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09)화 (109/133)

깊은 새벽을 지나서

“아내가…… 깊은 잠을 자고 있어.”

오랜 침묵을 뚫고 라이언이 말했다. 그 한마디가 미렌의 마음 어딘가를 툭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읊조렸다.

“폐하의 아내는 죽었지 않습니까.”

“……그저 깊은 잠에 들었을 뿐이다. 황후를 두고 죽음을 논하는 건가?”

“미렌 에드가 황후는!”

질끈, 눈을 감은 그녀가 토해 내듯 말했다.

“이미 죽었단 말입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던 라이언은 아직도 저 시한부 황후 하나를 잊지 못해 미쳐 가고 있었다.

그가 망가져 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어딘가 무너지는 것 같았던 속내는 끝내 시체를 발견하자 모두 내려앉았다.

심장이,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미렌 에드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오로지 라이언 혼자밖에 없었다.

“죽고 싶나?”

스르릉.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발도된 검이 미렌의 목을 겨누었다. 훈련된 검사답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목전까지 다가온 검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베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렌은 제 목을 겨눈 검 위로 비쳐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엉망이었다.

라이언도, 자신도. 그리고 라이언과 자신의 관계조차…… 모든 게 엉망이었다.

“차라리 죽이세요.”

“…….”

“목이 떨어져야만 죽음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아니면 땅에 묻히고 나서야 죽었음을 아실 겁니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노성을 내질렀던 미렌은 막상 라이언과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꼭 무언가라도 참는 양.

미렌의 목전에 다가온 검 또한 가늘게 떨리었다. 검을 쥔 검사의 손이 떨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밖에 나가 누구든 잡고 물어보세요. 모두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아내는 죽었어요.”

“…….”

“오직 폐하만이 받아들이지 못하신 겁니다…….”

아니, 사실은 아니다.

미렌 그녀 또한 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직도 그녀는 잠이 들 때면 이따금씩 끔찍한 악몽을 헤매다 깨고 만다.

꿈이라는 게 그토록 무서운 것인 줄……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그러나 제 죽음에 고통스러워하는 건 미렌 본인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랑스러운 자신의 남편은, 빛나는 성군이었던 황제는…….

잊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스운 소리.”

“……예?”

“모두가 날 속이고 있어. 내 아내가 죽었다고. 내가 그 속임수에 넘어갔다간…… 내가 보지 않는 새에 내 아내를 빼돌릴 생각인 거지.”

미렌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라이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빼앗길 줄 아나? 아니, 전혀. 내가 지켜 온 이다. 곧 있으면 눈을 뜰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미렌이 날…….”

그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듣고 있던 미렌이 제 목전에 다가온 검을 밀어내고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을 밀어내느라 그녀의 손바닥에서 얇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도저히 그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이 위태롭고 애처로운 사내를……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

미렌의 가슴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쳐 댔다. 이대로 들켜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신보다 한 뼘이 넘게 큰 사내의 목을 끌어다 제 품으로 넣은 탓에 라이언의 허리가 애매하게 굽어졌다. 그의 이마가 미렌의 목덜미에 닿았다.

“잊으세요.”

“……어떻게…….”

어떻게 잊어.

어쩌면 간절한 바람과도 같았다. 그는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제 아내를 잊어버리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었다.

미렌 에드가가 죽은 뒤, 처음으로 자신을 구해 주러 온 목소리에 라이언은 꼭 여덟 살 아이처럼 굴었다.

“폐하께서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나는 못 해. 그런 거……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라이언의 거대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려움 탓이었다.

그녀는 그런 사내의 몸을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했다. 그의 등에 둘러진 미렌의 팔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닥, 토닥. 등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제가 잊게 해 드리겠습니다.”

“……네가?”

“미렌 에드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폐하께 달려오겠습니다. 약속할게요. 당신이 잊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라이언의 충혈된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그는 나직한 한마디에 꼭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따스해지는 제 자신이 우스웠다.

고작, 이름이 같을 뿐인데.

행동거지도, 말하는 태도도, 분위기도…… 아주 조금 비슷할 뿐인데.

그런 여자의 품에서 자신은 또다시 미렌을 찾아내었다고 즐거워했다. 라이언은 나약한 제 자신을 들킬까 봐 그녀의 목덜미에 조금 더 머리를 묻었다.

알고 있다.

