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선택
“그러니까…… 헤겔 씨 말은 여기서 석 달만 버티면 된다는 건가?”
“아니요, 석 달에서 길게는 반년까지도 보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막 해가 저물었을 때였다.
어린아이들은 임시로 마련한 초소 안에서 잠이 들었고, 이제는 장년층만이 모여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반년…… 반년이라.”
“제국에서도 작전상 당장 프레니티 영지를 구하러 올 수는 없다더군요. 그래서 아마 그 정도는 버텨야 할 겁니다.”
헤겔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 답지 않게 말을 늘였다.
사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 이들에게 길게는 반년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게 그로서도 쉽지는 않았다. 그는 내심 어느 정도의 반발을 겪을 각오까지 한 터였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외였다.
“반년이라니, 그것 참 다행이구만!”
“아휴, 그러니까요. 우린 이대로 버려지는 줄로만 알고…….”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아버지들은 호기롭게 반년이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며 외쳤다. 어머니들 중 몇몇은 다행이라며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
어쩌면 화를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헤겔이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마법사님, 고마워요. 귀한 사람이 이런 곳까지 와 주고. 응?”
“그러게요. 저 수도 근처에서 왔다며?”
어머니들 몇몇이 헤겔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헤겔은 당황해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들은 오래도록 헤겔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게 멈춘 건 미렌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우리 딸이 데려온 사람이라니까? 어휴, 목숨을 걸고 밖에 나가서 이렇게 든든하게, 응?”
“우드네는 딸 한번 정말 잘 뒀네.”
이젠 헤겔의 칭송이 아니라 미렌을 칭찬하는 사람들마저 늘어났다. 그럴수록 미렌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깨가 하늘 높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미렌이 손을 휘저으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부정했다.
그렇게 한참을 대화하다 겨우 주제가 바뀌자 미렌과 헤겔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가 멀어지며 풀벌레 소리가 잔뜩 들려왔다.
“하…….”
“고생했어요. 다들 좋은 분들이라 그래요.”
“좋은 사람들인 건 알겠다. 다들 희망적이네.”
미렌이 그 말에 잠시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려 둥글게 앉아 대화를 나누시는 부모님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희망적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요?”
“그럼?”
“그냥…… 다들 살아남고 있는 거죠. 남을 탓해 봤자 돌아오는 건 없었으니까요.”
아마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일행에 함께하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히 큰 행운이라는 사실을.
건너 가족은 자식을 잃었고, 그 건너는 부모가 테룬의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그러다 터전까지 잃은 지금, 그들에겐 희망이라곤 전혀 없었다. 산속에서 어떻게든 버티다 테룬 공국의 병사들의 눈에 띄면 끌려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헤겔이 전해 준 소식은 희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이 산속에서 여섯 달이나 살아남는 게 대단히 힘든 일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희망적으로 변했다. 그러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표정을 힘겹게 갈무리했다.
“이올라오스 경과 리키 씨는 잘 도착했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둘이면 아무 문제 없을걸.”
헤겔이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라면 리키가 아니라 헤겔이 가야 했을 자리였다. 다만 이올라오스의 동의 아래 헤겔 대신 리키가 마법사들을 이끌기로 결정됐다.
미렌과 헤겔이 이곳에 오기 바로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른 마탑들도 출발했겠죠?”
“아마도.”
“정말…… 전쟁이네요.”
사실 프레니티 영지민들을 구하기 위해 헤겔과 미렌은 많은 방법을 의논했다.
이동 마법의 귀재인 리키는 전쟁으로 인해 바쁘니 논외로 하고, 다른 마탑까지 생각을 해 봤었다.
그런데 세 마탑 모두 프레니티 영지를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다. 헤겔은 전투에 자신 있는 남쪽 마탑이 전쟁의 전면에 서긴 하겠지만 다른 마탑들 모두 의료부터 물자 이동에 힘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미렌은 헤겔의 말대로 이곳에 돌아와 제 손으로 마을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헤겔이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전쟁인 게 실감이 안 나?”
“아직은 그래요. 이제껏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뭐, 여기도 전쟁터나 다름없지.”
헤겔이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임시로 만들어 둔 초소와 장작더미들, 제대로 씻지 못한 사람들까지. 그의 말대로 이미 프레니티 영지는 전쟁 중이었다.
미렌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여기서 버티려면 먼저 식량을 구해야겠어요.”
“아마 남아 있는 식량으로 일주일까진 괜찮을 거야. 그 뒤부턴…… 생각을 해 봐야지.”
