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다음 날 점심시간, 미렌은 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침 일찍부터 가볍게 산책을 다녀온 데다 여러 잡일을 도와 배가 고팠다.
이곳에서 미렌은 매일같이 사람들을 돕느라 바빴다. 대개가 수고스럽고 귀찮은 일들이었지만, 그녀의 심성상 가만히 있는 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프 좀 많이 줄까?”
“네, 감사합니다. 저 많이 먹어요!”
요즘 들어 미렌이 친해진 이는 취사병이었다. 그것도 마흔이 넘은 중년의 취사병.
제 아버지와 비슷한 체구의 그는 미렌이 딸 같다며 유달리 챙겨 주셨다. 그러면 미렌도 넙죽 음식을 받아 가곤 했다.
“아이구, 한창때인데 많이 먹어야지.”
“네? 한창때라뇨, 전 이미 다 컸어요.”
“그게?”
미렌이 농담하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고 걸음을 옮겼다. 식판 위에 담긴 수프가 남들과 달리 유독 넘칠 듯 찰랑거렸다.
여전히 오늘도 식사는 혼자 했다. 친해진 이라곤 고작해야 취사병 아저씨인데, 그는 이 시간이면 늘 일하느라 바쁘니 같이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홀로 앉은 미렌이 막 스푼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폐, 폐하……! 여긴 어쩐 일로.”
“내가 가지 못할 곳이 있었나?”
“아니, 아닙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미렌도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미렌이 소란이 난 곳을 바라보자 저 멀리 커다란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는 덜컹, 미렌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라이언이었다.
“폐하……?”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제 앞에 앉은 라이언을 바라봤다.
여전히 메마른 안색이었다. 그는 식사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제 앞에 미렌의 것과 똑같은 식판을 내려놨다.
물론 황제인 그와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식판이었다. 미렌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자, 라이언이 뭘 보냐는 듯 턱짓했다.
“식사, 안 할 건가?”
“아, 예. 식사……해야죠.”
그의 다그침에 결국 미렌도 마저 스푼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로 한동안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났다.
차마 황제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박다시피 하여 스푼을 움직여 댔다.
“숙소는 왜 옮기지 않았지?”
“콜록, 콜록……! 네, 네? 숙소요?”
“옮긴다고 했지 않나.”
숙소. 맞다, 숙소.
분명 그와 약속을 했었다. 어제 숙소를 옮기기로.
그녀가 설마, 싶어 눈을 내리자 라이언의 식판이 어느새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식사를 하세요.’라고 했던 저와의 약속을.
그러나 막상 라이언과 눈을 마주하면 그는 싸늘할 정도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미렌이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 오후 중으로 옮기려고 했는데요.”
“분명 오늘 오전 중이라 했을 텐데.”
“……식사 후 바로 옮기겠습니다.”
“그래.”
그제야 라이언은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미소는 짓지 않았으나 분명 그런 느낌이었다.
결국 미렌은 스푼을 내려놨다. 아침부터 열심히 움직인 덕분에 배가 고팠지만 도저히 이 상황에서는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주변만 해도, 지나가는 기사는 물론 병사들이 죄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시종과 호위들은 저 멀리서 발까지 굴러 가며 바라보는 중이었다.
“머,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어째서?”
“식사를 다 했습니다.”
“거기 남은 건 식사가 아니란 건가.”
그가 턱짓한 곳에는 미렌의 식판이 놓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몇 입도 먹지 않은 뜨끈한 수프가.
곤란한 얼굴로 제 수프를 내려다보던 미렌은 결국 엉거주춤 떼어 낸 제 엉덩이를 다시 안착시켰다. 왜인지 억울했지만 스푼을 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수프를 챙겨 줬던 아저씨가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
“저…… 그럼 이만 가도 될까요?”
“어디를?”
“그, 할 일이 있어서요.”
물론 할 일 따위는 없다. 애매한 위치에 놓인 미렌에게 꼭 해야 할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다만 라이언과 계속 있는 건 불편했다. 그는 황제고 미렌 우드는 평민이니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 떠날 타이밍을 살필 때였다.
“할 일?”
“예, 할 일이요.”
“어떤 것.”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질문이 많으실까.
평소라면 그녀에겐 관심도 없었을 라이언이었다. 그런데 밤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하나하나 관심을 가져 댔다.
미렌으로선 불편한 일이었다.
“아…… 그게. 식자재 나르는 것도 도와 드리고, 막사 보수 일도 조금 도와 드리고, 약초 분류도…….”
“그걸 왜 네가 해야 하지?”
“다들 바쁘신데 저 혼자 놀 수는 없으니까요. 도와 드리면 좋죠.”
“넌 내 시종이 아니었나?”
“네?”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식사를 하면 시종직으로 들어오는 것, 그게 거래였다.”
“……식사를 하시면 제가 숙소를 옮기는 게 아니라요?”
“네가 감히 황제를 농락하겠단 건가?”
미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아, 아아, 아니요! 절대 아니죠!”
미렌이 두 손을 내저어 가며 황급히 만류했다. 그가 ‘농락’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주위에 있던 시종과 호위 기사들의 눈초리가 싸늘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만류에 라이언이 날카로운 눈초리를 풀었다. 미렌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지금은 숙소를 옮기러 가겠습니다. 그러면 되죠?”
