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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91)화 (91/133)

나의 언니

고개를 든 마리아의 눈빛이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도 선연하게 빛났다. 그녀는 미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하고 따스했던 마리아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원래 제 모습이었던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제 어머니께선 죽어 가고 계셨습니다.”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어.”

“그럼요. 당신은 그때 겨우 갓난아이에 불과했으니까요.”

픽. 마리아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 어머니의 목숨을 대가로 태어나신 몸 아닙니까? 그러니 돌려받아야 할 것을 받았을 뿐입니다.”

‘웬 여자아이가 돌려받을 게 있다며 찾아왔답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돌아갔어요. 아직 받을 게 없다더군요.’

추운 겨울, 어미의 목숨 값을 받으러 찾아왔던 아이는 아직 받을 게 없다며 돌아갔다. 그녀는 어쩌면 그때부터 미렌을 죽이기로 결심했던 걸지도 모른다.

미렌 또한 아주 어렸을 적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겨우 떠올랐다.

‘이름이 뭐야?’

사일런의 뒤에 숨은 미렌이 고개만 내밀어 오랜만에 찾아온 또래 손님을 확인했다. 어린 자신보다 한참은 키가 큰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미렌을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리아 네메시스.’

‘사일런, 내 언니예요?’

‘이런, 아가씨. 평민은 아가씨의 언니가 될 수 없습니다.’

가족의 애정을 받지 못한 아이는 당시에 무척이나 정에 굶주려 있었다. 미렌은 자신도 언니가 가지고 싶어 울상을 지으며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래도요…… 흐윽.’

‘언니가 가지고 싶니?’

마리아가 불쑥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뜻하게 물었다.

미렌은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마리아가 다행이라는 듯 웃어 보였다.

‘언니는 되지 못해도, 언니처럼 되어 줄게.’

‘정말요?’

‘응. 약속할게. 다시 만나면…… 꼭 그렇게 되어 있을 거야.’

마리아는 웃으며 미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집사인 사일런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선 저택을 떠나갔다.

미렌은 그 초라한 뒷모습을 꽤나 오랫동안 기억했다. 그녀가 복수를 마음에 담아 둔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으리라.

“살아 있는 나를 보니…… 아직도 내가 죽이고 싶어?”

그 물음에 마리아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풋, 하고 웃더니 곧 폭소를 터뜨렸다.

숨이 넘어가도록 웃던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몸은 돌려받을 게 아니니까요.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저는 제가 원했던 바를 모두 이루어 냈습니다.”

“행복한가?”

미렌의 나지막한 질문에 마리아가 웃음기를 지우며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마리아가 마침내 다시금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당신의 저택에 찾아갔을 때, 아직 그곳엔 아르테미스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의 명석하신 아버지께선 아내의 죽음으로 아르테미스를 사용할 곳을 잃어버리셨죠. 그는 그걸 당신께 사용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공작은 혼란스러워했다. 꼭 살아갈 이유를 잃은 것처럼 실의에 빠졌던 것이다.

마리아가 속삭이듯 빠른 어조로 읊조렸다.

“그래서 제가 직접 저택에 찾아가 공작에게 말했습니다. 아르테미스를 돌려받지 않아도 되니, 당신에게 사용하라고.”

마리아는 에드가 공작이 제게 내밀어 온 아르테미스를 거절했다. 이제 와 돌려주겠다 말하던 그 모습이 어린 그녀에겐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미 제 어미는 죽었건만.

이제 돌려받아야 하는 건 아르테미스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 결심했다.

그 사내로부터 제 어미의 목숨 값을 돌려받아야겠노라고.

그래서 그녀는 속살거렸다. 아르테미스를 마시면 이 집의 따님 또한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며.

“당신은 이미 아르테미스를 복용한 적이 있단 뜻입니다, 전하.”

마리아의 한마디에 미렌이 눈을 치떴다. 아르테미스를 이미 복용한 적이 있다. 그건, 그러니까…….

‘그래, 뭐. 사실 아르테미스는 건강한 사람한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거든.’

지나가듯 말했던 헤겔의 한마디.

모든 병을 치유해 준다는 전설의 꽃은 이미 미렌의 몸을 치유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말은, 그녀는 사실 이미 건강했다는 뜻이다.

“아아,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건강한 당신의 몸을 악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독을 공작가로 보내었는지요.”

“…….”

“황성에 팔려 오듯 결혼하신 뒤부터는 그나마 쉬웠습니다. 당신의 모든 식사와 다과는 제가 직접 준비했으니까요.”

