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선택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뭐가요?”
미렌은 어둠 속에서 제 발 아래를 잘 살피며 걸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까 싶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약초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미렌을 바라보던 헤겔은 심통 맞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웬 빛무리 하나가 둥둥 떠다녔다.
그 덕분에 미렌의 탐색이 더 수월해졌다. 미렌이 헤겔을 힐끗 바라봤을 때였다.
“네가 마을 사람들까지 구하겠다고 여기 남은 것도, 지금 약초를 더 찾겠다고 계속 걸어 다니는 것도.”
미렌은 이미 열을 내릴 수 있는 약초를 찾은 터였다. 그녀는 이 산에 익숙한 약초꾼이었으니 그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열이 오른 아이들의 수가 어림잡아도 꽤 많아 보여 물량이 부족했다.
결국 미렌은 조금만 더 약초를 찾아보겠다며 깊은 산속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남들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은 좋아. 그런데 그건 내 안위를 지킨 뒤에 해도 되는 거잖아? 안 그러냐?”
“이해할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문득 미렌이 허리를 굽혀 주저앉았다. 그녀는 말없이 흙 묻은 손으로 조심스레 약초를 채취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어릴 때는 이렇게 사는 게 멍청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뭐?”
밤에는 아무리 빛이 있어도 흙에 파묻힌 돌까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흙을 파다 손이 뾰족한 돌에 부딪치며 생채기가 났지만 묵묵히 채취를 해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 농사를 도와주다 병이 나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걸 두고 바보 같다며 엉엉 울었죠.
미렌의 아버지는 투박한 생김새와 달리 정이 많으셨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나이 든 노인들이 홀로 농사짓는 걸 지켜보기만 하는 게 영 힘들었더란다.
힘이 남으면 매번 주변 밭의 농사를 지어 주던 그는 결국 병이 나 쓰러졌다. 한여름에 쉬지 않고 농사를 짓는 건 아무리 젊은 사내여도 힘든 일이었다.
그때 미렌이 엉엉 울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바보야!’
‘미, 미렌……. 아빠한테 바보라니.’
미렌은 아빠가 안겨 주는 장난감도 싫다며 떼를 썼다. 여름엔 밖에 나가지 말라면서.
사실 그녀는 그때 어머니가 제 편을 들어 주실 줄 알았다. 이건 분명 아빠가 바보 같은 짓을 한 거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편을 드셨다.
‘싫어. 아빠가 다른 사람들 도와주는 거 싫어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떼를 쓰는 미렌을, 그녀의 어머니는 꼭 안아 주셨다. 그러며 속삭였다.
‘네 아버지가 바보 같지?’
‘……훌쩍.’
‘엄마는 그래도 네 아버지가 좋단다. 바보여서 더 좋아.’
어린 미렌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해, 아버지가 처음으로 시작했던 복숭아 농사는 완전히 망했다. 팔 수 있는 수준의 복숭아라곤 고작해야 서너 개가 끝이었다.
농사야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당장 그 한 해를 어떻게 버틸지가 문제였다. 미렌은 밤중에 방에서 내려왔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 걸 우연히 목격했었다.
‘여보, 우리야 굶으면 되지만 미렌이랑 이제 막 태어난 그렌은요? 이걸 어쩌면 좋아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게. 응?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마오.’
추운 겨울, 아버지는 그대로 집을 떠나셨다. 그가 돌아온 건 서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곱은 손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품에는 올겨울을 버티고도 남을 감자와 음식들이 있었다. 어머니와 미렌이 놀라 아버지께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게 다 어디서 났어요?’
‘아, 이건 옆집에서 줬지. 그 집 감자가 워낙 맛있잖아. 그리고 이건…….’
‘그게 아니라, 올해는 다 흉년이었잖아요.’
‘으음, 하지만 필요하면 다시 오라던걸. 얼마든지 나눠 줄 수 있다고.’
우리 집 빼곤 다 농사가 잘됐나?
아버지는 바보같이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에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윽고 어머니는 미렌을 안아 올리며 속삭였다.
‘미렌도 바보 아빠가 좋지?’
‘응!’
아빠, 너무 좋아요!
꺄르르 웃으며 소리친 미렌이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제 바보 같은 아버지를 사랑했다.
“물론 매번 이렇게 보답받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옆 영지 잡화점에서 사기도 얼마나 당했는데요.”
“……그래도 좋아?”
“좋아요.”
미렌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침내 뿌리 하나 상하지 않고 약초를 채취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아빠잖아요. 우리 엄마고요.”
“그래서 그렌이 그렇게 귀엽나.”
그 말에 미렌이 짧게 웃었다.
“저랑 달리요?”
“어. 내 동생 삼고 싶어.”
그렌은 유난히 헤겔을 잘 따랐다. 아마 그가 보여 준 마법들이 아이의 눈엔 더욱 대단해 보였을 터다.
“내 동생도 그랬어.”
