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05)화 (105/133)

찾아 헤맬지라도

다가오던 이올라오스가 점차 느려지더니, 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 또한 발견한 것이다.

미렌과 라이언이 마주 보고 선 모습을.

미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밤을 머금은 듯 새까만 사내가 그녀의 지척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

서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이언은 무감한 눈으로 그저 그녀를 바라봤으며, 미렌은 어떤 말을 하려 해도 제 목 끝에 칼이라도 닿은 듯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기묘한 대치였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음에도 미렌만이 오로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저 사내가 자신이 알던 제 남편이 맞는지, 그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의 향기가, 분위기가, 모든 게 라이언임을 알려 주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저 메마른 사내가…… 내가 알던 라이언이 맞단 말인가.

“잘도 숨었더군.”

터벅.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미렌은 물러서지 못했다.

저 까맣게 죽은 눈에 꽉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멈추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숨었……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리하면, 내가 찾아내지 못할 줄 알았나?”

그의 얼굴 위로 비뚜름한 미소가 지어졌다. 미렌 에드가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던 싸늘하고 차가운 미소가.

라이언은 미렌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쿵, 철컥!

다가오다 멈췄던 이올라오스가 다시금 걸음을 옮겨 미렌과 라이언의 앞까지 당도했다. 그는 그 즉시 라이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입고 있던 흰 갑옷이 바닥에 있는 진흙과 풀 따위로 엉망이 되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이올라오스는 비록 무릎을 꿇긴 했지만 비스듬하게 라이언으로부터 미렌을 막아선 위치였다. 그러자 라이언의 미소가 진해졌다.

라이언이 말하라는 듯 턱짓하자 이올라오스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미렌 우드…… 님께서는 이동 마법으로 인해 현재 상태가 좋지 못하십니다. 방금 전 오퓨커스 경으로부터 힐링 마법을 받았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퓨커스로부터 힐링 마법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건 이동 마법의 부작용이 아니라 그저 미처 듣지 못했던 소식에 대한 놀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렌은 이올라오스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따라 눈을 내릴 뿐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라.”

“예, 폐하. 부디 우드 님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러한가, 미렌 우드?”

라이언의 부름이 이어지자 결국 미렌도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히 미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무엇을 품었는지, 그가 어떤 의도로 자신을 불렀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찾았는지. 그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이토록 먼 것이다. 라이언과 미렌, 그리고 황제와 평민이라는 위치란.

“……그렇습니다.”

“그래.”

의외로 라이언은 쉽사리 허락했다. 그 허락에 놀란 것은 오히려 이올라오스였다.

눈에 띄게 어깨를 떤 이올라오스가 한 번 더 미렌을 위해 고개를 숙여 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러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탓에 이올라오스의 갑주는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그것을 털어 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미렌에게 다가갔다.

그가 미렌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을 때였다.

“오늘 저녁, 내 막사로 와라.”

“……폐하, 그것은…….”

이올라오스가 미렌을 대신해 입을 열려 했다. 그러지 못하게 막은 것은 미렌이었다.

그녀는 제 어깨를 감싼 이올라오스의 손등을 느릿하게 토닥였다. 그리고 라이언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라이언은 미렌으로부터 확답을 들은 순간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자 다시 한번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아, 이올라오스 경.”

모두의 관심이 쏟아지자 이올라오스도 그제야 미렌을 향해 돌아섰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미렌이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까 전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물론입니다. 우드…… 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미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부름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잘 지냈죠. 그런데 우드 님이라니요? 늘 우드 씨라고 부르셨잖아요.”

“그게,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이올라오스를 바라봤다. 그는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쉰 다음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잔 말을 전했다.

“폐하께서 헤겔 경을 오랫동안 찾으셨습니다. 명목은 황성 침입죄 때문이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그럼요?”

“우드 님을 찾기 위해섭니다.”

이올라오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미렌이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가…… 알아낸 것일까?

자신이 미렌 에드가란 사실을?

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게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는 미렌조차도 모를 노릇이었다.

“폐하께서, 저를요? 어째섭니까?”

