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지 않는 태양
황제의 부름은 그날로 끝이 아니었다.
미렌은 그 뒤로도 매일같이 황제의 막사를 찾아야 했다. 긴 만남은 아니었다.
그렇게 미렌을 부르고 나면 라이언은 그저 미렌 우드를 몇 번 부를 뿐이었다. 그러면 미렌은 꼭 그 부름에 입을 열어 대답을 해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미렌 우드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미렌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올라오스를 비롯해 모든 마탑주들은 프레니티 탈환 작전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매사 여유로운 건 오로지 미렌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도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곧 있을 라이언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미렌 우드 님?”
“예?”
“저, 미렌 우드 님 맞으십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소년병으로 보이는 어린 사내였다. 식판도 없이 다가와 우물쭈물하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숙소 때문에 찾아뵀습니다.”
“숙소요?”
“그…… 미렌 우드 님의 숙소를 폐하의 곁으로 옮기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와서……. 그걸 여쭤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 숙소를 어째서요? 누가 그러던가요?”
미렌의 연이은 질문에 소년병이 오히려 더 놀랐다. 그는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젓더니 겨우겨우 설명을 시작했다.
“의, 의견은 다른 군단장님들께서 내셨습니다. 미렌 우드 님이 오신 뒤로 폐하께서 잠잠해지신 것 같다고…….”
말이 이어질수록 소년병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미렌의 눈썹이 애매하게 올라갔다.
“잠잠해지다니요?”
“허, 헉!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폐하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 알겠습니다. 그런데 잠잠해졌다니요? 전에는 어떠했기에…….”
“아아, 아, 아닙니다!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소년병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멀리 가지 않은 그가 제법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내에게 달려가 보고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미렌은 결국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푹 한숨이 나왔다.
한숨이 나온 이유야 간단했다.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 있는 모든 병사와 기사들의 눈초리가 그녀를 향했으니까.
“하아…….”
정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요 며칠간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미렌 우드가 황제 폐하의 정부라는 것.
솔직히 말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가 봤자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아서 나오는데 정부라니.
하지만 소문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미렌 우드는 현재 이렇다 할 직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녀도 아니었고, 병사나 기사는 더더욱 아니다. 그녀의 애매한 위치가 병사들 사이로 기묘한 소문을 나돌게 했다.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식사 자리를 빠져나온 미렌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훌쩍 밤이 되어 있었다. 라이언의 막사로 찾아가야 할 때였다.
***
“미렌 우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실례하겠습니다.”
대답은 없었지만 미렌은 익숙하게 천막의 문을 밀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여전히 캄캄한 어둠 속을 차지하고 앉은 라이언이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힐끗 고개를 돌려 미렌을 확인했다. 움푹 팬 그의 눈에서 안광이 형형하게 느껴졌다.
식사는 하고 있는 걸까.
아니…… 물이라도 마시는 걸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미렌은 묻지 못했다. 미렌 우드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미렌 우드.”
“예, 폐하.”
오늘도 여전히 그는 미렌의 이름만 불러 댔다. 자리를 지키고 선 미렌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달랐다.
“……미렌.”
쿵.
익숙한 부름에 미렌은 심장이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억지로 열었던 입술이 결국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다시 닫히자 라이언이 물었다.
“왜 대답하지 않지?”
“……죄송합니다.”
나무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무감정한 눈으로 미렌을 바라보던 라이언이 다시금 불렀다.
“미렌.”
이번엔 방금 전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왔을 때보단 나았다. 숨을 들이쉰 미렌이 겨우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러자 라이언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긴장하고 있던 미렌에게 라이언이 질문을 던졌다.
“숙소는.”
“예?”
“숙소는, 옮길 건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질문이었다. 멍하니 라이언을 바라보던 미렌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제가 이곳에서 어떤 역할인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요.”
무거운 침묵이 오갔다.
사실 미렌으로선 큰 결심을 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라이언과 자신은 이런 소소한 잡담을 나눌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라이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숙소는 내일 오전 중으로 옮기도록.”
“오전 중이요?”
“시종직이 비어 있다.”
아닐 텐데.
황제의 시종직이 비어 있다는 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황제의 아래에서 일하는 시종직은 아주 말단조차도 지원자들이 수두룩했다.
미렌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이었다면 속아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라이언은 그 정도로 평연하게 거짓말을 해 댔다.
고민하던 미렌이 겨우 대답했다.
“아직…… 제 대답은 유효합니다. 저는 복숭아나 키우며 살고 싶습니다.”
라이언은 아직도 죽은 제 아내를 잊지 못했다.
그 사실은 미렌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은 악연이었다. 인연이 아니라 지독한 악연.
라이언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 또한 미렌은 자신의 남편인 라이언을 처음부터 끝까지 속였다.
얽히고설킨 인연은 손쓸 수 없는 실타래처럼 망가져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처음과 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렌은 결심했다. 자신과 라이언의 인연을 끊어 내겠다고.
다만, 그가 괜찮아지는 것만 확인한 뒤에.
“네게 가장 비옥한 땅을 하사하겠다.”
“아니요, 폐하. 제겐 필요하지 않습니다.”
“토지로 부족한가? 그렇다면 네게 작위와 영지를 하사하마.”
낮고 빠르게 내뱉어지는 라이언의 말들은 얼핏 간절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의 속내가 이해되지 않은 미렌이 물었다.
“어째서 저입니까?”
“감히 내게 묻는 건가?”
“……죄송합니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다.”
끝끝내 라이언이 대답을 거부하자 미렌이 눈을 들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곳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너는 오늘처럼 내 막사로 와 대답을 하는 게 전부지.”
“죄송합니다, 폐하. 거절하겠습니다.”
쿵!
라이언의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가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섰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미렌의 코앞에 섰다. 그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미렌을 내려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지금, 내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물음을 듣는 순간 미렌은 제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알던 라이언은 이토록 치기 어린 행동을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놓고, 사냥감이 잡히면 목을 조인다. 누구보다 똑똑한 사내였다.
그런데 지금의 라이언은 이성을 잃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미렌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애써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그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 폐하. 거부하겠습니다.”
“…….”
“죽이실 겁니까?”
미렌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무리 달라졌다곤 하나, 그는 오랫동안 지켜본 자신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
라이언은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답을 찾지 못해 절망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적어도 미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결국 미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의 눈을 직시한 채였다.
“그러지 마세요.”
“……무엇을?”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폐하, 예전으로 돌아오세요.”
나의 가장 빛나는 성군. 가장 고귀한 태양.
제 목숨을 바쳐 세워 올린 그의 명예가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비록, 그와의 긴 인연은 끊어 내야 했지만…….
그녀는 라이언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예전, 이라.”
홀로 중얼거리는 그를 바라보던 미렌은 곧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숙소는 내일 중으로 옮기겠습니다.”
“그래.”
“헌데 폐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라이언이 눈동자를 굴렸다. 고개를 숙였던 그녀는 어느새 슬쩍 라이언을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너무 많이 마르셨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가 시종을 부를 테니, 식사를 하세요.”
결국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해낸 미렌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숨을 틔웠다. 그러느라 그녀는 라이언의 태도가 달라졌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시종을 찾느라 바쁘게 나가는 미렌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예전으로 돌아와라.
너무 많이 마르셨다.
겨우 몇 번밖에 보지 못한 미렌 우드가 어째서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지…….
그는 기묘한 모순에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제 시야에 그녀가 없음에도 그러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조금이나마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