 저도 모르게 헤겔 카르너의 이야기는 없이 줘 버렸지만…….

생각을 하던 이올라오스가 눈을 크게 치떴다. 그쯤 되자 그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올라오스가 조금 전 그토록 싸늘하게 말했던 건 폐하를 위해서도, 미렌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

막사 앞에 선 미렌이 망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앞을 오갔다. 손에는 새 식판을 쥔 채였다.

그녀는 이미 이올라오스와 함께 식사를 했으니 본인의 것은 아니었다. 식판을 가져온 이유는 그 막사의 주인이 식사를 거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하던 미렌이 목을 가다듬고 이름을 불렀다.

“……저, 헤겔 씨. 안에 계십니까?”

“…….”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막사 안을 바라보던 미렌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안에 없어요……?”

“…….”

없을 리가 없는데.

근신을 명받은 헤겔이 밖으로 나갔다면 그건 정말 엄중히 다스려야할 터였다. 미렌은 결국 헤겔의 허락 없이 막사의 문을 열었다.

아니, 문을 열려 했다.

“야.”

“으악!”

“왜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와?”

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미렌이 비명까지 질러 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 식판은 균형을 꼭 잡아 쏟아지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헤겔이 옆에서 미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랐던 심장이 겨우 가라앉자 미렌이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왜 사람을 놀라게 해요!”

“네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싶어서.”

“하, 식사 챙겨 준다고 온 내가 바보지. 이거 다시 가져갑니다.”

“어어, 나 밥 안 먹었어. 줘.”

자연스럽게 미렌을 일으킨 헤겔이 슬쩍 그녀의 손에서 식판을 빼 갔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막사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먼저 안으로 들어갔던 헤겔은 미렌에게 안 들어오냐는 듯 턱짓했다. 그 자연스러운 재촉에 미렌도 헤겔의 막사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언제 오나 했어.”

“언제 오긴요. 헤겔 씨가 마을 사람들 인계해서 데려갔는데 잘 모셔 놨는지 확인해야죠.”

“그게 아니라, 언제 돌아오나 했다고.”

오늘 점심은 간단한 수프와 함께 부드러운 빵 한 개였다. 헤겔이 고상한 태도로 그 빵을 집어 수프에 콕 찍었다.

헤겔이 빵을 우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정리는 다 했어?”

“무슨 정리요?”

“황제와의 관계 정리.”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어요. 헤겔 씨, 대체 왜 날 속인 겁니까?”

“속이다니?”

헤겔은 분명 황제가 황후를 잊고 잘 지낸다고 했었다. 그의 말만 믿었던 미렌은 다시 만난 라이언의 모습에 마음이 찢어져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럼 내가 솔직하게 말했어야 해?”

“그야 당연한…….”

“그랬으면, 네가 미렌 에드가였다고 말할 수 있었겠어?”

“…….”

그렇지 않다. 아마도 미렌은 여전히 라이언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테룬 공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기에 지나간 사실로 라이언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말하기엔 너무도 늦어 버려서……. 뒤엉킨 것을 풀기엔 이미 미렌과 라이언 모두 너무 많은 길을 건너와 버렸다.

헤겔은 덤덤하게 현실을 말하며 빵을 입 속에 넣었다.

“그게 현명한 선택이었어. 너를 위해서도, 황제를 위해서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하게 했어야죠. 헤겔 씨가 선택할 일은 아니었단 말입니다.”

“왜?”

우뚝.

식사를 하던 헤겔의 손이 멈췄다. 그는 제 앞에 있던 식판을 옆으로 치워 버리며 다시금 물었다.

“나는 널 좋아하고 있어. 그런데 내가 라이언과 네 관계가 호전되길 도와줬어야 했나?”

“…….”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 미렌.”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웃기라도 했다면 미렌도 그를 미워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토록 처연한 미소를 짓는 헤겔은 어쩐지…….

후회하고 있는 것 같잖은가.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야.”

“……이제 와서요?”

“그러니 앞으로는 내 도움 받을 생각 마.”

조건 없는 호의는 없다. 이제껏 헤겔은 미렌을 속여 그녀를 도와주고 원하는 것을 받아 갔으나,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비겁하고 싶지 않았다. 헤겔이 의자에 툭 기대며 미렌을 바라봤다.

“네가 내 도움을 바랄 때마다…… 나도 네게서 무언가를 받아 갈 거야.”

“무엇을요?”

“무엇이든.”

그게 마음이든, 뭐든 간에.

미렌과 헤겔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녀는 이제야 그가 자신을 좋아한단 현실을 자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었나.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헤겔이 피식 웃었다. 분명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말했던 것 같은데, 미렌의 안중에는 조금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비겁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곧 리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주님! 탑주님!”

“무슨 일이야? 들어와서 말해.”

막사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리키가 뛰어 들어왔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프레니티 탈환 작전이 내일부터 시작될 예정이래요!”

미렌과 헤겔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거대한 소식을 물고 온 리키는 한 번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폐하께서 탑주님의 참전도 명하셨어요. 그리고…… 폐하께서도 직접 참전하신대요.”

프레니티는 애초에 주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었다. 때문에 라이언이 참전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결정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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