“헤겔 씨 동생도요?”
“자기도 몸이 나으면 마법이 배우고 싶댔어. 그래서 무슨 마법이 배우고 싶냐고 물었거든.”
“뭘 배우고 싶댔어요?”
동생을 떠올린 헤겔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동 마법. 내가 아르테미스를 찾겠다고 한참 세상을 돌아다닐 때였어. 다 나으면 날 따라다니고 싶다고 그랬지.”
“헤겔 씨 동생이었으면, 분명 재능이 있었겠네요.”
“아마 나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을 거야.”
그의 동생은 헤겔이 이동 마법에 약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병환을 위해 그가 이동 마법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그 착한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이동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내 동생이 지금 날 보면, 아마 아주 화를 내겠지. 믿기지 않겠지만 나랑은 다르게 착한 아이였어.”
“헤겔 씨가 어때서요?”
“……솔직히 내가 착하진 않잖아?”
그 말에 미렌이 짧게 웃었다. 솔직하게 자신이 착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그가 어쩐지 귀여웠기 때문이다.
“헤겔 씨가 왜 안 착해요?”
“리키가 그 말을 들으면 아주 정색할 텐데.”
“결국엔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냉정하게 굴었던 거잖아요.”
“뭐?”
“헤겔 씨는 한 번이라도, 오로지 본인을 위해서 열심히 움직여 본 적 있어요?”
헤겔은 대답하지 못했다.
괜한 반발심이 들어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마법을 배운 건 가난한 집을 구하고 싶어서였고, 아르테미스를 찾기 위해 남들에게 혹독하게 군 건 아픈 동생을 위해서였다.
문득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제 자신을 위해 살아 본 적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거봐요, 대답 못 하겠죠?”
“……그래도 난 바보처럼 살진 못해.”
결국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헤겔이 뒤늦게 투덜거렸다. 그 반응에 미렌이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알아요. 그렇게 살라는 말도 아니었고요.”
“나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겠다. 그러니까 그냥 멍청한 건 너로 하자.”
“……그렇게 대놓고 멍청하다 하깁니까?”
“나보다 똑똑하진 않잖아.”
헤겔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어렸을 때부터 영재, 천재 소리나 듣고 자란 헤겔보다 똑똑하긴 힘들었다. 미렌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헤겔 씨보단 내가 낫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
마침내 미렌과 헤겔의 약초 찾기도 끝이 보였다. 이 정도면 당장 급한 아이들은 물론 응급 약초도 앞으로 한동안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헤겔과 자신이 생각보다 멀리 나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부터 바쁘게 돌아가도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하긴 힘들어 보였다. 더군다나 거긴 국경 근처라 헤겔이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어서 돌아가자며 그를 재촉하려 했을 때였다.
“……으윽!”
무언가에 걸린 미렌이 넘어졌다. 그녀가 자신이 바닥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미렌의 주위로 숨겨져 있던 올가미 덫이 드러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안에 담긴 미렌 또한 하늘로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놀란 헤겔이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상황은 심각했다.
누군가 설치해 둔 덫이었다.
심지어 그 덫은 사람을 잡는 게 아니라 짐승용인 듯 그녀의 발목에는 날카로운 클립마저 물려 있었다.
“미렌!”
“헤겔 씨, 윽…… 쉿, 조용히 해요. 사람들이 와요.”
“사람이라니, 누가…….”
부스럭.
고개를 돌리던 헤겔은 저 수풀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을 부딪친 헤겔이 이 주변을 떠다니던 빛무리를 꺼트렸다.
그와 동시에 헤겔은 숨을 죽였다. 그러자 꽤 멀다고 느껴졌던 소음들이 제법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헤겔이 빠르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한밤중의 산속은 헤겔 하나쯤은 거뜬히 숨겨 냈다.
“여기서 빛이 났었는데. 자네, 못 봤나?”
“나도 봤네. 뭐야. 누가 덫에 걸렸는데?”
모습을 드러낸 건 무거운 중장갑을 입은 채 검을 빼 든 기사 두 명이었다. 어깨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테룬 공국 출신의 기사들이었다.
아마도 영주 성에서 명령을 받고 순찰을 돌던 기사들일 터다. 다만 한낱 병사도 아니고 기사가 직접 순찰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동안 헤겔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기사 둘을 죽이고 미렌을 구해 내는 건 쉬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병사도 아니고 기사가 둘이나 죽는다면 분명 본대에서 사람을 보내 이 근처를 조사할 것이다. 그럼 겨우 구한 임시 초소가 들키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현명한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여자잖아?”
결국 기사들은 덫에 걸린 미렌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미 검을 빼고 있던 그들이 미렌이 있는 올가미를 확 잡아당겼다.
“아으윽!”
그 탓에 이미 발목을 물고 있던 클립이 거세게 흔들렸다. 미렌은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를 들은 순간.
헤겔은 더 참지 못했다. 어두운 산속에서 빛이 폭발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