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02)화 (102/133)

별의 세대

“리키, 전쟁 중 아니었나?”

“전쟁 중이죠! 전쟁 중인데 탑주님은 대체 왜 연락이 안 되냐고요!”

쾅쾅!

리키가 신경질적으로 탁자 위를 내려쳤다. 그들은 조금 전 오두막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테이블 앞으로 모인 참이었다.

그 와중에 차를 타 온 미렌이 그것을 리키의 앞에 내려 뒀다.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단번에 들이켠 리키가 헤겔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데저트 영지의 정리가 끝나면 연락하라면서요! 돌아오시겠다면서요!”

“사정이 있었어.”

“사저엉? 무슨 사정이요?!”

“……너는 몰라도 되는 어른들의 사정.”

“저도 성인 된 지가 언젠데요! 성인 됐다고 꿀밤까지 먹이셨으면서!”

삐죽거리던 리키가 흐어엉, 하고 울며 과장스럽게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헤겔은 그런 리키를 곤란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사실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헤겔이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숲속에서 지내는 생활은 요양에 가까웠다. 물론 처음에는 미렌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할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을 나가도 더 나은 피난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테룬 공국과의 전쟁을 하고 있는 지금, 프레니티 영지민이라는 사실을 들키면 돌팔매를 맞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헤겔은 결국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숨어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게 편해졌다.

헤겔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부대끼며 사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바빠서 그랬어.”

“바빠요?! 바쁘다고요?! 지금 제가 데저트 영지에서 얼마나 많은 마법을 해 대고 왔는지 아세요?!”

“……뭐, 얼마나 했는데.”

“이동 마법의 귀재니, 뭐니 막 다 치켜세우는 바람에…… 마법사며 기사며 이동하는 일은 전부 다! 제가 맡았고요, 거기다 갑자기 수도에서 황제 폐하가 내려오시는 바람에 데저트 영지에서 프레니티 근처까지 이동시켜 드렸다고요! 이동하는 동안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저 완전 덜덜 떨었어요!”

리키의 다다다 쏘아 대는 말을 차근히 듣던 헤겔이 눈을 찌푸렸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지금 황제가 프레니티에 있단 말이야?”

“네?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직접 이동시켜 드렸는걸요!”

리키가 뿌듯한 얼굴로 헤겔을 바라봤다. 그 말에 헤겔이 리키의 뒷목을 잡아 꾸욱 눌러 왔다.

“윽, 으윽! 왜 이래욧!”

“쉿, 목소리 낮춰.”

리키에게 달라붙은 헤겔은 저 멀리 그렌의 간식을 준비하느라 주방에 있는 미렌의 뒷모습을 살폈다. 리키의 목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헤겔이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어디 있는데?”

“어디 있긴요, 프레니티 영지를 탈환하려고 여기 코앞에 있죠. 그래서 저도 이렇게 나왔는데요?”

“나와? 뭘 나와?”

“아아, 전쟁 중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잖아요. 그래서 탑주님 찾으러도 못 가다가, 근처 오니까 여력이 돼서 이렇게 왔죠. 탑주님 마나는 워낙 특이해서 마법 쓰시면 저는 바로 알죠!”

헤겔은 곰곰이 리키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생각을 마친 그가 설마…… 하며 말문을 열었다.

“설마 군사 기지를 탈출해서 여기 왔다는 거야?”

“네! 그럼 전쟁 중인데 사단장이 어떻게 나와요?”

리키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헤겔을 마주했다. 무단이탈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해맑게 하고 있었다.

“너, 그럼……. 뒤에 따라붙은 사람은?”

“으응? 그런 게 왜 붙어요? 어차피 진짜 사단장은 탑주님이잖아요. 프레니티 영지 탈환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너는 그게 지금 말이 되는!”

“무슨 얘기 하고 계세요?”

그렌에게도 간식과 차 한 잔을 쥐여 주고 돌아온 미렌이 자리에 착석했다.

끼익. 그녀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의아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분명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돌아온 순간 헤겔이 입을 닫아 버렸다. 헤겔은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야.”

“폐하께서 병사들을 이끌고 프레니티 영지 앞에 오셨다는 얘기였어요!”

“……폐하께서요?”

슬쩍 미렌의 눈치를 살피던 헤겔은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씁쓸하게 변하는 것을 발견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참지 못한 헤겔이 리키의 머리를 깡, 쥐어박았다. 정수리를 부여잡은 리키가 억울하단 얼굴로 헤겔을 흘겨 댔다.

“왜 때려요!”

“답답해서 때렸다, 답답해서. 네가 정말 내 다음 세대 중에서 가장 똑똑한 마법사 맞냐?”

“맞다고요! ‘별의 세대’가 아닐 뿐이지, 저도 어디 가면 한 똑똑 소리 듣거든요!”

리키의 고집스러운 외침에 미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의 세대?”

“아아, 지금 탑주님들이 나온 세대를 그렇게 불러요. 별의 세대! 똑같은 세대에서 탑주가 4명이나 나왔다고요.”

그 말에 미렌은 자신이 만났던 알페카를 떠올렸다. 알페카도 리키가 말하는 ‘별의 세대’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별의 세대’들도 모두 여기 모였네요! 오퓨커스 님, 알페카 님……거기다 멜리크 님까지도요!”

“뭐? 멜리크가 밖으로 나왔다고?”

