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92)화 (92/133)

애증

아버지를…… 없애?

미렌은 마리아의 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가 멍해졌다.

발리오딘 에드가 공작은 어느 날 밤, 갑작스럽게 심장이 멈추며 죽었다. 미렌과 라이언이 결혼한 지 고작 3년이 흘렀을 때였다.

미렌은 그 당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렌.’

‘오늘은 어쩐 일로 늦게 오셨습니까, 폐하.’

지독히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이었다. 새벽 중에 일어난 미렌 에드가는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저녁 식사 전에 왔을 라이언이 그날따라 늦은 시각에 찾아왔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에드가 공작이…… 죽었다는군.’

라이언의 한마디에 미렌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개인적인 자리를 가진 지는 그녀 또한 오래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었을 때 아직 정정하단 이야기를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죽었다니.

‘그게, 무슨…….’

‘방금 전 들려온 소식이야. 시종들이 발견했을 때엔 이미…… 심장이 멈췄다더군.’

미렌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라이언을 바라봤다.

비록 일반적인 가족처럼 가깝진 않더라도 제 아비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권력을 위해서라면 한없이 비정하게 굴던 사내기도 했다.

그랬던 에드가 공작이 한순간에 숨을 거두었다.

미렌은 도무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문제는 평생이 가도 해결하지 못할 숙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가 사라졌다.

‘장례식을…… 치러야겠네요.’

우습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의 하나뿐인 자식이니 장례는 자신이 치러야겠다는 생각.

하다못해 자신의 유모가 죽었을 때에도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제 아비의 죽음에도 이토록 무덤덤한 자신에 소름이 끼쳤다.

오히려 그녀를 위로한 것은 라이언이었다.

‘……미렌, 괜찮나?’

‘잘…… 모르겠어요. 실감이 안 나는 걸까요. 아니면…….’

씁쓸하게 웃는 미렌에게 라이언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제 품에 안아 주며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다독였다.

그랬었는데.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목적을 위해서라면 한없이 잔인해지는 폐하를요.”

“…….”

“아마 하늘에 계신 전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면, 제법 충격 받을…… 커윽.”

라이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아무 주저 없이 마리아의 목을 잡아 조였을 뿐이다.

마리아의 목을 타고 핏줄이 솟구쳤다.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은 곧 파랗게 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널 미렌의 곁에 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윽, 헉…….”

“네가 날 두려워했으니까.”

무감정한 말투.

자비 없는 행동.

제 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태도.

그것은 미렌이 본래 알던 라이언이 아니었다. 제 어깨에 고개를 묻고 때때로 나약한 아이처럼 굴던 자신의 남편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두렵지 않나 보군.”

마리아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몇 분여가 지나갔다. 미렌은 제 입을 틀어막은 채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이대로 있다간 마리아가 죽을 것 같았다. 미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라이언의 손에 잡힌 마리아가 구석에 숨어 있던 미렌을 향해 눈동자를 돌렸다. 그 순간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미렌은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그녀는 라이언의 본모습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학, 하윽, 으으윽!”

라이언의 손이 탁 풀리며 그와 동시에 마리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저앉은 그녀는 한 번에 들이닥친 숨을 가다듬지 못해 몇 번이고 쿨럭였다.

라이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꼭 죽어 가는 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에드가 공작의 죽음에 대해선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궁금은 하신 모양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 그런다고 해서 네 죽음이 뒤바뀌진 않을 테니.”

“하하!”

마리아가 실성하듯 웃었다. 현 황제의 모습이 주인을 잃어버린 짐승이 폭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아가 예상하던 바와 일치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라이언을 올려다봤다.

“제 손을 더럽히지 않게 되었는데, 그 감사한 이를 어찌 찾지 않을까요.”

“공작이 말한 이가 너였나?”

“에드가 공작이 저를 기억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영광이군요.”

“매번 그런 말을 해 댔으니까. 제가 남긴 업보가 언젠가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마리아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불쌍한 사람. 자신이 남긴 업보가 제 딸에게 찾아올 줄은 몰랐나 봅니다.”

쾅!

끝끝내 마리아의 입에서 미렌의 이야기가 나오자 라이언이 창살을 내리쳤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까지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미렌에게 보이지 않았다.

“미렌은 그 아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죽여야지요. 폐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여우 같은 사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요?”

마리아 또한 라이언의 기세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창살에 매달려 입을 열었다.

“그리 소중했기에 멀리 떨어트린 겁니다. 누구보다 소중하게, 자신과는 가장 먼 곳으로요!”

