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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94)화 (94/133)

미움

남쪽 마탑엔 황성과 달리 적절한 응접실 따위가 없었다. 오로지 마법사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마탑은 손님과 대화를 나누려면 연구용 탁자와 나무 의자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 손님도 연구용 탁자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손님의 덩치가 빼빼 마른 마법사들이나 앉는 의자를 사용하기엔 몹시도 컸다는 점이다.

“……이올라오스 경, 안 불편하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다른 의자를 찾아올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미렌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피며 묻자 이올라오스가 다정히 웃어 줬다. 하지만 그래도 위태로워 보이는 건 여전했다.

문득 헤겔이 어쩐지 심통 맞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불편하면 바닥에 앉겠지. 우리 마탑엔 그것보다 큰 의자 없어.”

“그쪽이 앉은 의자는 몹시도 커 보입니다만, 카르너 경.”

“그야 이건 내 전용 의자니까?”

그 한마디에 이올라오스의 웃는 낯에도 쩌적 금이 갔다. 사실 그가 앉아 있는 이 협소한 의자마저도 미렌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

이올라오스는 결국 고개를 돌려 제 시야에서 헤겔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테넷 경으로부터 말씀은 들었습니다. 가족분들이 곤란해지셨다고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가족뿐만 아니라 프레니티 영지 사람들 모두가 위험해요. 저 또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어려운 문제군요.”

이올라오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본래 일반인을 포로로 삼거나 죽이는 일은 아무리 전쟁이더라도 금기에 가까웠다. 다만 지금의 사태가 일반적인 전쟁과는 다소 달라 문제였다.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테룬 공국은 이대로 우리 제국이 프레니티 영지를 포기하길 바라는 것 같더군요.”

“포기……요?”

“예. 만일 내일 당장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테룬 공국은 이미 프레니티 영지를 가졌으니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니까요.”

“프레니티 영지 소탕 작전은 현실적으로 힘듭니까?”

“가능은 할 겁니다. 다만, 그 경우엔…….”

이올라오스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전쟁이 본격화될 겁니다.”

군사의 일부가 프레니티 영지를 소탕하기 위해 사용되는 순간, 테룬 공국은 치고 들어올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올라오스가 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야 겨우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제 가족만…… 구할 수 있는 거군요.”

“안타깝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프레니티 영지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당장 구하긴 어렵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드 씨의 가족 정도입니다.”

미렌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올라오스의 판단은 당연했다.

아니, 오히려 이조차도 무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을 빼돌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프레니티 영지는 테룬 공국 출신의 사람들이 모인 탓에 주변 영지로부터 많은 따돌림을 받았다. 그래서 더더욱 영지 내 사람들끼리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미렌을 봐 왔던 촌장님도, 그녀를 최고의 약초꾼이라며 치켜세워 주던 약방 영감님도, 바로 옆에서 밭을 가꾸던 제 친우의 가족들도…….

모두 무시한 채 제 가족만 구해 내도 되는 걸까.

현실을 마주한 미렌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말의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러십시오. 우리는 우드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 겁니다.”

미렌이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문득 자신들이 죽거든 돌아올 생각은 말라던 부모님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넌 단지 우리 가족을 위해 가는 게 아니야. 이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가는 거란다.’

어쩌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 모든 것까지 보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미렌의 현명하고 다정한 부모님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고민하던 미렌은 끝내 결정을 내렸다.

“결정……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과분한 제안을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올라오스 경.”

미렌이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그녀가 제안을 거절할 줄 몰랐던 이올라오스가 놀란 눈으로 미렌을 바라봤다.

“거절하시겠단 말입니까?”

“예. 아마도 제 부모님이라면…… 원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원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도요. 아직 모든 방법을 찾아본 게 아니니 더 찾아볼까 합니다.”

“……그렇군요.”

이올라오스는 다소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한 그라면 미렌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을 터다.

미렌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녀의 예상보다 문제가 복잡해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침내 테이블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쿵! 헤겔이 탁자를 두들겼다. 곁에 있던 리키가 졸다 말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황성에선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는데?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진 않을 것 아니야.”

