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두 포로로 데려간다. 반항하는 놈들은 죽여도 좋다!”
비가 내리며 불이 일단락되자 다시 들이닥친 건 불을 지른 기사들이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온 기사들이 초소의 잔해들을 짓밟으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하기 시작했다.
천막 아래서 겨우 비를 피하고 숨을 돌리고 있던 사람들이 겁에 질렸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뒤돌아 숲속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아직도 가족들을 찾기 위해 남은 이들이었다. 시체를 확인한 몇몇은 허망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테룬의 병사들은 마을 사람들을 가축처럼 다뤘다. 몽둥이로 내려치는 그 끔찍한 광경에 주먹을 쥔 헤겔이 앞으로 나서려 했을 때였다.
“헤겔 씨.”
그의 손목을 잡은 건 미렌이었다. 헤겔이 뒤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저어 왔다.
결국 헤겔은 이를 악문 채 뒤돌아섰다. 지금은 나무와 비가 이 자리를 교묘하게 가려 주고 있었지만, 아마 저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치는 건 당장일 것이다.
그렌의 손을 잡은 미렌은 헤겔과 함께 사람들이 도망친 길을 따라 달렸다.
다만 어린 그렌은 얼마 가지 않아 어른의 속도를 따라가는 걸 버거워했다. 동생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미렌이 초조하게 뒤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렌, 숨이 차? 누나가 업어 줄까?”
“으응, 아니. 괜찮…… 으앗!”
겨우 달리던 그렌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헤겔이 아이를 품에 안은 것이다.
다만 그렌은 여덟 살 아이라기엔 키가 큰 데다 제법 무거운 편이었다. 미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헤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제가 업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네 동생이 물건이야? 달라고 하게. 그리고 앞이나 봐.”
“앞은 왜, 앗!”
중심을 잃은 미렌과 달리 헤겔은 발아래에 있던 나무뿌리를 가볍게 넘었다. 이미 미렌에게는 덫으로 인해 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앞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넌 너부터 챙겨.”
“누나, 많이 아파 보여.”
“누나가? 전혀 아닌데.”
그렌도 헤겔의 품에 안기자 그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안정적인 자세로 미렌을 바라봤다. 동생과 눈이 마주친 미렌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뒤로 미렌은 절뚝이면서도 쉬지 않고 걸음을 움직였다. 헤겔 또한 묵묵히 그렌을 안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 저 멀리 커다란 동굴 속으로 마을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렌! 다친 곳은 없니? 아이고 그렌, 이렇게 어린 애가…….”
동굴에 있던 사람들 중 잡화점 아주머니께서 달려 나와 헤겔로부터 그렌을 받아 들었다. 바깥에 비가 많이 내리는 탓에 모두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여분의 담요를 받은 미렌이 먼저 그것을 그렌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어젯밤까지 열이 올랐던 아이라 체온이 떨어지게 두어선 안 되었다.
그 뒤로도 미렌은 뜨겁게 데운 물을 그렌에게 쥐여 주며 살뜰히 동생을 챙겼다. 자신 또한 온몸이 젖어 있다는 건 이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헤겔이 나섰다. 그가 어느새 잠들어 버린 그렌을 토닥여 주고 있던 미렌의 손목을 붙잡았다.
“얼굴이 말이 아니야.”
“제가요?”
“그래. 입술이 파랗게 질렸잖아. 저 불쪽으로 가.”
저 멀리 사람들이 어렵게 피운 모닥불이 있었다. 따뜻한 불과 잠든 그렌을 살피던 미렌은 결국 헤겔의 떠밀림에 의해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부터 비틀거리던 미렌이 결국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를 주시하던 헤겔이 빠르게 대처해 겨우 안아 들었다.
미렌을 품에 안은 헤겔은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였다.
눈을 내리자 미렌의 발목에 대강 처치해 두었던 붕대가 엉망이 되어 있는 게 보였다. 헤겔이 입술을 짓씹었다.
헤겔은 순간 고민했다. 이대로 그녀를 데리고 이동 마법을 사용해 밖에 나갔다 올지. 국경에서 꽤 벗어난 터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기엔 그렌이 걸렸다. 지쳐 잠이 들어 버린 어린아이를 가족들도 없는 곳에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일단 헤겔은 그렌의 옆에 미렌을 눕혀 힐링 마법을 시전했다. 아니, 시전하려 했다.
쿡쿡. 누군가 그의 팔을 건드렸다.
“마법사 오빠.”
헤겔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오늘 아침 그가 데리고 나갔다 왔던 아이가 있었다. 의원에게 데려가자마자 두 시간 내로 열이 내린 덕분에 헤겔은 곧장 프레니티로 돌아왔다.
그리고 발견한 게 불타고 있는 초소였다. 다행히 아이의 어머니는 미리 피신을 한 덕분에 아이는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언니 아파요?”
“……어, 조금.”
“그럼 이거 줄게요.”
아이가 품속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무언가를 내밀어 왔다. 헤겔이 눈을 내려 그것을 살폈다.
그건 아이가 밖에서 받아 온 약이었다. 기껏해야 산에서 긴급히 구해 온 약초와는 달랐다.
아이가 생글생글 웃었다.
“엄마가 주래요. 이제 저는 필요 없대요!”
그 말에 헤겔이 고개를 들어 아이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엔 중년 여성이 일어서 헤겔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다시 눈을 내린 헤겔은 아이를 바라봤다. 그는 그 약을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다.”
