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01)화 (101/133)

갑옷? 로브?

“미렌!”

“아…… 헤겔 씨.”

저 멀리서부터 빠르게 다가온 헤겔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고개를 내려 살피자 웬 새총이 있었다.

“갑자기 살 게 있다면서 달려가더니, 그게 새총이었어요?”

“그렌이 사 달라고 했잖아.”

“장난감을 너무 많이 사 주는 거 아닐까요?”

꽤나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새총에 미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부모님이 계셨을 때는 언제나 두 분이 그렌과 놀아 주거나 직접 장난감을 만들어 주셨던 터라 괜찮았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 미렌은 헤겔과 둘이서 그렌을 돌봐야 했다.

그런데 둘 다 할 일이 많다 보니 그렌에게 많은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장난감이었다.

“그럴까 봐 책도 사 왔지.”

“정말요?”

“응.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 이건 마법 기초학.”

“그렌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가르치면 돼.”

헤겔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가르치는데, 문제 있겠어?”

“그거 오만입니다, 헤겔 씨. 남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짧게 웃은 미렌이 이만 움직이자며 걸음을 떼었다. 슬슬 해도 저물어 가고 있으니 이제는 숲속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만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동 마법에 다른 사람이 휘말릴까 걱정된 헤겔과 미렌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걸어가는 내내 뒤가 시끄러웠다. 미렌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헤겔 씨?”

“상단에다 광대도 여럿 왔더라고. 그래서 시끄러운 모양이야.”

헤겔이 미렌의 어깨를 감싸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뒤를 바라봤다.

헤겔의 말대로 그곳은 시끌벅적했다. 그곳을 돌아보던 미렌은 그렌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결국 관심을 거두었다.

결국 관심을 거둔 미렌은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골목 끝에 다다르자 쓰레기통 하나와 함께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헤겔은 조심스레 미렌의 두 눈을 가렸다.

발밑이 허물어져 내렸다. 공간이 무너지는 감각이 든 순간, 그들이 골목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몇 분 뒤.

“단장,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분명 봤다니까.”

여자치고는 낮은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로이아였다.

그 뒤로 이올라오스가 따라왔다. 로이아가 골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헤겔 카르너가 마법으로 데려간 걸 수도 있지.”

“그랬다면 우리에게 연락을 했을 겁니다.”

이올라오스가 골목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동안 로이아는 고개를 조아린 채 나직이 사실을 말했다.

“헤겔 카르너, 그 마법사가 제 보좌관에게마저 연락을 끊은 건 벌써 두 달이 지났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올라오스는 입을 다물었다.

로이아의 말대로 헤겔 카르너는 미렌 우드를 따라간 뒤 모든 연락을 끊었다. 심지어는 제 보좌관인 리키에게마저도.

“아직 미렌 우드의 행방에는…… 소식이 없나?”

“예, 그렇습니다. 저 또한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올라오스가 짧게 탄식했다.

헤겔 카르너, 그자의 마음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에게 빠르게 데저트 영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오라 했으면서, 정작 그 자신은 연락을 끊어 버렸다.

꼭 자신을 찾지 말라는 것처럼.

“찾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아니, 보고보다도 우선해야 할 게 있어.”

“무엇입니까?”

“미렌 우드가 황제 폐하의 눈에 띄지 않게 하도록.”

시립한 채 있던 로이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도…… 미렌 우드 님을 찾고 계십니까?”

이올라오스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아가 놀라 물었다.

“어째섭니까? 그분은 그저 평민이시잖습니까.”

“폐하의 심중은 나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어.”

“그럼 단장께서 그분을 폐하의 눈에 띄게 하지 말라는 이유가 뭡니까?”

“심중은 알 수 없어도 예상은 할 수 있지. 로이아 테넷 경, 아직도 모르겠나?”

그의 면면 위로 의미 모를 웃음이 걸렸다. 어쩌면 그것은 자조에 가까웠다.

“현재 폐하라면, 미렌 우드를 손에 쥐는 순간…….”

완전히 망가트려 버릴 테니까.

***

“우웨엑!”

시끄러운 구역질 소리에 미렌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뻗었다. 멀미로 고생하고 있는 헤겔의 등을 두드려 주기 위해서였다.

“이동 마법이 몇 번짼데 아직도 멀미를 해요?”

“익숙…… 우욱, 익숙해질 수 있었으면 벌써 익숙해졌겠지.”

미렌이 몇 번 등을 두드려 주자 헤겔도 겨우 굽었던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몇 달 사이 꽤나 메마른 그의 볼이 움푹 패어 있었다. 미렌이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산속 생활이 많이 힘드십니까?”

“힘들긴, 뭐가.”

“살이 많이 빠졌잖아요. 먹는 양도 줄었고.”

“너 내 먹는 양도 체크했냐? 정말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헤겔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미렌은 고개를 내저으며 됐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피곤해서 그래.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

“그럼 물건은 제가 나눠 주겠습니다. 헤겔 씨는 이만 들어가서 쉬어요.”