헤겔이 이올라오스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상황이 이토록 급박한데 기사단은 대체 무얼 하느냔 말이었다.

“……당장 내일 아침, 기사단과 병사들은 데저트 영지를 향해 진군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전쟁인가?”

이올라오스가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테룬 공국의 건방진 행태를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총사령관의 직무를 맡은 이올라오스는 떠나기 전 미렌을 찾아온 것이었다. 로이아의 보고를 들은 직후였다.

“오래 걸리겠군.”

“기간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데저트 영지에서 첫 번째 승기를 잡는다면 그다음 격전지는 프레니티 영지가 될 겁니다.”

제국군 측에서도 프레니티 영지는 여전히 골칫덩이였다. 그곳을 내버려 둔 채 전쟁을 지속하자니 거슬렸고, 그렇다고 소탕하자니 군이 나뉘어 힘이 약해졌다.

하여 이올라오스를 비롯해 전쟁 참모들은 프레니티 영지를 2순위로 올렸다. 먼저 데저트 영지에서의 첫 번째 전쟁이 중요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헤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최소 석 달, 길면 반년. 프레니티 영지를 다시 가져오기까지 걸릴 시간인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네가 장담하면 되지. 총사령관은 이올라오스 경, 당신이니까.”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린 헤겔이 제 턱을 괴었다. 그가 씩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신 없나?”

“충분히, 가능합니다.”

헤겔의 약 올리는 듯한 물음에 이올라오스도 순간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물론 능력 있는 이올라오스라면 충분히 가능한 기간이었다.

마침내 대답을 얻어 낸 헤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내가 미렌과 함께 프레니티로 들어갈게.”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내 말이 어디 잘못됐나?”

헤겔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미렌과 이올라오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제국군이 프레니티 영지에 올 때까지, 내가 영지민들을 지키겠다고.”

“……가능한 이야깁니까?”

“충분하지.”

그의 한마디에는 대단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그건 아마 헤겔 카르너기에 가능한 말일 터다.

헤겔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올라오스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남자라면, 자신이 한 말을 기어코 해내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헤겔 씨가 마음대로 결정하셔도 되는 건가요?”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미렌이 눈을 찌푸렸다. 총사령관인 이올라오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헤겔이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될 문제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헤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이올라오스 경이야 총사령관이라지만…… 헤겔 씨는 아니잖습니까.”

“뭐?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헤겔의 옆에선 이미 리키가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채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헤겔이 그 머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얜 부단장.”

“……?”

“그리고 나는 마법사단의 총단장인데?”

미렌이 멍한 얼굴로 헤겔과 리키를 바라봤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졌다.

***

다음 날 오전.

헤겔과 미렌은 가벼운 짐을 챙겨 수도로 돌아왔다. 곧바로 프레니티 영지를 향하는 게 아닌 수도로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엄마! 나도 정오에 처형장 가 볼래!”

“얘는. 거기가 애들 장난치는 곳인 줄 아니? 집에나 있어!”

오늘이 바로, 반역자 마리아 네메시스의 처형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수도에 도착한 뒤부터 미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겔 또한 그녀의 기분을 헤아렸기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걸어 처형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자 저 멀리 높은 단상 위로 흰옷 차림의 마리아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대앵-. 댕-.

정오를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마리아가 처형대 위로 올라갔다.

가벼운 걸음걸이에선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죄인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그 물음에 마리아가 잠시 눈을 내려 관중들을 살펴봤다.

무언가를 찾듯 그녀는 오래도록 관중 속을 살폈다. 마침내 기다리다 못한 병사들이 처형을 진행하려 했을 때였다.

관중 속에 섞여 있던 미렌은,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기분을 느꼈다. 마리아가 이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가 웃었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웃음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을 죽이고 싶었으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조그만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마리아는 나직이 할 말을 마쳤다.

“당신을 미워할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아니,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어쩌면 후련함에 가까웠을까.

미렌은 오래도록 그 아름다운 미소를 기억했다. 도무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정오, 마리아 네메시스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죄명은 반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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