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줘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미렌은 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내쉬었다간, 발끝 하나라도 움직였다간 그대로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뚜벅.
계단 앞에 서 있던 라이언이 정확히 미렌이 있는 끝을 바라보며 한 발짝 내디뎠다. 아직 은신 마법은 풀리지 않았으니 그의 눈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터다.
하지만 그는 꼭 그 끝에 무언가 있다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 라이언이 휘청거리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미렌은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다.
라이언이…… 두렵다고.
저 남자는 제가 알던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도망치고 싶다.
벗어나고 싶어.
그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미렌의 등 뒤로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자.”
놀랍게도 모습을 드러낸 건 헤겔이었다. 그는 미렌과 달리 은신 마법도 하지 않은 채 지하 감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발견한 건 미렌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던 라이언 또한 헤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헤겔 또한 천천히 앞으로 나가 자연스레 미렌을 제 등 뒤에 숨겼다. 물론 타인의 눈에는 그저 헤겔이 혼자 한 걸음 나선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헤겔 카르너?”
“폐하, 제가 길을 잘못 들어 이곳에 왔지 뭡니까? 인사는 다음에 제대로 하겠습니다.”
헤겔이 제 뒤로 손을 뻗어 미렌의 한쪽 손을 움켜잡았다. 그는 그대로 이동 마법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멈추어라.”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라이언이 갑작스레 속도를 높여 다가왔기 때문이다.
미렌은 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헤겔의 뒤에 숨어 입을 막았다. 그러면서도 처음으로 라이언의 얼굴을 지척에서 살폈다.
새까맣게 죽어 버린 눈동자는 그녀가 알던 총명한 황제, 라이언 토르 워로덴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매번 네가 거슬렸어.”
“……제가 그랬습니까?”
“그럴 때마다 네 곁에 누가 있었는지 알고 있나?”
처음, 황후의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도.
다음, 그가 아르테미스를 가져왔을 때에도.
그리고, 밤놀이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도.
언제나 그곳엔 미렌이 있었다. 라이언은 그 모든 기억을 잊지 않았다.
“비켜.”
한마디를 중얼거린 라이언은 고개를 돌려 헤겔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자꾸만 그곳에서 누군가를 찾게 된다. 그는 혹시 싶어 속으로 몇 번이고 물었다.
그곳에 있어?
당신이, 거기 있는 건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폐하.”
“반역죄라도 뒤집어쓰고 싶은 건가?”
“제 뒤엔 아무것도 없으…… 윽!”
쿵!
헤겔의 몸이 라이언의 손길로 인해 순식간에 떠밀릴 때였다. 그는 넘어지는 그 순간, 제 뒤로 손을 뻗어 마법을 발현시켰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은밀한 빛이 그의 뒤를 오갔다.
구석에 처박힌 헤겔을 두고 라이언이 서둘러 벽 끝으로 다가가 그곳을 훑어 댔다.
간절한 구원을 바라는 이처럼 몇 번이고 애달프게 빈 벽을 매만졌으나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이언은 그 앞에 서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팔 아래로 떨어져 있던 그의 손이 주먹 쥐어지더니, 곧 손 틈 사이로 핏줄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어디로 숨겼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말해.”
부릅뜬 눈이 헤겔에 닿았다. 라이언은 바닥에 쓰러진 그의 위에 올라타 이를 악문 채 읊조렸다.
“말한다면 네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마.”
“…….”
“황제가 되고 싶나? 제국이 가지고 싶지 않아?”
그의 숨결 속에서 비통함이 느껴졌다. 헤겔 또한 그것을 알았다. 그는 비록 현재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모두 진심이었다.
라이언의 그 처절한 애원을 바라보며 헤겔은 생각했다.
“폐하.”
“네게, 네게 내 모든 것을 주겠다. 그러니 제발…….”
“폐하, 황후 전하는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까.”
이러니 당신에게 미렌을 줄 수는 없노라고.
자유로울 때 그토록 행복한 이를 새장에 갇힌 채 평생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쯤 하도록 해.
“폐하께서는 제게서 무엇을 찾으시는 겁니까?”
툭…….
헤겔을 붙잡고 있던 라이언의 손이 떨어져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끔찍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 없이 헤겔을 내려다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처럼 혼이 나간 얼굴로 감옥을 떠날 뿐이었다.
헤겔은 그런 라이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제 옷자락을 툭, 툭 털어 냈다. 정리를 마친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본인은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감옥 안쪽 어두운 어디에선가였다. 낮고 깊은 목소리 하나가 헤겔의 폐부를 찔렀다.
“본인은 저 사내와 다를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십니까?”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마법사님, 부디 오만해지지 마십시오.”