“‘미렌’ 우드시니까요.”

“……예?”

미렌의 당황스럽단 반응에 이올라오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한숨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폐하께선 아직 전 황후 전하를 잊지 못하셨습니다.”

“…….”

“집착……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분께서 사용하셨던 모든 물건, 모든 것들을 아직 그러쥐고 계십니다.”

미렌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헌데 우드 님께서는, 가장 탐날 만한 것을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이름이요.”

“세상에 미렌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을 겁니다. 흔한 이름이니까요. 다만, 그중에서 황후 전하를 직접 뵌 분은 우드 님이 유일하십니다.”

이올라오스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심장이 누군가 손에 넣고 꽉 쥐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쳐 버린 걸까.

나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

“우드 님의 눈엔,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니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 눈엔 그저 버티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요.

이올라오스의 씁쓸한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미렌의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는 한마디였다.

***

그날 저녁.

미렌은 자신의 앞으로 배정된 막사에서 쉬다 밖으로 나왔다. 약속한 시간이었다.

이올라오스의 배려로 마음의 준비나마 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오래도록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정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라이언을 대해야 할지.

“누구십니까?”

“아, 저는…….”

라이언의 막사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미렌은 병사 한 명이 묻는 질문에 대답을 망설였다.

누구라고 대답해야 옳을까. 그의 기사도 아니고, 시녀도 아니며, 그렇다고 황후는 더더욱 아닌 자신이.

대답을 미루는 미렌을 보던 병사의 눈초리가 의심으로 가득 채워질 때였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부른 이다.”

“폐, 폐하! 죄송합니다, 노병이 폐하의 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 멀리 라이언이 서 있었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미렌이 병사에게 붙잡히자마자 성큼 다가왔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의 남편이었던 라이언 같아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병사가 물러가고 난 뒤 미렌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물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우스운 소릴 하는군. 내가 널 기다렸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섣불리 판단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렌은 라이언이 돌아서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따라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직접 문을 열어 주란 건가, 감히?”

“죄송합니다!”

미렌이 서둘러 라이언의 뒤를 따랐다. 그가 기다려 주지 않은 덕분에 그녀는 막사의 문 역할을 하는 천에 코를 박으며 길을 터야 했다.

내부는 깜깜했다.

구석에 조그만 촛불이 일렁이고 있지 않았다면 인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라이언은 그런 막사 가운데 마련된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사실 그녀는 라이언이 제게 헤겔에 대한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일단 미렌을 찾은 명목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의외였다.

“미렌.”

“……예.”

“미렌 우드.”

“예, 폐하.”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따금씩 혹시나 싶어 라이언의 얼굴을 살필 때면 그는 여전히 무감정한 표정이었다.

그 뒤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그게 미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찌하여…… 부르셨습니까?”

“내 부름에 이유가 있어야 하나?”

라이언은 감히, 라고 덧붙이고 싶은 것처럼 그녀를 내려다봤다. 비웃음을 매단 채였다.

하지만 이상하지. 그럴수록 미렌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의 말이 그녀에겐 꼭……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다’고 들렸으니까.

“미렌 우드.”

“예.”

“미렌, 우드…….”

처음엔 그저 미렌 우드라 불렀던 그가 이번엔 그 사이를 띄워 미렌, 우드라 불렀다. 그 조그만 간격에도 미렌은 움찔 반응했다.

툭. 투욱, 툭…….

팔걸이를 두드리던 라이언의 검지가 어느 순간 멈췄다. 기나긴 침묵이 지난 다음, 그가 명령했다.

“이만 돌아가도록.”

“예?”

“귀머거리인가?”

까칠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미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망연히 라이언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결국 막사를 빠져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달은 아주 조금 이동했을 뿐이었다. 한 시간도 채 흐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막사 앞을 떠나려던 미렌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감히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앎에도 그녀는 라이언의 막사에 제 몸을 바짝 붙였다. 귀를 가져다 댄 순간.

애달픈 부름이 들려왔다.

“미렌.”

“…….”

“미렌…….”

대답 없는 부름이 이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부름이 아니었다.

통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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