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08)화 (108/133)

아내

“일어나라.”

라이언의 나직한 한마디에 이올라오스와 헤겔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미렌과 헤겔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처음부터 오로지 미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언은 안중에도 없던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은 미렌뿐만 아니라 이올라오스와 라이언 또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라이언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헤겔을 바라봤다.

“헤겔 카르너.”

“부르셨습니까, 폐하.”

“황성 침입죄는 반역에 준하는 엄중한 범죄지.”

“……예. 압니다.”

“알면서도, 숨어 지냈다는 거로군.”

곁에 있던 이올라오스가 조심스레 보고했다.

“헤겔 경께서는 이제껏 프레니티 영지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숨어 지내셨습니다. ……늦은 이유도, 탈출시킨 영지민들이 머물 거처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올라오스는 딱히 헤겔의 편을 들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 모든 사실에 대해 라이언이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묵묵히 보고를 듣던 라이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미렌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미렌 우드.”

“예, 폐하.”

“네 고향 또한 프레니티라고 했었나.”

“……예. 헤겔 경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라이언이 제 고향을 기억하고 있자 미렌은 내심 놀랐다. 지나가듯 언급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대답을 들은 라이언은 다시금 헤겔을 바라봤다.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헤겔의 귓가에, 그의 웃음소리가 선연히 들려왔다.

픽.

“미렌 우드와…… 함께 있었다는 거로군.”

“…….”

“그렇지 않나, 헤겔 카르너.”

싸늘한 침묵이었다.

라이언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헤겔을 내려다봤으며, 헤겔은 조금도 떨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섣불리 초조함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헤겔은 제 얼굴에서 표정을 죽였다.

초조하단 것을 들키기라도 했다간…… 이미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연히 돕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한가.”

“…….”

헤겔이 말을 줄이자 라이언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들어 모두에게 알렸다.

“비록 황성을 무단 침입 하였으나, 이제껏 쌓아 온 귀 경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

“…….”

“명령이 있기 전까지 근신을 명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이올라오스의 고개가 휙 올라갔다. 헤겔이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도 가벼운 형이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직접 판결한 일이었다.

이올라오스는 자신이 헤겔을 데리러 떠나기 전까지 라이언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척에서 모셨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터로 온 뒤에도 직접 전쟁에 나설 때가 아니면 늘 침실 안의 죽은 황후의 곁에 머물렀다.

누군가 실수로 침소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극도로 예민해진 황제가 검을 빼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살육이 일어나는 전쟁터로 나오는 날에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배려?”

“……예, 반역에 준하는 죄에 비해 가벼운 형이지 않습니까?”

헤겔이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려 왔다. 라이언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비스듬한 미소. 그는 헤겔을 비웃고 있었다.

라이언이 헤겔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이올라오스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헤겔에게 밀착해 귓가에 속삭였다.

“배려로 보이나?”

그 순간 라이언이 다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미렌이 서 있었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헤겔은 깨달았다. 아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 교활한 황제가 알아차린 것이다.

현재 그의 마음에 담긴 이가 누구인지.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헤겔의 팔에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

이올라오스는 헤겔의 근신을 위해 그를 데리고 떠났다. 어차피 전쟁 중인지라 헤겔은 개인 막사에서 근신을 해야 할 터였다.

모든 일이 일단락되었을 때는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라이언과 짐을 옮기는 동안 벌써 시간이 꽤 흐른 것이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라이언은 미렌에게 손짓해 제 막사로 불러들였다.

막사 안에는 이미 황제를 위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라이언이 앉으라는 듯 제 건너편을 턱짓했다.

“앉지.”

“저…… 폐하, 저녁 식사는 따로 하는 게…….”

“약속이 있나?”

“예?”

“헤겔 카르너인가?”

의외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뜬 미렌이 손까지 내저어 가며 아니라고 말했다.

헤겔과는 그렇게 갈라진 후 오늘 처음 본 것이었다.

물론 이후 헤겔과 대화를 나누기는 해야 했다. 그가 그렌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전쟁과는 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러 갔었으니까.

다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미렌이 제 말을 증명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먹어.”

“……아, 네.”

눈치를 보던 미렌은 결국 포크를 들었다. 라이언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미렌만 바라보고 있던 탓이다.

눈빛이 너무 싸늘해서 거부했다간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미렌은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포크를 재게 놀렸다.

“고기는 맛이 없나.”

“아, 아니요. 설마요.”

라이언의 물음에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는 고기를 제 접시로 옮겨 왔다.

아무리 전시라도 황제의 식사니만큼 실력 있는 주방장이 요리했을 것이다. 그러니 제 앞에 있는 이 고기는 무척이나 비싼 음식일 터였다.

