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꿈 꾸길.
바글바글.
애당초 피신을 위해 만들어진 미렌의 오두막은 그다지 넓지 못했다. 그런데 일곱 명이나 불시에 들이닥치자 집 안은 바글바글하다 못해 터져 나갔다.
결국 보다 못한 미렌이 리키와 그렌에게 나가서 놀고 있으란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리키가 눈을 끔뻑거렸다.
“놀아요?”
“아, 리키 씨더러 그렌을 맡아 달라는 건 아니고요, 아무래도 안이 답답하니 밖에 계시는 게…….”
“와아아아! 너무 좋아! 그렌? 그렌이라고 했지? 빨리 가자!”
리키는 그렌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달리 동안인 리키는 얼핏 보면 그렌보다 고작 몇 살 많은 형으로 보였다.
그렇게 둘을 내보내자 이제 내부에는 미렌을 포함해 7명의 성인이 남았다. 숨이 턱 막히는 숫자였다.
그들을 둘러보던 헤겔이 마침내 말했다.
“일단…… 싹 다 돌아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 헤겔. 미안하지만 우리도 못 돌아가.”
첫 번째 대답은 이올라오스로부터 나왔고, 그다음은 알페카였다.
그 순간 이올라오스와 알페카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웃고 있지만 은근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헤겔, 너도 저 기사님보단 우리가 편하지 않겠어? 그래도 봐 온 정이 있잖아, 하하.”
“어차피 갈 거면 우리랑 가는 게 나을 겁니다. 우드 씨도 함께 갈 것 아닙니까?”
두 일행 모두 헤겔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굴었다. 헤겔은 그런 알페카와 이올라오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결론을 내렸다.
“못 가.”
“어째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의 수가 제법 돼. 전쟁 중인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한 번에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그러자 오퓨커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원할게.”
“우리도 마찬가지. 남쪽 마탑은 물론이고 모든 마탑이 지원할 생각이야.”
조용히 있던 멜리크마저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왔다.
오퓨커스를 비롯해 알페카, 심지어 멜리크까지 지원을 마다하지 않자 헤겔은 오히려 얼굴을 구겼다.
전쟁 중 고작 시골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만한 인력들을 지원한다니,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마법사들의 능력은 전쟁 중일수록 그 값어치가 귀중해졌다.
결국 헤겔이 그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야.”
“하? 그렇다면 더더욱 용납 못 해.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가져와.”
그 말에 세 마탑주들을 비롯해 기사들까지 눈빛을 주고받았다. 결국 알페카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네게 수배령을 내리셨어.”
“……뭐?”
“아오, 저 멍청이. 아직도 이해 못 하겠어?! 폐하께서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에게 수배령을 내렸다고! 그것도 천문학적인 금액의!”
답답해진 오퓨커스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헤겔이 그 말이 사실이냐는 듯 알페카를 바라보자 그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쪽이나 우리나, 먼저 널 찾으러 온 거야. 물론 돈 때문은 아니지만.”
“이제 아셨으니 됐군요. 카르너 경께선 우리와 함께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들은 모두 당신을 폐하에게 데려갈 테니까.”
헤겔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올라오스는 의자가 없어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미렌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범죄자인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폐하께서 당신을 왜 찾는지.”
헤겔은 제 표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올라오스의 말을 섣불리 이해해선 안 되었다.
그런데 자꾸만…… 자꾸만 머릿속으로 두려움이 번졌다. 라이언, 그 지독한 황제가 미렌에 대해 어떤 사실이라도 알아챘나 싶은.
헤겔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미렌을 확인했지만 그녀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들이 그저 오로지 마법사단을 이끌 헤겔을 찾으러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폐하를 직접 뵈는 건 껄끄러우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십시오. ……우드 씨도, 제가 직접 모실 겁니다.”
“아아! 됐어. 우리랑 안 가도 상관없으니까 돌아만 가자. 하, 정말 피곤해 죽겠어.”
결국 참다못한 오퓨커스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페카는 그런 오퓨커스를 바라보더니 결국 머쓱하게 웃으며 따라 일어섰다.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 두겠다는 말을 남긴 채였다.
멜리크마저 그들을 따라 나가자 남은 건 이올라오스와 로이아, 미렌, 그리고 헤겔뿐이었다.
이올라오스가 나직이 말했다.
“폐하께서 미렌 우드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쨍그랑!
