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그들이 간단히 짐을 챙겨 공터에 모인 것은 한 시간이 채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바닥에 마법진을 연성하는 것은 멜리크의 몫이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곁에선 리키가 조금 더 세세하게 이동 마법을 완성시켰다. 살아 있는 마법사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불리는 다섯 명의 마법사가 지원하자 작업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이 문득 헤겔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헤겔 씨.”
“……왜?”
헤겔이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그들은 이올라오스를 따라가겠단 결정을 내린 뒤로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미렌이 왜인지 헤겔을 피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쯤은, 헤겔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했던 약속……. 아직도 유효한가요?”
헤겔은 가족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미렌을 돕는 대신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 번째, 앞으로 내 도움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것. 두 번째는 수도에 돌아가도 황제를 직접 만나지 말 것.’
미렌은 지금 그 약속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로선 오랫동안 참아 왔다. 이제껏 구태여 라이언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은 것 또한, 그 약속의 일환이었다.
“아직도…… 좋아?”
“…….”
“그를 아직도 좋아하느냐고.”
미렌을 바라보지 않는 헤겔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 있었다. 미렌은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제가 좋아하면, 뭔가 달라집니까?”
그가 사랑한 아내, 미렌 에드가는 이미 죽어 버렸는데.
시체가 되어 땅에 묻혔어도 이미 썩어 버렸을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라면, 한 사람의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미렌은 이제 장담할 수 없었다. 라이언의 앞에서 자신이 미렌 에드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아니, 그럴 필요가 있는 건지.
“달라.”
“대체 뭐가요. 대체 뭐가 달라집니까? 그 나약한 황후는 이미……!”
투욱.
돌아선 헤겔이 미렌의 어깨에 제 이마를 묻었다. 그의 숨소리가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의 숨소리가 젖어 있다는 사실쯤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한마디에 미렌이 순간 숨을 멈추었다.
헤겔은 미렌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툭.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듯 기댈 뿐이었다.
“나는 다르잖아…….”
“…….”
“몰랐다고 하지 마. 그거 비겁해.”
헤겔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지척에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보랏빛 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보고 비겁하다며. 그럼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 라이언을 떠올린 순간, 미렌은 헤겔의 감정을 조금도 배려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못내 미안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헤겔은 별스럽지 않다는 듯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슬픔에 젖어 들었냐는 듯.
“좋아하지 말까?”
“헤겔 씨, 그러니까, 저는…….”
“그러면 나도, 네 앞에서 비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헤겔이 눈꼬리를 접어 가며 웃었다. 그토록 천진하게 웃는 헤겔은 미렌으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예전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
“…….”
“그런데 이젠 싫어.”
비겁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내뱉으며 헤겔은 자신을 머저리라 욕했다. 또 멍청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미렌, 그리고 그렌과 함께 지낸 석 달이 헤겔을 그렇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미렌을 알게 된 그 날부터다. 점점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은.
“원한다면 다녀와.”
그렇게 말하는 헤겔의 얼굴을, 미렌은 오래도록 지켜봤다. 그는 픽 웃으며 어서 가 보라는 듯 턱짓했다.
결국 미렌의 걸음이 떨어졌다. 그녀는 저 멀리 함께 대기하고 있는 알페카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떠나기 전, 헤겔이 나직이 속삭였다.
“잘 갔다 와.”
그 한마디는 미렌의 귓가에도 똑똑히 들렸다. 또한 생각했다.
다녀오라는 말이…… 그토록 간절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
“우리랑 왜 같이 가려고 하는데?”
거만하게 턱 끝을 올린 오퓨커스가 새침하게 물었다. 알페카는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그런 오퓨커스를 바라보는 채였다.
사실 이미 이동 마법은 진행한 뒤였다. 헤겔을 제외하고 오퓨커스와 알페카, 멜리크는 군사 기지 근처로 곧장 이동했다. 마법진도 필요 없었다.
“그러셨잖아요. 여러분과 함께 가면 폐하를 봐야 할 거라고.”
“지금 폐하를 뵈는 게 목적이란 말이야?”
“그러면 안 됩니까?”
오퓨커스가 별 이상한 걸 다 보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현 황제의 모습을 보고 나면 저런 되바라진 생각도 들지 않을 터였다.
알페카는 일단 자리를 옮기자며 제안했다. 로브 속에서 입을 꼭 다문 멜리크가 그들의 곁을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이해가 안 돼서 그래. 헤겔 카르너, 그 자식은 이올라오스를 따라갔잖아?”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범죄자 신분이 아니니까요.”
“아, 맞다. 걔 범죄자였지. 아무튼…….”
헤겔과 이올라오스는 전쟁 동안 프레니티 마을 사람들이 머물 임시 거처를 구해 주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리키와 그렌이 그들을 따라갔다. 미렌은 마을 사람들에게 미리 그렌을 챙겨 달라는 부탁을 해 둔 참이었다.