히죽, 히죽.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어쩐지 자꾸만 미소 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신을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어쩌면 외부가 아니라 헤겔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조금 전 대화를 나눌 때 당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
“저와 다를 바가 없으셨습니다.”
하하!
통쾌한 웃음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다. 헤겔은 아무 표정 없이, 그런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날 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감옥 속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새카만 어둠이 꼭 제 자신을 투영해 내는 것만 같아서.
***
“미렌 님?”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던 미렌이 겨우 눈을 뜨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앞에선 리키가 놀란 얼굴로 미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하자 남쪽 마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위급한 순간, 헤겔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리라.
“탑주님이랑 같이 안 오시고 혼자 오셨어요?”
“상황이…… 좋지 않아서요. 혼자 와 버렸네요.”
“괜찮아요! 전 탑주님은 안 오시는 게 더 좋거든요.”
제 말을 증명하듯 리키의 주위엔 읽다 만 책들과 과자 부스러기 따위가 널려 있었다. 온갖 쓰레기들은 덤이었다.
“저희와 헤어진 뒤로 쭉 여기 계셨던 건가요?”
“네! 밀린 소설도 읽어야 하고, 곧 전쟁이 나면 과자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미리 사 두기도 해야 하고…….”
“바쁘셨네요.”
“그럼요!”
해맑은 리키를 보고 있자면 미렌은 꼭 제 동생인 그렌이 생각났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요, 완전 좋은데요! 더 쓰다듬어 주세요!”
리키가 공격적으로 제 머리를 내밀었을 때였다. 그의 머리 위로 흰 손이 내려오더니 퍽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두들겼다.
“악!”
“뭘 쓰다듬어?”
“탑주님은 또 왜 오셨어요!”
“내 마탑에 내가 오겠다는데 문제 있나?”
“이익……! 얄미워요!”
리키가 울상으로 제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사이 미렌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 헤겔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이건 이동 마법이 아니라 귀환 마법이라 상태도 나쁘지 않아.”
“그래도……. 제가 간 뒤로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 질문에 헤겔은 잠시 미렌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곤 다시금 제 옷을 툭툭 털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더니 돌아가던데.”
“아……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눈이 마주친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누가 걸어 준 마법인데.”
헤겔의 자신감이 듬뿍 느껴지는 말에 리키가 대뜸 끼어들었다.
“탑주님은 공격 마법만 잘하시는데요?”
“리키, 입 다물어.”
“왜요? 맞잖아요, 탑주님 공격 마법 아니면 변변찮은…… 으악!”
“흥미가 없어서 안 한 거지, 마음만 먹으면 너보다 잘해.”
“베에,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 대단한 사람 아무도 없대요!”
리키는 헤겔에게 머리를 맞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그러고는 미렌의 뒤로 숨어 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헤겔이 돌아가 리키를 잡으려 했을 때였다. 똑똑한 리키는 이미 미렌을 방패처럼 앞세운 채 스스슥 돌아갔다.
“미렌 님, 미렌 님! 탑주님이 저 때려요!”
“……너 안 나와?”
“으아아앙.”
“저 과자만 축내는 돼지가……!”
그러다 헤겔과 눈이 마주친 미렌이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헤겔도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리키가 미렌의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헤겔을 바라봤다.
“헤헤, 제가 탑주님의 유일한 약점을 드디어 찾았다니까요.”
“약점이요? 저도 알려 주세요. 뭔가요?”
“그야 미렌 님이죠!”
헤겔의 약점이라는 말에 궁금해하던 미렌은 약점이 자신이라는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리키는 눈치도 없이 중얼거렸다.
“미렌 님 오시면 평소보다 주먹의 강도도 약해지고, 더군다나 이번 전쟁도…….”
“야.”
“탑주님 저 불렀….”
그의 말은 불렀, 까지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단거리 이동 마법을 펼친 헤겔이 리키의 뒷덜미를 잡아채었기 때문이다.
리키가 우는 얼굴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미렌 님!”
“어차피 얘는 곧 돌아갈 텐데. 불쌍한 리키, 뒤가 무섭지도 않나 봐?”
“아닌데요? 안 돌아가실걸요? 왜냐하면…….”
그때였다. 리키와 헤겔의 대화가 뚝 끊기더니 둘 모두가 저 아래를 내려다봤다.
헤겔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는 아직까지 잡고 있던 리키의 뒷덜미를 쭉 들더니 시선을 마주한 채 물었다.
“손님이 오기로 했어?”
“네! 미렌 님이 아주, 아주 기다리시던 손님이죠!”
“누군데?”
미렌이 기다리던 손님? 그 질문에 미렌 또한 호기심이 일었다. 리키가 히히 웃으며 당차게 대답했다.
“이올라오스 트리온 경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