에드가 공작은 미렌이 채 성인도 되기 전에 황제와 결혼을 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아비가 정치 놀음을 위해 딸을 팔아넘겼다며 수군거렸다.

미렌 또한 평생을 그렇게 알았다.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다정한 적이 없던 아버지셨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드가 공작은 자신이 죽으면 제 모든 재산을 사촌인 로렌트가 관리하도록 처리해 두었다. 미렌이 멋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미렌을 위한 것이었다고?

“그 지독한 사내에게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막대한 권력을 탐내는 이들은요? 그러니 폐하와 결혼을 시킨 겁니다. 제 딸을 팔아넘기는 척 위장했죠.”

“…….”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미렌 에드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걱정 마라. 가장 값비싸게 결혼시켜 줄 테니.’

아비는 그렇게 말하며 미렌에게 들어오는 무수한 혼인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그래서 어렸던 미렌은 결혼이 자신을 팔아넘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결혼식은, 아버지의 경매장이라고.

“상관없어.”

그 모든 정적을 깨트린 건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창살 속에 갇혀 그런 라이언을 올려다보던 마리아가 눈을 크게 치떴다. 그녀가 제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

“알고 계셨음에도 혼인을 수락하셨던 겁니까?”

마리아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에드가 공작이 폐하를 이용한다는 것도, 그가 폐하의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여 왔는지도……. 앎에도 불구하고 전하를 받아들이신 겁니까?”

“미렌은 모르는 일이다.”

“폐하께선 미치셨습니다.”

마리아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 집착적인 사랑도.

아니,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만일 황제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고작 미렌 하나를 가지기 위해 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어 간 황제의 신하들은 모두 발리오딘 에드가가 없애 버렸으니까. 그가 혼자가 되도록 만들어 버린 것도, 모두…… 발리오딘 에드가의 짓이었으니까.

“폐하께선, 제정신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제정신으로 보였나?”

라이언의 입가가 당겨져 올라갔다. 그 소름이 끼치는 미소로 웃으며 그는 말했다.

“그리도 보는 눈이 없어서야.”

마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신은 이 괴물 같은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제 다시 내가 두렵나 보군.”

라이언이 제 한쪽 무릎을 굽혀 지저분한 바닥에 주저앉았다. 창살 사이로 팔을 뻗은 그가 이번엔 마리아의 고개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보잘것없는 물건을 쥐듯 성의 없는 손길이었다. 그는 지척에서 마리아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러니 말하라.”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 사이로 쥐새끼 한 마리의 끽끽거리는 소리가 울려 댔다. 마리아의 손등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황제에게 붙잡힌 지금, 그녀는 완벽한 피식자에 불과했다.

“숨기고 있는 게 있지?”

“…….”

마리아가 숨조차 멈추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라이언을 바라봤다.

이대로 보고 있다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엔 그런 힘이 있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가 없었다. 마리아는 억지로 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말한다면 새 삶을 약속하마.”

“……우스운 소리시군요. 저는 이미 제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어 냈습니다. 그런 제게, 아쉬울 게 있겠습니까?”

“그런가.”

라이언은 흥미가 떨어진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레 그의 손에 턱이 쥐어져 있던 마리아도 바닥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드러누운 채 일어서지 않았다. 모든 대화에 힘을 쏟은 지금, 더 이상 일어설 힘이 남아 있지 않은 터다.

라이언은 그대로 감옥을 떠나려 했다. 떠나기 전 그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토록 미렌을 죽이고 싶었나?”

“예.”

“내 사랑이나, 네 증오나 별다를 게 없는 모양이군.”

픽. 그가 낮게 웃었다. 마리아는 바닥에 뺨을 댄 채 읊조렸다.

“글쎄요.”

“다를 게 있는가?”

“발리오딘 에드가가 사랑했던 그 초록빛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으니까요.”

“…….”

뒤돌아 가려던 라이언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마리아는 이미 라이언이 아닌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라이언의 얼굴 위로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상하지.”

“……무엇이 말입니까?”

“오늘이 되기 전까진 죽어도 입을 열지 않았지. 그런데 너는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그가 우스운 듯 제 입가를 매만졌다.

“숨기고 있는 게 있나 물었었다.”

“…….”

“너는 아쉬울 게 있겠습니까, 라 대답하였고.”

마리아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직감적으로 라이언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해 버린 것이다.

“숨기고 있는 게 있긴 한 모양이야.”

그렇지?

라이언의 눈동자가 마리아가 바라보고 있던 허공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입을 틀어막은 채 주저앉은 미렌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