“네! 완전 놀라셨죠, 저도 실물은 처음 봤잖아요. 물론 큼지막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계셨지만요.”

“걔들은 왜 다 여기 모였는데?”

“아아, 그게요…….”

리키가 생긋 웃으며 설명을 하려 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그들이 모인 문을 두드려 왔다.

소리를 들은 미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이 무언가 부탁할 게 있어 찾아온 모양이었다.

“탑주님 찾으러요! 다들 사방팔방으로 찾고 계시던데요? 서로 사단장 자리 맡기 싫다고요!”

“……뭐? 그게 지금 무슨,”

“헤겔 씨, 손님이 늘어난 것 같은데요.”

손님을 맞으러 떠났던 미렌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문을 가리켰다. 덜렁, 문이 열린 그곳엔 헤겔도 아는 사람 세 명이 존재했다.

“이봐, 헤겔! 그간 잘 지냈어?”

“대체 왜 이딴 곳에 숨어 있는 거야?”

“……짜증 나.”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알페카, 나무 벽을 두고 더럽다는 듯 눈을 찌푸린 오퓨커스, 마지막으로 로브를 뒤집어쓴 채 중얼거리는 멜리크까지.

제 눈을 가린 헤겔은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

“대체 왜 날 쫓아오는 건데?”

“그야 마법사단은 네가 맡아야 하니까?”

“그 이름밖에 없는 자리, 아무나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어차피 각자 마탑주 명만 듣잖아.”

마법사단이라는 미명하에 모이긴 했으나 그곳에서도 마법사들은 각 마탑주의 명령만을 들었다. 기사들과 달리 마법사들은 자신들만의 명령 체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헤겔이 잘근잘근 짓씹듯 말하자 오퓨커스가 흥, 하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

“그러니까 네가 맡아야지. 그 귀찮은 직위 떠맡아 봤자 명령 전달밖에 더 하니?”

“하하, 오퓨커스. 말을 왜 그렇게 하고 그래. 헤겔만 한 적임자가 없으니 맡기는 거지.”

“죄다 하기 싫어서 왔구나?”

오퓨커스를 달래던 알페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거기에 입을 꾹 다문 건 오퓨커스와 멜리크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헤겔의 한숨도 커져 갔다. 이들이야 마법사라서 자유롭게 프레니티 영지 내인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황제의 군사들도 이들이 헤겔을 찾으러 갔단 사실을 안다는 이야기였다.

“……이올라오스 경은 뭐라는데?”

“그 기분 나쁜 기사단장? 뭐, 너만 찾아오라던데. 그러면 다 해결된다고.”

“응, 헤겔. 같이 돌아가자. 다들 너 기다리고 있어.”

중얼중얼.

오퓨커스와 알페카가 헤겔을 설득하는 사이에도 누군가의 중얼거림은 계속됐다. 소리의 주인공은 멜리크였다.

호기심에 미렌이 멜리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기다리고있긴무슨황제가명령해서억지로왔으면서.뭐,그건나도마찬가지지만말이야.”

말이 너무 빨라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렌은 일부 단어만 듣고 그의 말을 짐작해야만 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선명히 들린 단어가 있었다.

“……폐하께서 명령을 하셨어요?”

움찔.

알페카와 오퓨커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멜리크도 미렌의 한마디에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확인했다.

미렌의 물음에 헤겔도 하, 탄성을 내쉬며 고개를 기울였다.

“명령 때문에 왔냐?”

“명령이라니, 하하. 우리가 누구 명령 듣고 움직일 사람들인가? 그냥…… 다들 너 보고 싶대서 찾으러 왔다니까?”

넉살 좋은 알페카가 힘겹게 수습하려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헤겔이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싹 다 나가.”

“우, 우리가 너 못 데려가면!”

결국 알페카는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힘겹게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신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널 데려오지 못하면, 직접 찾으러 오시겠단다…….”

“대체 그치가 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어, 그게. 사실 맞아. 너 범법자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한쪽 눈을 찡그린 헤겔이 설명하라는 듯 턱짓했다. 알페카는 제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전에 황성에 무단 침입 했다며?”

아무래도 미렌과 마리아를 만나게 해 주려다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들어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야, 너는 그러게 왜 남의 집에 침입을 하고 그러냐…….”

알페카는 은근슬쩍 모두 헤겔의 탓이라며 잘못을 돌리려 했다. 그 말 많던 오퓨커스와 멜리크도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세 사람을 바라보던 헤겔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셋 다 약점이라도 잡혔냐?”

“흠흠!”

“흐응.”

“……칫.”

셋 다 각기 다른 반응이었지만 대답은 동일했다. 황제에게 약점을 잡힌 게 분명했다.

가장 곤란해하던 알페카가 초조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런데 진짜 우리랑 돌아가야 해, 안 그러면…….”

쿵!

안에 있던 모두의 고개가 문 쪽을 향해 돌아갔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1 황성 기사단 소속 부단장 로이아 테넷입니다. 속히 문을 열어 주십시오.”

“헉, 벌써 따라왔나 봐. 일부러 좀 떨어진 곳에 이동시켰는데.”

알페카가 중얼거리자 헤겔이 그를 지그시 노려봤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이 저들을 도와줬다고 실토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미렌이 반가운 얼굴로 문을 열어 주려는 순간, 연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올라오스 트리온입니다. 헤겔 경, 거기 계신 거 알고 있으니 나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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