순간 헤겔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밀어 냈다. 그 바람에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놀란 미렌이 서둘러 다가와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헤겔도 당황한 얼굴로 유리 조각을 치웠다.
깨진 찻잔을 다 치운 미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절 만나고 싶어 하신다니요? 어째서입니까?”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판단하기엔 그저 헤겔 씨를 만나기 위해 찾고 계시는 건 아닐 것 같더군요.”
“그건, 안 돼.”
입을 다물고 있던 헤겔이 보랏빛 눈을 들어 이올라오스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미묘하게 침잠해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폐하께선 우드 씨에게 일시적인 관심을 가지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십시오. 우드 씨를 숨겨 드리겠습니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었어. 대체 왜 네가 우릴 도와주냐는 말이야. 너는, 황제의 개가 아니었나?”
이올라오스가 짧게 웃었다. 그는 감히 자신을 개라고 부름에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돕겠다는 겁니다.”
“하?”
“괜한 의심 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폐하를 위해서이니.”
곧 이올라오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떠날 준비를 하라는 말과 함께 로이아를 데리고 떠났다.
떠나기 전 아주 잠시 동안 그의 시선이 미렌을 향했다. 헤겔과 로이아, 심지어는 미렌마저도 알아채지 못한 눈길이었다.
***
불이 꺼진 막사 안. 모든 것이 어둡게 가라앉은 그곳에서 커다란 사내가 홀로 앉아 있었다.
천막 사이로 내려온 달빛이 그 사내의 얼굴 위를 간질였다. 어둠 속에서 사내의 까맣게 죽은 피부가 드러났다.
그는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찾았나?”
“……예, 폐하.”
찾았다는 한마디에 라이언의 어깨가 순간 떨렸다. 그러나 대답을 한 시종은 두려움에 차마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톡, 톡.
그의 검지가 팔걸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입을 연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헤겔 카르너에게 전하라. 돌아오는 즉시 나를 만나러 오라고.”
“예,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미렌 우드 님은 어찌할까요?”
미렌, 우드.
그 낯선 이름에 라이언이 푸스스 웃었다. 고작 이름 하나로도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제 자신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졌다. 꼭 먹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그곳엔 어느새 싸늘한 무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내 앞으로 데려오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늦지 않게…….”
“아니.”
라이언의 턱 끝이 올라갔다. 그는 습관처럼 천장을 바라보더니 느지막이 말했다.
“미렌 우드는 따로 데려와라.”
“예? 헤겔 경과 함께가 아니라요?”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되물었던 시종은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어깨를 떨었다.
황후가 죽은 뒤 폐하의 분위기가 예전보다 더 두려워진 것을 알고 있었는데, 감히 물음을 던진 것이다.
시종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잘못을 빌려 했을 때였다. 라이언이 손을 들어 나가라는 듯 휘저었다.
결국 이도 저도 못 한 시종은 뒷걸음치듯 막사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라이언은 잠시간 내려오는 달빛을 올려다봤다. 보름달이 가득 찬 밤이었다.
“아…….”
무언가 깨달은 듯 그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커다란 소음을 냈음에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의 걸음이 누가 재촉이라도 하듯 다급해졌다. 발길이 향한 곳은 그의 막사 안에서도 따로 천을 내려 공간이 나누어진 침실이었다.
스르륵.
커튼을 거두자 바깥보다 한층 더 어두운 침실 내부가 드러났다. 빛이 전혀 들지 않아 어두운 그곳에서 라이언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와 본 길인 듯.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커다란 침대 앞이었다.
“미렌.”
녹아내릴 듯 웃어 보인 그가 눈을 감은 여인의 둥근 이마를 매만졌다. 산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길에도 뚜렷이 느껴졌다.
그러나 라이언은 보물이라도 되듯 소중히 그것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바깥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렀어.”
오로지 라이언 혼자만의 숨소리가 침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이마를 매만지던 손은 어느새 볼을 타고 내려가 입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배부른 미소가 지어졌다.
“황홀하더군.”
몇 번이고 부르고 싶었는지 몰라…….
긴긴 밤, 라이언의 혼잣말은 계속되었다. 그는 침대에 오르지도, 그렇다고 옆에 앉지도 않은 채 그저 서서 시체의 곁을 지켰다.
침실 밖으로 이따금씩 라이언의 웃음소리가 뻗어 나가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그토록 웃었다.
“좋은 꿈, 꿔.”
곧 내가 당신을 찾아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