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란 무릇
그날 밤.
미렌은 사일런의 배려로 공작 성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게 됐다. 헤겔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에 들어온 그녀는 그리운 눈길로 어릴 적 자신이 사용하던 방을 훑어 내렸다.
침대와 화장대를 포함해 방 안의 모든 것은 예전과 똑같았다. 미렌이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침대 시트를 쓸며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누워 죽을 날만 염원하던 때도 있었지.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시트 자락을 매만졌다. 황후로 내정되며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더더욱 새삼스러웠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집사인 사일런이었다.
“사일런?”
“수면에 좋은 차를 준비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자주 드시던 것이지요?”
“고마워요. 아, 테이블 위에 둬도 돼요. 손에 닿지 않아도 상관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침대 옆 서랍 위에 차를 두려는 사일런을 그녀가 막았다.
미렌 에드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겨웠기에 마실 것들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둬야만 했다. 미렌 우드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으니 거절한 것이다.
그 지시에 사일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제가 실수했습니다. 이리 늙으니 새로운 게 참 어려운 일이더군요.”
“나는 사일런이 변하지 않아서 좋은걸요.”
“그렇습니까?”
그가 인자하게 웃었다. 미렌은 그런 사일런을 바라볼 때면 한 번도 없었던 할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편해졌다.
차를 내려놓은 사일런이 막 돌아가려던 때였다. 미렌이 문득 그를 불러 세웠다.
“사일런. 궁금한 게 있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사일런에게 진실을 말하는 게 옳았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사일런도 잠시 고통스러워하다 ‘미렌’을 잊었겠죠. 그게…… 날 아껴 준 사일런을 위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미렌의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제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 펴기도 했다.
“이제 나는 고작 평민에 불과한 미렌 우드니까요. 황후였을 때처럼 대단한 권력도 없어요. 어쩌면 지금의 사일런보다도 낮은 사람일 수도 있겠죠.”
미렌은 사일런에게 빗대어 묻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가 대답을 구하고 싶은 건 그가 아니라 라이언이었다.
황제인 그에게 평민인 미렌 우드는 무척이나 초라한 존재일 터다. 예전처럼 우리는 사랑을 할 수도 없었고, 황후와 황제라는 고귀한 만남을 이어 갈 수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진실을 말해 주는 게 과연 옳은 걸까. 미렌이 나직이 말했다.
“사일런의 기억 속, 고귀한 황후인 미렌 에드가로…… 그렇게 남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가씨.”
잠자코 미렌의 이야기를 듣던 사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말대로 어쩌면 그편이 옳은 걸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무릇 끊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역시 그런가요.”
“다만 기억해 두십시오.”
“무엇을요?”
“지금의 아가씨는 전혀 초라하지 않습니다.”
사일런의 눈가가 곱게 접혔다. 그는 눈가의 주름이 깊게 패도록 웃으며 읊조렸다.
“건강하신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우십니다. 평민이든, 황후든 말이지요.”
“……사일런은 예전부터 그랬어요. 내가 그토록 못났는데 매번 예쁘단 말밖에 해 주지 않았잖아요.”
“그야 정말로 제 눈에는 가장 예쁘셨으니까요. 아가씨의 두 눈은 다프네 님을 쏙 닮으셨습니다.”
다프네 에드가는 초상화만으로도 희대의 걸작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미렌 에드가는 눈동자 색을 제외하곤 전혀 닮지 않았음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사일런의 말을 구태여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건강해지셔서 다행입니다.”
“……사일런에게라도 비밀을 말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앞으로 남은 평생 동안 다시는 나를 미렌 에드가라 여겨 줄 이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일런이 막 고개를 저으려 했을 때였다. 열린 방문 너머로 문득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안 가 모습을 드러낸 이는 헤겔이었다. 그가 제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열린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헤겔 씨, 이 밤중엔 무슨 일이에요?”
“소식이 들어왔어.”
“소식?”
그가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잠시 말을 망설였다. 그러다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리아가 잡혀 들어갔다는군.”
미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작게 입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게, 그게 무슨…….”
“죄명은, 반역이야.”
그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헤겔을 바라봤다. 반역죄를 받았다는 것은, 곧 마리아가 살아나기 힘들다는 의미기도 했다.
“내일 오전에 형이 집행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지금, 지금 움직여야겠어요.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헤겔 또한 어려운 얼굴로 제 머리를 헤집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식을 전하면 그녀가 마리아를 만나고 싶어 할 것쯤은 이미 예상해 둔 바다.
그가 가져온 마법사용 로브를 미렌에게 던졌다. 내일 오전에 형이 집행될 예정이라면 당장 오늘 밤 지하 감옥에 잠입해야 했다.
