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99)화 (99/133)

선택엔 결과가 따르기에

막 정오가 되어 미렌은 간단한 수통을 비롯해 가방을 챙겼다. 오늘 밤에 사용할 장작을 가져오려면 부지런히 산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녀 외에도 체력이 좋은 사람들이 일행에 포함됐다. 가장 체구가 큰 미렌의 아버지는 선두에 서기로 했다.

“우리는 장작을 패고 그쪽은 사냥을 하도록 합세. 그리고 나중에 모입시다.”

산속에 들어온 아버지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미렌은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패거나 잔가지를 주우러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흩어지기 전,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저, 저게 뭐야!”

“연기……? 저긴 초소가 있는 방향이잖나!”

모두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돌아갔다. 누군가의 외침대로 초소가 있는 방향에서부터 연기가 나고 있었다.

단순히 불을 피우느라 난 연기라기엔 그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미렌의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잔 말을 꺼내셨다.

“그, 그래. 어서 돌아갑세. 이럴 때가 아니야.”

그들의 모든 가족들이 초소에 있었다. 함께 나온 일행 중 몇 명은 가져온 짐을 내던지고 숫제 달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마침내 사내들이 초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여보……!”

“세이렌, 세이렌! 당신 거기 있소!”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제 가족을 찾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미렌이 황망한 얼굴로 불타는 초소를 바라봤다.

어머니와 그렌 또한 저곳에 있었다. 곁에 서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서둘러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미렌, 너는 여기 있어.”

“아빠, 저도 갈게요. 저도……!”

“가만히 있어!”

덜덜 떠는 미렌의 어깨를 아버지가 붙잡았다. 그는 처음 보는 화난 얼굴로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너는 절대, 절대 따라와선 안 된다. 알겠어?!”

“아빠…….”

“네 엄마는 내가 구해 오마. 그렌도. 그러니까…… 응?”

아버지가 간절한 눈으로 호소했다. 미렌은 두려움에 울먹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대답을 들은 아버지께선 그대로 불이 난 초소를 향해 달려가셨다. 어젯밤 그렌이 잠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미렌은 멍한 눈으로 그 모든 모습을 바라봤다.

불이 난 막사, 주변을 감싼 자욱한 연기, 화상을 입거나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는 이들…….

그 모든 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 불을 꺼야…….”

미렌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뒤돌았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일단 저 멀리 있는 양동이에 근처 연못에서 물이라도 떠 올 심산이었다.

그런데 문득 뒤돌아선 미렌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그녀도 아는 이였다.

오늘 새벽, 산속에서 만났던 중장갑을 입고 있던 기사.

저 멀리 그 기사를 비롯해 대여섯 명의 처음 보는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불이 타는 초소와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악마가 따로 없었다. 미렌이 주먹을 꾹 쥔 채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눈에 새겼다.

반드시 돌려주고 말겠다.

반드시, 이 행동의 대가를 돌려주겠노라고.

그녀는 다짐했다. 미렌은 물을 뜨러 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며 그들의 얼굴을 몇 번이고 바라봤다.

***

아무리 물을 퍼다 뿌려도 초소에 붙은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붙인 불이니 더더욱 기세가 강했다.

그래도 살아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잿더미 위에 앉아 제 가족들을 살피는 모습들이 꽤 보였다.

다만 미렌의 아버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어머니와 그렌도 마찬가지였다.

미렌은 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양동이에 물을 담아 나를 뿐이었다.

“미렌! 네 아버지는? 아버진 어딜 가셨니?”

“어머니와 그렌을 데리러요. 아저씨, 잠시만요.”

불이 꺼지지 않은 초소를 향해 미렌이 물을 부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다시 물을 뜨러 향했다.

이 행동을 반복한 지가 벌써 두 시간째였다. 보다 못한 아저씨께서 그런 미렌을 말렸다.

“미렌, 이제 저 불을 꺼도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만하렴.”

“의미가 없다니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직 나오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왜 의미가 없어요?”

“미렌……!”

“비키세요.”

미렌은 자신을 말리는 옆집 아저씨를 그대로 지나쳐 다시 걸어갔다.

물의 무게를 가득 머금은 양동이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그래도 미렌은 주저하지 않고 꿋꿋이 그것을 퍼다 날랐다.

치이익-.

물을 맞은 초소의 일부가 불이 꺼지는 듯 잠시 사그라들었다가 이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미렌의 분홍빛 눈동자로 그 붉은 불길이 보였다.

채앵, 챙, 데구루루…….

그러다 결국 양동이를 놓쳤다. 찌그러진 양동이가 바닥을 나뒹굴다 불이 난 초소를 향해 굴러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미렌이 저도 모르게 양동이를 줍기 위해 다가갔다. 꼭 불에 홀린 이처럼 정신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때 누군가 한 팔로 미렌의 허리를 껴안아 왔다. 눈을 내리자 희고 긴 사내의 손가락이 보였다.