자신을 껴안아 준 이 팔이, 향기가, 좁은 품이…… 제 아내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데 자꾸만 아득해진 이성이 그녀를 미렌 에드가라 생각하려 들었다. 라이언은 결국 그것을 이겨 내지 못했다.

채앵……!

라이언은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검을 놓았다. 검사가 검을 놓는다는 것을 항복을 의미했다.

그는 그대로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미렌의 허리를 껴안았다. 놓아 버렸다간 물에 빠져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절한 얽매임이었다.

“너도…… 너도 날 버렸다간 죽여 버릴 테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내가 죽은 나의 아내를 잊을 때까지,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한다. 알겠나?”

그 고집스러운 물음에 미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대답을 들은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라이언은 오래도록 울었다. 때때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도 했으며, 떠나 버린 상대에 대한 화를 담아 오열하기도 했다.

그날 밤, 미렌은 그가 모든 눈물을 쏟아 낼 때까지 안아 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울지도 못했을 제 남편을 위하여.

***

어스름한 새벽녘.

닭이 우는 소리가 겨우 들려오는 아침이었다. 프레니티에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배어 있던 미렌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 라이언의 눈물을 받아 주느라 그녀는 늦은 새벽에야 돌아왔다.

그런데 이 시골 촌부인 미렌 우드의 몸은 닭이 우는 소리에 습관처럼 일어났다. 찌뿌둥한 몸이 아직 풀리지 않은 피곤을 알리듯 저려 왔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어제 제게 수프를 챙겨 준 취사병 아저씨를 도와주려면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터였다.

“으아…… 어?”

하늘 위로 팔을 쫙 뻗은 그녀가 기지개를 켜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막사의 입구에 놓인 천 너머로 누군가의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 새벽에?

물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야 이미 일어나고도 남았겠지만, 그래도 이른 시간이었다.

이불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차악. 문 역할을 대신하는 천을 걷어 내자 앞에 선 이가 보였다.

“폐하?”

앞에 선 이는 라이언이었다. 그는 무언가 초조하기라도 한 듯 가만있지 못하고 미렌의 천막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 라이언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린 그가 평소와 같은 무감각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렌 에드가가, 죽었어?”

“……예.”

“내 아내는 죽은 건가?”

“예, 폐하.”

미렌의 이름이나 불러 대던 라이언의 입은 오늘부터 다른 질문을 해 대었다.

라이언은 자신의 아내를 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미렌은 조금 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라이언이 불현듯 미렌의 얼굴을 바라봤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아하니 잠이라곤 조금도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안아 줘라.”

“예?”

“내 손이, 떨리고 있으니…… 어서 날 안으란 말이다.”

그는 무언가 고통스러운 듯 한쪽 눈을 찌푸린 채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이 서둘러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라이언이 그녀의 목덜미 부근에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안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되…… 되셨습니까?”

“그래. ……아니, 아직. 조금만 더.”

어설픈 그의 거짓말이 미렌을 가만히 있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거짓말이라고도 볼 수 없는 게, 그녀가 안아 줄수록 점차 라이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다만 그들이 서 있는 위치는 시종들이 자주 오가는 미렌의 천막 앞이었다.

미렌은 그의 어깨 너머로 바쁘게 오가며 이쪽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시종들의 모습을 마주해야만 했다.

황후였을 때에도 라이언과 이토록 대놓고 안아 본 적이 없었는데.

미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그때처럼 성애의 의미는 아니었으나,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쯤이야 충분히 예상이 갔다.

이제 되었다 싶어 그녀가 떨어지려 했을 때였다.

“폐하, 이제 떨림이 잦아든 것 같으니 이만 놓겠…….”

“아니. 안 돼.”

“예?”

“그럴 수 없다.”

황후였을 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이것이었다. 그는 그때와 달리 조금 더 제멋대로 굴었다.

꼭 초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직 내가 괜찮지 않아.”

“그렇……습니까?”

아닌 것 같은데…….

그녀가 혼자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미렌의 허리를 껴안은 라이언의 팔 힘이 더 강해졌다. 놓아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결국 미렌은 아침부터 한 시간이 넘게 그의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지나가는 모든 시종과 기사들이 그들을 바라봤다.

라이언, 황제 폐하가 아침마다 평민인 미렌 우드의 천막 앞으로 오기 시작한 것은 이날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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