그런데도 손이 가지 않았다. 사실, 미렌은 고기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렌 우드는 평생을 가난한 농부의 딸로 살았고, 미렌 에드가는 몸이 좋지 못해 오래 씹어야 하는 음식은 모두 지양했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고기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은근히 깨작거리자 라이언이 미렌의 앞 접시를 통째로 제 앞에 가져갔다.

“폐하!”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미렌이 먹다 남긴 고기를 먹었다.

심지어 깨작거리느라 포크로 엉망이 되어 있는 고기였는데.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군.”

미렌이 남긴 고기는 순식간에 라이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커다란 입은 고기를 꼭 빵이라도 먹는 것처럼 해치웠다.

“아, 예……. 워낙 저렴한 음식만 먹어 왔더니 비싼 음식은 영 맞지 않네요.”

“그렇다기엔 다른 건 모두 잘 먹던데.”

사실 그렇다.

미렌은 고기만 좀 가렸을 뿐 나머지 고급스러운 음식들은 모두 잘 먹었다. 라이언이 그 점을 짚은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에 어깨를 움찔 떤 미렌이 뒤늦게 대답했다.

“하하, 채소는 아무리 비싸도 맛이 비슷하네요…….”

“아아, 그래서.”

쿡.

웃음소리에 미렌이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라이언은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싸늘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불편한 식사 자리였지만 그 이후로 미렌은 무난히 식사를 마쳤다. 잘못 들은 것 같았던 웃음소리가 분위기를 풀어 준 걸지도 몰랐다.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식사는 마치셨습니까?”

“그래.”

바깥에서 들려온 시종장의 물음에 라이언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 와 미렌과 라이언이 사용한 식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엉덩이를 떼었다 붙였다 하기 바빴다.

일단 자신도 시종이긴 한데, 도와주려니 라이언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다 시종들은 미렌에게 접시 하나조차 주지 않으려 안달이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미렌을 일하지 못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결국 미렌은 접시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채로 정리가 끝났다. 들어왔던 시종들이 다시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폐하.”

“왜?”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차라리 라이언이 명령이라도 내려 줬으면 좋겠건만 그는 그럴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미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비웃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이 하고 싶나?”

“예, 시켜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불편해서요.”

“태생적으로 평민이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네?”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라이언을 바라봤다. 미렌은 빠르게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저는 태생적으로 평민이었습니다, 폐하.”

“아아.”

그가 되었다는 듯 눈을 내렸다. 라이언의 긴 속눈썹이 그의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 이가 나이프와 포크를 바깥에서부터 사용하나.”

“…….”

“식사를 하기 전과 마친 후, 포크와 나이프의 방향마저 틀리지 않았지.”

그녀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떨어졌다. 미렌이 조그맣게 변명했다.

“시…… 식사 예절에 대해 간단하게 배운 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디저트로 준비된 과일인 ‘태양의 알’은 평민들이 맛볼 수도 없다. 그런데 너는 그게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잘 먹더군.”

“차,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물어봤다가 저도 아는 것일까 봐…….”

“먹어 봤던 게 아니라?”

철렁.

단정적인 그의 물음에 미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간 라이언의 간악한 혀 놀림에 모든 걸 말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제가, 침……실을 정리해 두겠습니다. 곧 시종들이 들어와 침실을 정리할 시간이죠?”

허둥지둥하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침실을 정리하는 것쯤이야 배우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거니 싶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천 하나로 가려진 안쪽 침실에 들어서려 했을 때였다.

라이언이 그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커다란 몸이 미렌의 바로 앞을 막았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침실이었다.

“침실 정리는 필요 없다.”

“예? 어째서요? 매일 밤마다 정리를……!”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얼굴로 그가 내뱉었다. 미렌이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문득 제 뺨 위로 기묘한 한기가 닿는 것을 느꼈다. 미렌의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라이언의 어깨 너머, 침실 안쪽을 향했다.

두 개로 나누어진 천 사이로 어두운 그곳에선 분명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공적인 감각이었다.

꼭, 무언가 냉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폐하, 안쪽에…… 무엇이 있습니까?”

“…….”

“무엇을…… 숨기셨습니까?”

그의 음울한 눈동자가 제 앞에 선 미렌을 내려다봤다. 지독히도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라이언의 뒤로 펼쳐진 어둠은 사람 하나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적막했다. 그는 그것을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막아섰다.

미렌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아내.”

감당하지 못할 진실이 어둠을 뚫고 터져 나왔다. 그녀의 뺨을 훑어 내린 한기는 어느새 온몸을 감싼 지 오래였다.

그는 미친 것이다.

정말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