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95)화 (95/133)

약속

“미렌?”

“아, 헤겔 씨. 미안해요.”

헤겔과 미렌은 리키의 도움으로 프레니티 영지 부근에 도착했다. 그녀가 잠시 제 이마를 붙잡고 가만히 서 있자 헤겔이 다가왔다.

그가 허리를 숙여 미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때였다. 그녀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니긴.”

헤겔이 쯧, 짧게 혀를 차며 허리를 폈다.

“구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구할 수 있었습니까?”

“힘들긴 하겠지만 노력은 해 볼 수 있었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말처럼 미렌이 마리아를 구하겠다고 결심했다면 헤겔 또한 전적으로 도와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마리아를 위한 일 같지 않았으니까.

“만일 제가 마리아를 구했다면…….”

“구했다면?”

“그 불쌍한 이는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미워할 수는 없었다는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

미렌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끝끝내 서로를 위한 사과는 없었으나 둘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서로가 하고 싶던 말을 이해했다.

마침내 마리아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낸 미렌이 서둘러 한 걸음 내뻗었다. 이제는 제 현실을 마주 봐야 할 때였다.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서 가요.”

“두 분이 날 잊지는 않으셨고?”

“전혀요. 아직도 가끔 헤겔 씨는 잘 지내냐고 물으시는걸요.”

정이 많으신 부모님들은 헤겔이 떠난 뒤에도 그 기다란 사내는 잘 지내냐며 물어 왔다. 그렌도 마찬가지였다.

미렌은 어서 돌아가서 식사라도 하자며 산을 내려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마침내 둘이 함께 산에서 막 내려왔을 때였다.

“……이게 뭐야?”

“…….”

미렌이 황망한 눈으로 제 마을을 둘러봤다.

새까맣게 타 버린 밭. 무너져 내린 집.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을…….

그 모든 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미렌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씩 내뻗다 결국에 달려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그녀의 집이 있었을 자리였다.

그곳엔 이제 오래된 2층집은커녕 새까맣게 타 버린 잔해만이 존재했다.

달려가던 미렌이 제 앞의 잔해를 발견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구르듯 제집이 있던 곳으로 다가간 그녀가 절망적인 눈으로 제 앞을 바라봤다.

“이게, 이게 어떻게…….”

속에 있던 것을 토해 내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미렌이 오열하며 제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엄마. 엄마, 아빠. 그렌……!”

톡톡.

엎드려 울고 있던 미렌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제 뒤를 잠시 바라봤다가 헤겔인 것을 확인하곤 그 손을 밀쳐 냈다.

그 뒤로도 미렌의 눈물은 이어졌다. 헤겔이라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아.”

이상하게도 헤겔이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울컥한 미렌이 화를 내려 했을 때였다.

헤겔이 문득 미렌의 양어깨를 잡고 단번에 일으켰다. 그의 손길을 따라 일어선 미렌은 어쩔 수 없이 제 옆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딸, 다녀왔니?”

“누나아.”

미렌의 부모님이 멋쩍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버지가 곤란한 듯 제 볼을 긁적였다.

네 가족은 그렇게 다 타 버린 집 앞에서 다시금 재회했다.

***

“진짜 너무해요.”

“뭐가?”

“딸이 울고 있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어요?”

잘려 나간 나무 밑동에 걸터앉은 미렌은 어머니가 내준 차를 마시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눈은 이미 퉁퉁 부은 채였다.

“그럼 어떡하니? 이미 엉엉 울고 있는데 달려가서 우리 여기 있다고 해?”

“그러셨어야죠!”

“어이구. 넌 엄마, 엄마 하면서 찾을 때는 언제고 이젠 화를 내니?”

철썩. 어머니가 미렌의 등을 내려쳤다. 매운 손맛에 미렌이 제 등을 슥슥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이미 그 손맛을 알고 있던 아버지는 때리지 말라며 미렌의 편을 들다 어머니께 혼만 났다. 그렌은 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깜빡 낮잠이 든 채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렌의 기억대로 여전하셨다. 그녀가 퉁퉁 부은 눈으로 저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헤겔 군은 왜 데려온 거니? 여기가 이렇게 위험한데.”

“우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죠?”

“볼품없는 마법사긴 합니다만,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헤겔이 싹싹하게 웃으며 말을 해 오자 그녀의 부모님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물론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긴 격전지잖니. 위험한 건 우리 가족이면 충분하지.”

“전 이미 가족이라고 생각하는걸요, 어머님.”

“어머. 당신, 헤겔 군 말하는 것 좀 봐. 우리 딸이랑 결혼하면 정말 좋을 텐데, 그렇죠?”

그 말에 헤겔이 반색했을 때였다. 미렌이 서둘러 어머니의 말을 자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집은 대체 왜 저렇게 된 거예요?”

“누구 짓이겠니. 테룬 공국의 병사들 짓이지.”