“고기나 과일 같은 재료들은 이 산에서 충당하고, 그 외에 구할 수 없는 필수적인 것들은…….”
헤겔과 미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어머니가 서둘러 달려오셨다.
“미렌!”
말을 멈춘 미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머니께 다가갔다. 가까워지며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 왜 그래요?”
“그렌이, 그렌이 심상치 않아.”
“심상치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열이 올랐어. 그렌뿐만 아니라 아이들 몇몇이 다들 그렇단다.”
놀란 미렌이 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임시 초소로 달려갔다.
식사를 마친 뒤 아이들은 이른 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이동을 하느라 피곤하기도 했고, 어젯밤도 제대로 된 숙소에서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게 분명 잠이 든 걸로 보였던 아이들 몇 명이 끙끙 앓고 있었다. 그중에는 그렌도 있었다.
“내가 먼저 볼게.”
따라온 헤겔이 미렌의 어깨를 잡아 멈추며 자신이 먼저 다가갔다.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는 그렌의 옆이었다.
아이의 숨이 가빴다. 발갛게 오른 뺨과 더불어 이마에서 열이 끓어올랐다.
무릎을 꿇은 그가 짧게 그렌의 몸을 진찰했다. 외에도 몇몇의 아이들을 살폈다.
“심각한 건 아니야. 아마 환경이 바뀌며 열이 오른 모양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먼저 열을 낮춰야 해. 어른이었다면 며칠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아이들이잖아. 열을 버티기 힘들 거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모님들 몇 명이 통탄의 신음을 내뱉었다. 물기 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위급한 상황에 의젓한 척 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병이 난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마음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그중에서 그나마 침착한 이는 미렌의 부모님이셨다. 어머니가 먼저 손을 내저으며 아버지께 말했다.
“여보, 물에 적신 천이 필요해요. 양동이에 물을 담아 와야겠어요.”
“알겠어. 당신은 아이들을 살펴 줘. 이봐, 자네도 같이 가지.”
두 분의 대화에 겨우 정신을 차린 어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에 치달은 몸이었지만 모두가 나서 아이들을 지켜 내기 위해 분주히 오갔다.
바빠진 건 미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오른 그렌을 내려다보더니 초소를 벗어났다.
헤겔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이미 해가 저물 대로 저물어 한밤중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딜 가게?”
“약초를 구해 와야겠어요. 깊은 산중이라 분명 근처에 열을 내릴 약초가 있을 거예요.”
“밤이 늦었어. 해가 뜨고 가도 괜찮잖아!”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가던 미렌의 팔을 헤겔이 서둘러 붙잡았다.
밤의 산은 위험했다. 길을 잃는 것은 물론 어떤 야생 동물이 있는지도 몰랐다.
미렌은 잡힌 제 팔을 내려다보다 읊조렸다.
“저 정도의 고열이면 어린애들은 오래 버티지 못해요.”
“……뭐?”
“해는 여섯 시간이 지나야 뜨겠죠.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요. 그땐 늦으니까.”
“네 동생은 그렇게 어리지 않아. 충분히 버틸 수 있어.”
“헤겔 씨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던 그 아이는요?”
아직 겨우 5살이나 되었을까 싶던 여자아이 또한 열이 올라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헤겔의 품에 안겼던 아이였다.
그 아이를 떠올린 헤겔이 무거운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미렌이 무감각하게 물었다.
“헤겔 씨도 동생이 있었잖아요.”
“…….”
“아이들 모두, 누군가의 동생이고 누군가의 자식이에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며 헤겔의 손을 뿌리쳤다. 미렌이 어둠 속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헤겔은 언젠가의 자신을 떠올렸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아르테미스를 찾아 헤맸던 그는 단 한 번도, 남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건 비단 동생의 문제에서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남보다는 자신이, 남의 가족보다는 제 가족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게 당연했다.
남은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데 자신이 남을 생각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세상을 배웠다.
‘응, 헤겔 군, 이제 출발하면 되겠어!’
‘여보, 사람이 많아졌으니 줄을 서서 가야겠어.’
그런데 미렌의 가족들은 그러지 않았다. 하다못해 어린 그렌마저도 미렌과 헤겔을 비롯해 모든 아이들에게 배가 고프냐고 묻고, 그렇다 대답하면 제 몫의 간식을 나눠 줬다.
제대로 된 부모가 없었던 그는 단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는 방식이었다.
분명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이들 모두, 누군가의 동생이고 누군가의 자식이에요.’
단호하게 제 손을 뿌리치는 그녀의 모습이 그 어떤 사람의 등보다도 단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