“그래.”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미렌은 이때다 싶어 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가며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가 걸음을 한 번 옮길 때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한 걸음씩 멀어지는 게 아닌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기도 했다.
설마 싶어 미렌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여전히 라이언이 있었다.
“저…… 폐하.”
“말하라.”
“왜…… 왜 따라오십니까?”
분명 미렌은 서너 걸음을 넘게 걸었는데 라이언과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그 말인즉슨 라이언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단 이야기였다.
“나 또한 내 침소에 가는 길이다.”
“아니요, 폐하. 잘못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폐하의 침소는 제 숙소와 정반대인데요.”
“어차피 너는 내 침소 옆으로 갈 것 아닌가.”
그래서 지금 따라오겠다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미렌이 눈썹을 모았다. 이쯤 되니 그냥 솔직하게 제 뒤를 따라오는 거라고 말하라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미렌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은 평민이고, 라이언은 황제니 그런 무엄한 말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 짐을 챙겨 옮기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텐데요…….”
“짐이 얼마나 된다고.”
“꽤, 제법 많습니다. 그러니 침소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물론 짐 따위 있지도 않다. 사실 이대로 몸만 달랑 움직여 숙소를 옮긴다 해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미렌은 라이언을 달래야만 했다.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을 따라오는지 모를 저 사자를 어떻게든 달래야 한다.
“움직여라.”
“예?”
“언제까지 황제를 기다리게 할 셈인가?”
하지만 라이언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망설이느라 걸음을 떼지 않자 라이언은 미렌을 지나쳐 직접 그녀의 숙소로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놀라운 것은, 라이언이 이미 미렌의 숙소가 어딘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라이언과 미렌, 거기다 그의 시종에 호위 기사까지 줄줄이 미렌의 조그만 숙소 앞으로 모였다.
“이게 네 숙소라고?”
“네.”
사실 미렌의 숙소는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아니, 열악하다 해야 옳았다.
뒤늦게 합류한 미렌의 숙소는 급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곧 무너질 것 같은 작은 막사 하나가 바로 그녀의 숙소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라이언이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미렌은 귀하게 자란 그가 이렇게 열악한 집은 처음 보나 보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미렌으로선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원래 미렌 우드는 낡은 이층집에서 평생을 살았고, 그 집이 무너진 뒤에는 노숙도 마다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니 이 정도쯤이야.
“미렌 우드.”
“예, 폐하.”
“짐을 들러 가지.”
“네. 네? 폐하?”
저도 모르게 대답했던 미렌은 라이언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는 탓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몸집의 라이언이 숙소로 들어가자 그 엉성한 천막이 곧 무너질 듯 휘청였다. 그녀가 놀라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안에는 간단한 가방 하나와 오며가며 주운 약초 몇 개가 널려 있었다. 라이언은 되는대로 그것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폐, 폐하. 제가 하겠습니다. 예?”
미렌이 말려도 속수무책이었다. 곧 라이언의 커다란 손에 그녀의 모든 짐이 들려 나왔다.
짐을 모두 챙긴 그는 고민하지 않고 제 침소를 향해 걸어갔다. 미렌은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이곳을 사용하도록.”
“여긴 시종장님께서 사용하시는 숙소가 아닙니까?”
라이언이 가리킨 곳은 과분하게 좋은 막사였다. 무려 황제의 시종장이 사용하는 막사였기 때문이다.
그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시종장을 바라봤다. 눈빛을 맞은 시종장이 어깨를 움찔 떨더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이미 옮긴 지 오래입니다.”
“시종장님이요? 어째서요?”
“저는…… 작은 곳이 좋습니다. 마음이 안정됩니다.”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아무튼 시종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라이언이 이제 되었냐는 듯 미렌을 바라봤다.
그쯤 되자 시종장을 비롯해 모든 호위 기사들도 미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순순히 이 숙소를 사용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미렌이 입술을 꾹 짓눌렀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말했다.
“저…… 폐하.”
“말하라.”
왜 제게 잘해 주십니까?
이 단순한 한마디가 나오질 않았다. 설마 라이언이 제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말할까 봐, 무서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라이언이 알아차렸다면 저렇게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진 않았을 터다.
그녀가 말을 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 이올라오스 경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시종 한 명이 고개를 숙이더니 라이언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호위 기사들의 걸음이 바빠졌다. 꼭 누군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고를 올렸던 시종은 연이어 말했다.
“저, 그리고…… 마법사단 총단장께서도 돌아오셨단 소식입니다.”
이올라오스의 귀환 소식에는 담담하게 굴었던 라이언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다시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굳은 채였다.
이윽고 저 멀리서 갑옷을 입은 사내와 또 다른 한 명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미렌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들의 뒤로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폐하의 검, 이올라오스 트리온. 복귀하였습니다.”
흰 갑옷을 입은 이올라오스는 라이언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와 달리 옆의 사내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라이언은 그 사내를 무감정한 얼굴로 주시했다. 흰머리의 사내 또한 얼마 가지 않아 부복했다.
“마법사단 총단장, 헤겔 카르너. 복귀하였습니다.”
나지막한 한마디였다. 헤겔 카르너의 짧아진 뒷머리가 바람결에 흩날렸다.
라이언의 두 눈은 오로지 헤겔만을 향했다.
헤겔 또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고개를 조아린 채 그대로 멈추었다.
그때 미렌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곳에 머무르기로 택한 순간.
처음으로 세 사람이 모두…… 이곳에서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