“식량 때문에 밭은 건들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우리도 그런 줄 알았단다. 그런데 어젯밤에 갑자기 불을 질렀지 뭐니. 자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난리가 나서 밖으로 뛰쳐나왔지.”

어머니의 말대로 미렌의 가족 모두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피곤해 보였다. 그렌의 뺨에는 아직 검은색 재가 묻어 있기도 했다.

미렌이 그것을 살며시 닦아 주며 입을 열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요?”

“몇몇은 우리처럼 산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몇몇은 영주성에 잡혀갔단다.”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던 터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헤겔과 미렌이 돌아온 것이다.

“일단 오늘 잘 곳도 없어 걱정이란다. 곧 해가 질 텐데…….”

“어젯밤엔 한숨도 못 주무셨어요?”

“그래. 네 아버지도 하루 종일 먹을 걸 찾아온다고 쉬지도 못했어.”

말없이 계시던 아버지가 제 얘긴 그만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가 흙이나 상처 따위로 얼룩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렌의 마음이 저릴 때였다. 헤겔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움직이시죠.”

“헤겔 군, 어디로 가려고? 여기서 더 안쪽으로 가 봤자 국경밖에 나오지 않아요.”

“예. 거기까지만 가 보려 그럽니다.”

미렌의 부모님은 의아해하면서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헤겔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자 미렌이 그 옆에 따라붙었다.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요? 사람이 많아서 탈출도 쉽지 않아요.”

“저번에 왔을 때 국경에 지어 둔 임시 초소가 있어. 거기로 가자.”

그 한마디에 미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모두 정리한 것 아니었어요?”

“이동 마법에도 한계가 있어서 물품들은 모두 챙겨 가지 못했어. 일단 가서 잠시 쉰 후에 너희 가족을 차례대로 탈출…….”

“우드네는 어딜 그렇게 가요?”

미렌과 헤겔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그들 앞에 그녀의 가족이 아닌 마을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렌도 알고 있는 옆집 사람이었다. 그녀보다도 미렌의 어머니가 먼저 나섰다.

“으응, 우린 더 안쪽으로 가 보려고. 그쪽은 잘 있어?”

“우리도 마찬가지지, 뭐……. 그나저나 안쪽? 거기가 여기보단 낫나?”

“우리도 모르지. 전에 알던 미렌의 마법사 친구가 가자고 해서 따라가는 중이야.”

“어머! 마법사?”

마법사?

마법사란 정말 마법의 단어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어느새 살아남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헤겔은 제 뒤로 불어난 사람들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미렌이 미안하다는 듯 그의 옷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엄마가 정이 많아서 그래요.”

“탈출은…… 힘들겠다.”

“응, 헤겔 군, 이제 출발하면 되겠어!”

인원수를 헤아리시던 어머니가 마침내 출발을 외치자 헤겔도 뒤돌아섰다. 그의 어깨가 어쩐지 무거워 보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헤겔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한참을 걸어 마침내 헤겔과 로이아가 머물렀던 국경 부근에 도착했다. 헤겔의 말대로 그곳엔 쓰다 만 천막이나 보급품들이 남아 있었다.

“자자, 다들 힘 좀 씁시다!”

“여자들은 이쪽으로 오고, 애들은 잠시 저쪽에 있으렴!”

그나마 사용할 만한 물건들을 발견한 사람들의 눈에 희망이 생겼다. 헤겔이 무언가를 시키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렌과 헤겔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집과 터전을 잃었지만 그들은 희망마저 잃지는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누나, 배 안 고파?”

“응? 응, 누나는 괜찮아.”

“형은요?”

“……어, 나도.”

잠시 다가와 질문을 던진 그렌이 서둘러 어머니께 돌아갔다. 아무래도 식사 준비를 위해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들 중에서도 엉엉 우는 애들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큰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돕겠다며 움직일 정도였다.

문득 한 여자아이가 헤겔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오빠. 오빠 진짜 마법사예요?”

“맞아.”

“그럼 마법 보여 주면 안 돼요?”

“여기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다음에.”

국경에선 특수한 방법이 없는 이상 모든 마법이 제한되었다. 헤겔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위로하자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헤겔이 곤란하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결국 그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마법이 보고 싶은데?”

“그야…….”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랑 아빠의 집이 다시 생기는 거요.”

“……그래?”

“많이 많이 우셨어요. 저한테두 미안하대요.”

난 괜찮은데…….

아이가 속상한 듯 중얼거렸다. 울먹거리던 아이가 곧 울 것 같자 헤겔이 아이를 단숨에 안아 올렸다.

“이제 괜찮으실 거야.”

“정말요?”

“그럼. 내가 있을 거니까. 약속이라도 할까?”

“좋아요!”

헤겔과 아이는 두 새끼손가락을 모아 약속했다.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가 해 주는 두 번째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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