미렌이 떨리는 손으로 로브를 어깨에 걸쳤다. 손가락이 자꾸만 떨려 단추가 엇나갔다.
마리아는 미렌 에드가를 살해했다. 그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와는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신이 미워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아가씨.”
사일런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넋이 나간 미렌의 로브를 잡더니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깃마저 정리를 마친 그가 가볍게 먼지들을 털어 냈다. 꼭 그 언젠가의 미렌을 보필하던 때처럼.
“이제 가시지요?”
“……사일런.”
그녀는 차마 그에게 공작 성으로 돌아오겠단 약속을 해 줄 수 없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미렌의 집이 아니었다. 또한 그녀에겐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돌아오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사일런은 꼭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대답했다. 어쩌면 미렌이 가장 바라던 대답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미렌 에드가로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곳.
이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미렌 에드가의 추억이 담긴 공간이 그녀에게도 필요했다.
“로렌트 님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재산에 큰 욕심이 없으십니다. 저택도, 자산의 관리도 제게 맡기셨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아가씨를 돕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사일런은 나를 미렌 에드가로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아가씨.”
사일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하지 않아서, 선대 공작 각하의 명령이 있어서, 자유롭지 못해서. 그래서 이루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이루십시오.”
“……내가 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사일런이 전적으로 돕지요.”
사일런을 올려다보던 미렌이 결국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너른 품은 따뜻했다. 안긴 미렌은 그 품속에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가셔야지요, 아가씨. 저는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녀올게요, 사일런.”
곧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미렌이 헤겔의 곁으로 다가갔다.
헤겔이 제 뒤에 선 것을 느낀 미렌은 사일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시야를 가려 오는 익숙한 손길이 느껴졌다.
공간이 어그러졌다. 그녀는 제 인생의 전부와도 같았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엔…… 마리아가 있었다.
***
“황성 안으로 어떻게 이동 마법을 사용한 거예요?”
“전에 탈출할 때 비상 경로를 만들어 둬야겠다 싶었거든. 그래서 조치를 해 두었지.”
“……그거 불법입니다, 헤겔 씨.”
“고작 불법 정도면 다행이지. 아마 이것도 반역죄에 준할 거다.”
헤겔은 당당하게 자신의 불법을 이야기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성에서도 눈치 따위는 전혀 보지 않는 헤겔을 보고 있자면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은 맞거니 싶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 후일이 두려워 벌벌 떨었을 텐데.
안에 들어온 뒤부턴 황성의 지리에 익숙한 미렌 덕분에 은신 마법만으로도 충분했다.
지하 감옥 앞까지 수월하게 도착하자 헤겔이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가 미렌의 어깨를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기사들이 오는지 내가 앞에서 확인하고 있을게. 들어갔다 오는 건 너 혼자서 해야 돼.”
“……할 수 있어요.”
“당연히 그렇겠지. 누가 걸어 준 은신 마법인데.”
그는 로브를 벗으면 마법이 잠시 사라지지만 다시 로브를 쓰면 마법이 발동된다고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미렌이 곧 돌아섰다.
홀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자 길목에 놓인 촛불들이 일렁였다. 다만 그녀의 그림자는 비춰지지 않았다.
휘이이…….
중죄인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지하 감옥은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끼 낀 벽돌 사이로 벌레 몇 마리가 지나다닐 뿐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미렌은 유일하게 사람이 있는 감옥 앞에 도착했다.
그 안에는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은 채 무릎을 끌어안은 여인 한 명이 있었다. 전보다 왜소해진 그 어깨에 미렌은 왜인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전하이십니까?”
마리아가 푸스스 웃으며 홀로 중얼거렸다. 미렌이 로브를 벗기도 전이었다.
놀란 미렌은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그보다도 먼저 마리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죽였습니다. 그럴 리 없지…….”
잠시 눈을 들었던 마리아는 곧 다시 무릎 위로 이마를 박아 댔다. 그 모습이 꼭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미렌은 이상하게 울컥대는 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브를 벗어 보였다.
“마리아.”
“이상하네요. 전하의 목소리가 자꾸 들려옵니다. 제 손으로 죽였었는데.”
“마리아, 내가 그리도 미웠나?”
미렌의 눈가로 결국 견디지 못한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창살에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다시금 물었다.
“왜 그랬어?”
“정말…… 전하이십니까?”
“죽이고 싶을 만큼 나를 미워했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를 가족처럼 사랑했다. 우리는 평생이 가도 함께할 거라고 믿었다.
“왜……? 대체 왜.”
듣고 있던 마리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워하지 않았어요.”
“……마리아?”
“단지 죽여야 했을 뿐입니다.”
그 한마디에, 미렌은 제 발밑이 무너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