“어떻게 그래? 이거 가져다주면 다들 좋아할 텐데. 그 영광을 모두 네게 돌릴 순 없지.”

소금을 비롯해 각종 조미료가 뚝 떨어졌던 게 어제였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오늘 아침까지 아무 간도 안 한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헤겔은 나눠 주는 것까지만 함께하겠다며 미렌을 재촉했다. 짐을 챙긴 그가 미렌보다도 먼저 걸음을 옮기자 그녀도 결국 더 타박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프레니티 영지와 연결된 이곳 산속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험해졌다. 미렌과 헤겔이 서둘러 돌아가는데, 저 멀리 누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누나!”

쪼르륵 달려온 그렌이 미렌의 품에 폭 안겼다. 허리를 끌어안는 그렌의 힘이 꽤 강해져 미렌은 낮게 웃었다.

“그렌, 키가 큰 것 같은데?”

“응? 몰라. 근데 무릎이 많이 아팠어.”

“곧 누나보다 더 커지겠다.”

“난 헤겔 형보다 더 커질 거야!”

그렌이 헤겔을 올려다보며 귀엽게 제 허리를 짚었다. 헤겔은 그런 그렌을 바라보더니, 아이의 머리를 엉망으로 흩트렸다.

“한참은 걸릴걸.”

“아닐걸요! 제가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커요!”

“흐음, 네 누나의 키를 보면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눈을 동그랗게 뜬 그렌이 미렌을 바라봤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헤겔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런 말을 왜 해요?”

“맞잖아, 키 작은 거.”

“평균보다 아주 조금 작은 거라고요!”

“아니야, 너 꽤 작아. 내 가슴팍에도…….”

헤겔이 미렌의 머리와 제 가슴팍의 높이를 비교할 때였다.

그렌이 갑작스레 팍, 하고 제 누나의 등을 밀었다. 그녀는 넘어지듯 헤겔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윽…….”

“누나, 미워!”

“내가 왜 미워……?”

“난 키 크고 싶단 말이야! 헤겔 형처럼!”

순식간에 억울해진 미렌이 그렌을 나무라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헤겔이 미렌의 허리를 잡아 주며 농담하듯 말했다.

“형처럼 크려면 마법을 잘하면 돼.”

“정말요? 마법사들은 다 키가 커요?”

“당연하지. 원래 마법사들은 다 멋있어.”

“그치만 멋있는 건 기사들이 더 멋있는데…….”

“뭐?!”

헤겔이 눈을 부라리며 그렌을 내려다봤다. 그렌은 헤겔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꿋꿋하게 모두 해냈다.

“기사들은 멋있는 갑옷도 입고, 허리에 검도 차고…….”

“마법사들도 멋있는 로브 입고 허리에 지팡이를 차잖아!”

“로브는 안 멋있는걸요?”

“로브가 왜 안 멋있……!”

“헤겔 씨, 그만해요. 취향 따라 다를 수도 있죠.”

보다 못한 미렌이 헤겔을 말리자 그가 심술이 잔뜩 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마저 팩 돌리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삐진 모양이었다.

그렌과 미렌은 동시에 눈을 마주했다. 헤겔이 삐지면 생각보다 오래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렌도 이 부분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렌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로브는 음침해 보인단 말예요.”

“그건 그 마법사가 못생겨서 그래. 형처럼 잘생기면 잘 어울려.”

“아닌데. 기사들은 다 멋있단 말이에요. 저는 그럼 갑옷 입을래요!”

“너…… 이동 마법 배우고 싶다며?”

헤겔이 안달을 내며 그렌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심지어 오늘은 그를 위해 책까지 사 온 참인데, 이대로 가다간 한낱 쓰레기가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싫어요. 형처럼 키만 크고, 마법사는 안 될래요. 로브 입기 싫어요!”

“로브가 왜! 저기 봐, 저 마법사도 로브 입었는데 괜찮잖아!”

“어디요, 어디?”

그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헤겔이 가리킨 곳에는 정말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있었다.

다만 그 마법사의 후드는 벗겨진 채였다. 미렌과 그렌이 그쪽을 바라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주니이임!”

“……내가 잘못 들었나? 미렌, 혹시 너한테도 들렸어?”

“저도…… 들은 것 같은데요.”

“탑주니임, 왜 저 버리고 가요오오! 흐어엉!”

연이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헤겔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는 저도 모르게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마법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외침은 더욱 선명히 들렸다. 또한 후드를 벗은 덕에 얼굴도 훤히 보였다.

그는 아무래도 헤겔을 찾은 모양이었다. 헤겔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콧물을 훌쩍이며 외쳤다.

“탑주님, 또 저 버리고 가며언! 이동 마법으로 마법사단을 전부 여기로 이동시킬 거예요!”

맹랑하게 소리친 그는 성큼성큼 헤겔을 향해 다가왔다. 곁에 있던 미렌도 그를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산속에서 꼭꼭 숨어 있던 헤겔과 미렌을 단번에 찾아낸 이.

이동과 탐색 마법에 누구보다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내.

리케이아 헤르메스. 리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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