“언니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요! 그렌 오빠도요.”
“그럴 거야.”
아이가 돌아간 뒤 헤겔은 미렌의 고개를 들어 제 허벅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그녀가 약을 넘기기 쉽도록 목 아래를 단단히 받쳤다.
이런 열악한 곳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귀중한 약이 미렌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헤겔은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오전에 아이를 구하겠다고 자리를 비웠던 자신을 뼛속 깊이 후회했다. 미렌이 하는 말에 휘둘려 저도 모르게 멍청한 선택을 해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도와준 아이 덕분에 약을 구했다. 아마 구하지 못했다면 이 빗속을 뚫고 연속된 이동 마법을 쓰느라 어쩌면 헤겔마저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그 기묘한 인과에 헤겔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살려 보낸 기사가 초소에 불을 질렀다. 물론 그건 다친 미렌을 살리기 위해서였으나, 헤겔의 현명한 선택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살려 낸 아이가 약을 가져왔다. 미렌과 그녀의 가족들을 어설프게 따라 하다 해 버린 헤겔의 멍청한 선택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도저히, 어떤 선택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미렌.”
헤겔은 제 다리를 베고 누운 그녀를 오랫동안 내려다봤다. 그러다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실 잘 모르겠어.”
“…….”
“평생 동안 나는 내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거든.”
제 선택으로 인해 그녀는 부모를 잃었다. 다른 선택은 어느 부모의 자식을 살렸다.
미렌을 내려다보던 헤겔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뚝, 흘러내렸다.
“그냥…… 그냥, 다시 눈뜨면 잘했다고, 그렇게만 말해 줘.”
나는 그거면 돼.
헤겔은 웃으며 제 눈가를 가렸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해지는 기분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
그로부터 석 달 뒤.
“미렌, 이건 이쪽으로?”
“좋아요. 확실히 마법이 있으니까 편하네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빠져나온 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지금의 거처였다. 교묘하게 위장되어 모르고 왔다간 지나쳐 버리기 십상인 위치였다.
헤겔은 이곳에서 사람들을 위해 간단한 오두막들을 만들었다. 그는 제 힘을 쓰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석 달이 흐르자 사람들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웃음을 되찾았다. 테룬의 병사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그토록 편안했다.
탈출에 대한 열망도 희미해졌다. 전쟁이 가속화된 지금, 테룬 공국 출신인 프레니티 마을 사람들이 갈 곳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렌, 이번엔 뭘 가져다줄까?”
“나는 그럼…… 새총! 나도 사냥하러 갈래!”
그렌의 해맑은 대답에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미렌과 헤겔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밖에 나갔다 오는 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잠시만 나갔다 오는 일정에 미렌이 그렌을 위해 선물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물품을 위해 빈 가방을 챙긴 미렌이 밖으로 나갔다. 여느 평민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튜닉을 입은 헤겔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갈까?”
“어서 가요.”
미렌은 자연스럽게 헤겔을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결국 그것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헤겔의 품에 안긴 미렌은 이번에도 눈가가 가려졌다. 다정한 손길에 미렌이 푸스스 웃었다.
“아직도 멀미할까 봐 그러세요? 이게 벌써 몇 번째인데요.”
“……가리지 마?”
“아뇨, 그냥 두세요. 저도 이제 이게 익숙해진 것 같네요.”
그 대답에 헤겔이 픽 웃는 소리가 미렌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그녀는 헤겔의 손에 시야가 가려진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손이 사라지며 한순간에 빛이 들어왔다. 미렌이 살풋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을 때였다.
“시장부터 가야겠죠?”
“그래야지. 목록을 보니 이번엔 다들 필요한 게 많던데.”
고개를 끄덕인 미렌이 먼저 앞서 나갔다. 그러다 그녀는 전에 왔을 때보다 줄어든 상인의 숫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바닥에 앉아 있던 노상 주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늘은 장날인데 상인들이 왜 이렇게 없어요?”
“전쟁이 한창이니까 그렇지, 뭐! 여기까지 오는 것도 얼마나 위험한데. 다들 돈 벌겠다고 목숨 걸고 오는 거야.”
“그렇구나.”
프레니티 영지 근처 숲속에서 지내다 보면 바깥의 상황은 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당장 옆 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숲속은 대조적으로 고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법으로 나오지 않으면 소식이 끊기는 것도 그러했다. 미렌이 문득 전쟁의 상황에 대해 물으려 했을 때였다.
상인이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지. 데저트 영지는 이미 끝장났다더만.”
“정말요?”
“그래! 완전히 초토화가 돼 버렸어. 황제가 직접 나서 전쟁을 이끌었다던데.”
황제.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미렌이 입을 다물었다. 상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연이어 말했다.
“곧 프레니티 영지를 소탕하러 간다는 모양이야. 거기 마을 사람들도 고생깨나 했다던데, 다행이지.”
“……프레니티 영지를요……. 다행이네요.”
“다행인가?”
상인이 히쭉 웃었다. 어깨를 으쓱인 그가 남들이 더럽히고 간 제 물건들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그 미친 황제가 직접 소탕하러 간다는데, 그걸 다행이라 할 수 있나.”
라이언 토르 워로덴.
끝내는 미쳐 버린 비운의 황제.
이제는 목적지조차 잃어버린 그가, 프레니티를 향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