그녀의 복수는 그토록 지독했다. 평생 동안 미렌이 자신은 시한부 인생이라며 삶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 정도로.

“하지만 당신이 폐하와 가까워지며 독살은 어려워졌지 뭡니까? 그러던 중, 또 다른 아르테미스를 구하게 되었지요.”

눈을 부릅뜬 마리아가 곧 자신의 두 손을 모아 깍지 꼈다. 그녀는 꼭 악마가 들린 사람처럼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건강해지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릅니다. 거동이 수월해지며 기뻐하셨습니까? 다른 이들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셨겠죠?”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이대로 라이언과 평생을 꿈꾸어도 될지 모른다고.

제 또 다른 삶에 대해선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미렌 우드의 삶을 병행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부득불 아르테미스를 챙겨 마셨다. 그녀는 제 손으로 직접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던 것이다.

“슬퍼하지 마세요, 전하. 우리는 그저 등가 교환을 했을 뿐입니다.”

마리아가 살풋 웃어 왔다. 미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렸던 마리아가 빼앗긴 것은 제 어미의 목숨뿐만 아니라,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희망도 함께였다. 그녀는 그것들을 미렌으로부터 다시금 빼앗아 갔다.

하지만.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어, 마리아.”

“…….”

“네가 행복했느냐고 물었잖아.”

미렌의 뺨 위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웃고 있는 마리아의 얼굴과 그녀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만일 행복하다고 대답한다면, 그녀는 이대로 뒤로 돌아 감옥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가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평생을 복수에 매달려 살아와야 했던 저 여린 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깟 목숨 값쯤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대답을 하지 못해.”

“…….”

“그럼 너도, 나도…… 너무 불쌍하지 않니.”

미렌이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차라리 자신을 죽인 마리아의 말로가 행복했다면 이토록 마음이 저리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감옥에 들어와 마주했던 마리아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잊을 수가 없었다.

하나뿐이었던 삶의 목표를 이루고 정신을 놓아 버린 것 같았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원망할 이마저 잃어버린 미렌이 숨죽여 울었다. 그녀의 손목을 타고 물기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창살 너머에서 바라보던 마리아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일어선 그녀가 창살에 한 걸음 다가섰을 때였다.

“……할 예정입니다. 폐하, 부디 화를 참으십시오.”

폐하. 그 한마디에 미렌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계단 너머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몹시도 낮은 목소리는 미렌 또한 잘 알고 있는 이의 것이었다. 그녀가 다급히 어깨에 걸쳐 뒀던 로브를 꼼꼼히 챙겨 입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봤다. 마침내 단추를 모두 잠가 은신 마법이 다시 발동되었을 때는,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구석에 숨죽여 앉았다.

이제 감옥 안에는 다시금 마리아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미렌은 떨리는 심장을 다잡으며 마리아의 감옥과 거리를 벌렸다.

“내 손으로 죽이지 않도록…… 노력하지.”

쿵.

마침내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렌은 오랜만에 마주한 라이언의 얼굴에 제 숨을 삼켰다.

너무도…… 너무나도 수척해져 있었다.

푹 팬 뺨과 눈두덩이는 그가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알려 줬다. 미렌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저 품에 안기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미렌은 그런 제 자신을 참기 위해 옷자락을 꾹 구겨 쥐어야만 했다.

“오셨습니까?”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폐하.”

마리아의 담담한 인사가 전해졌다. 창살 너머에 선 라이언은 그런 마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네 죄명이 무엇인 줄 알고 있나?”

“반역이라 들었습니다.”

마리아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목 안으로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황후 전하 시해죄가 아니라 반역이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폐하.”

“네 목을 찢어 죽인대도 감사하단 인사가 나오나 보군.”

“하지만 명석하신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제가 제 손으로 그분을 죽였음을.”

그 순간 라이언의 손이 창살 속으로 내뻗어지며 그녀의 옷깃을 잡고 제 쪽으로 당겨 왔다.

쿵!

큰 소리와 함께 마리아의 이마가 창살에 부딪혔다. 코끝을 타고 옅은 피가 흘러내렸다.

“몇 시간이나마 더 일찍 죽고 싶나?”

“하하. 하하하…….”

“원한다면 그리해 주지.”

그녀가 실성한 얼굴로 웃어 댔다. 그러느라 입술을 비롯해 온 얼굴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우스워서 그럽니다, 우스워서. 폐하께서 제게 그리 말씀하셔도 된단 말입니까?”

마리아는 그 큰 손에 옷깃이 잡힌 채로도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전하를 갖기 위해 그분의 아버지마저도 없애 버리신 분이, 나를 벌하셔도 되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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