헤겔이었다.

“그만하자.”

“…….”

“이제 그만해…….”

간절한 속삭임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욱, 으욱…….”

아무리 물을 뿌려도 초소의 불은 꺼지긴커녕 더 드세게 타오르기만 했다.

지금도 그렇다.

제 어미와 아비, 그리고 동생을 삼킨 저 화마는 도저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커져 갔다. 그럴수록 초소에 불을 지르던 악마 같은 기사들의 모습 또한 함께 떠올랐다.

신물이 올라왔다.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가족을 구하러 가는 게 무서워서, 그래서.

“헤겔 씨.”

“…….”

“이제 어쩌면 좋아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툭. 투욱.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흙바닥이 점점이 물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미렌의 발치에서 그치지 않고 점차 퍼져 나갔다. 미렌과 헤겔이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솨아아- 소리와 함께 빗줄기가 쏟아졌다.

동시에 치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초소의 불이 꺼져 갔다. 미렌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꺼지지 않던 불이 이제야 꺼지고 있었다. 그 불씨가 모두 꺼지기 전에 그녀가 초소를 향해 달려갔다.

미처 헤겔이 붙잡을 새도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는 그녀의 뒤를 헤겔이 따라갔다.

“아빠. 아빠, 어디 있어요? 엄마?”

그녀는 난장판이 된 내부를 맨손으로 헤집고 다녔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그녀의 손에 수많은 화상 자국을 남겼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마…….”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듯 간절한 부름이 이어졌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섞인 이곳에서 어머니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새까맣게 타 버린 잿더미 속에 주저앉아 등을 둥글게 말았다. 미렌의 옷과 손이 엉망으로 변했다.

제 머리를 감싼 그녀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미렌.”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헤겔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뒤에 무릎을 꿇은 헤겔이 미렌의 등을 감싸 안았다.

꺽, 꺽.

숨이 넘어갈 듯 오열하는 그녀를 두고 헤겔은 그저 그 등을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은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해.”

“…….”

“미안하다…….”

그 기사는 헤겔이 죽이지 못하고 놓친 사내였다. 미렌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제 가족들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가슴을 부여잡은 미렌이 소리 없이 울었다. 헤겔은 아무 말 없이 미렌을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

마침내 그녀가 밖으로 나온 건 몇 시간여가 흐른 뒤였다. 바깥엔 아직도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미렌은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앞을 걸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도.

헤겔은 그녀의 어깨 위로 제 겉옷을 벗어 둘러 주며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미렌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저 멀리 살아남은 사람들이 겨우 비를 피할 곳을 만들어 둔 게 보였다. 그들이 미렌과 헤겔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불렀다.

“이쪽으로 와요, 어서!”

“미렌, 괜찮니? 아이고…….”

몇몇 어머니들께선 뜨겁게 데운 물을 미렌의 손에 강제로 들려 주었다. 미렌의 입가가 파랗게 질려 있는 탓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저 절망하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다시 한번 발버둥 치고 있었다.

“맞다, 미렌. 네 동생 그렌 말인데…….”

안쓰러운 눈으로 미렌을 살피던 아주머니께서 문득 입을 여셨다.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렌이 동생이란 한마디에 겨우 눈을 들었다.

그때였다.

“누나!”

그렌이었다.

아이는 아침에 봤던 모습 그대로 달려와 미렌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렌은 이미 계속해서 누나를 찾고 있었던 듯 울먹이며 미렌을 불렀다.

“그렌이 네가 아버지와 산에 갔다는 소식에 몰래 널 따라갔다지 뭐니.”

“누나, 괜찮아……?”

미렌은 멍하니 제 동생을 바라봤다. 누나의 모습이 심상치 않자 불안해진 그렌이 재촉하듯 질문을 던졌다.

“누나, 엄마는? 아빠랑 엄마는 어디 있어?”

평소라면 엄마와 아빠의 행방을 알려 줬을 누나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결국 그렌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제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했다.

누나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다 제 동생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누나가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그렌의 뺨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상해. 여긴 처마가 있는데.

그렌은 제게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빠랑……. 멀리 갔어.”

“왜? 우리는? 우리는 두고 갔어?”

“응……. 우리는 못 가.”

“내가 말을 안 들어서 그래? 그래서 누나랑 나만 남겨 두고 갔어?”

그렌이 섭섭하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결국 미렌은 더는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그렌을 꼭 껴안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엄마랑, 아빠가…… 그렌을 많이 사랑한대.”

“나도 사랑하는데. 그럼 나도 데려가지.”

“그런데 그만큼 누나도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렌을 남겨 둔 거야.”

“누나, 무슨 말이야?”

고마워. 고마워, 그렌.

네가 있어서 누나는 너무 다행이야.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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