“근데, 안 만나는 게 좋을걸.”
“어째서요?”
“몰라서 물어?”
오퓨커스가 의아하단 얼굴로 미렌을 바라봤다. 바깥에선 이미 소문이 돌 대로 돌았는데 아직도 이 소식을 모르는 이가 있다니.
그녀는 검지를 들어 제 관자놀이 옆을 빙빙 돌렸다.
“미쳐 버렸잖아.”
“야, 오퓨커스……! 말조심해야지!”
“알페카, 넌 좀 빠져. 뭐, 그럼 아니라고 할까? 너희들도 다 알잖아. ‘그’ 황후가 죽고 나서 완전히 돌아 버린 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황후?
미렌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의 소식을 여기서 다시 들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황후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폐하께서…… 많이 힘들어하셨습니까?”
“몰라서 묻니? 살아 있을 때도 좋아 죽으려 했던 사람이야. 그놈의 아르테미스, 그걸 찾겠다고 모든 마탑을 들쑤시는 바람에 우리 마탑이 철거될 뻔했다니까?”
오퓨커스가 비스듬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완벽한 비소였다.
“그럴 만하지. 제 아내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가지, 신하들은 폐위하라고 난리지. 그래도 아르테미스를 찾고 나선 그나마 괜찮아졌다더니…….”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그것도 아니었나 봐.’라며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알페카도 오퓨커스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 그래서 황후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소문이 흉흉했지.”
“소문이 흉흉해? 어머. 알페카, 북쪽 마탑이 황성이랑 멀어서 소문도 느린가 본데, 소문이 그나마 나았어.”
미렌은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오퓨커스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연이어 말했다.
“황제가 황후를 독살한 시녀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알아?”
“어떻게?”
“모든 시녀들을 고문했어. 황후가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시녀라면, 전부.”
미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알페카와 오퓨커스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런 미렌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낸 범인은 짜잔, 황족 시해죄가 아니라 반역죄로 정리했지? 그게 뭘 뜻하는 줄 알아?”
알페카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퓨커스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알페카의 얼굴이 슬며시 달아올랐다.
“황후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뜻이야.”
털썩.
앞서 나갔던 오퓨커스와 알페카, 그리고 멜리크를 뒤에서 힘겹게 따라가던 미렌이 결국 주저앉았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놀란 건 오퓨커스와 알페카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쓰러지는 소리에 먼저 오퓨커스가 달려와 침착하게 미렌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오퓨커스의 손이 파랗게 빛났다. 그녀는 이전과 달리 신중한 얼굴로 환자를 대하듯 미렌을 진찰했다.
알페카 또한 오퓨커스의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길로 미렌을 살폈다.
“어디 아픈 건 아닌데…… 응?”
“우드 씨? 괜찮아요? 이런…… 이동 마법이 무리가 되었나 봐.”
“아니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미렌이 오퓨커스의 손을 조심스레 밀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충격적인 소식에 순간 힘이 풀렸을 뿐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정말 아프다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라이언을 만나야만 했다.
“가던 대로, 계속 가세요. 따라가겠습니다.”
“무리하지 마. 난 아픈데 객기 부리는 애들은 딱 질색이거든?”
“오퓨커스, 말 예쁘게 해야지.”
“네가 내 오빠라도 되니? 흥.”
그러면서도 오퓨커스는 미렌에게 간단한 힐링 마법을 걸어 주었다.
몸에 기운이 차는 속도가 엄청났다. 과연 치유 마법의 대가다운 실력이었다.
“이제 걸을 수는 있지? 알아서 걸어라?”
“제가 부축이라도 해 드릴까요?”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오퓨커스 님 말대로 충분히 걸을 수 있어요.”
그러자 알페카도 알겠다는 듯 수긍했다. 멜리크는 여전히 뚱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일행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프레니티 영지 탈환 작전을 위해 세워 둔 임시 기지에 들어가는 것도 그들과 함께하자 수월했다.
전쟁 중인 막사를 처음 본 미렌이 어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띄엄띄엄 마법사들의 존재도 보였다.
“미렌 우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미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멀리, 흰색의 갑주를 입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이올라오스였다.
“대체 왜……!”
당연히 헤겔과 함께 갔어야 할 이올라오스가 이곳에 있다니.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였다.
공기의 질이 바뀌었다.
말로는 표현 못 할 무거운 분위기가 엄습했다. 미렌은 제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을 느끼며 옆으로 눈을 돌렸다.
모든 이들이 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함께 있던 오퓨커스와 알페카, 심지어 멜리크마저도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순간, 미렌은 직감했다.
“미렌, 우드.”
황제가…… 자신을 찾으러 왔노라고.
“미렌…….”
느른한 사자의 부름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