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89)화 (89/133)

어머니

마리아. 그 한마디에 헤겔과 미렌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그들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라고요……?”

“예. 흔한 이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군요. 아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수더분해 겨우 기억이 났습니다.”

마리아.

제 손으로 직접 선택했던, 황후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이.

황성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라이언과 마찬가지로 아직 성인도 되지 않았던 그녀는 기가 죽어 있었다.

처음 보는 시녀들에게 치장을 받아야 했고, 몸이 좋지 않은 덕분에 거동에도 도움이 필요했다.

‘결혼식의 신부라기엔 너무도 볼품없는걸요. 다들 고생해 준 보람이 없네요.’

그러다 거울 속 볼품없는 자신을 발견한 미렌이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동조해 주는 시녀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드가 영애, 함부로 웃으셔서는 안 됩니다. 화장이 무너지세요.’

‘드레스가 흐트러지니 움직임을 최소화해 주십시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저희가 돕겠습니다.’

에드가 영애. 결혼을 하기 전까지 그녀는 분명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공식적인 황후가 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단으로 결혼하게 된 그녀를 두고 시녀들의 은근한 무시와 조롱 섞인 시선도 오갔다. 그때 만난 이가 마리아였다.

‘괜찮으십니까? 따뜻한 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네.’

‘영애께선 웃으실 때 가장 아름다우세요.’

‘다들 웃지 말라고 하던걸.’

‘저들도 시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애들이었으니까요.’

황후의 시녀들은 보통 하급 귀족들의 영애가 선택된다. 마리아가 그 점을 언급하며 조심스레 미렌을 위로했다.

미렌을 위해 말해 주면서도, 시녀들의 입장까지 곤란하지 않게 해 줄 정도로 속이 깊은 이였다. 그렇기에 미렌은 자신의 시녀장을 선택할 때 고민 없이 마리아를 지목했다.

그녀는 꼭, 자신을 위해 준비된 사람처럼 편안했으니까.

‘……전하께서는 가끔, 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으세요.’

문득 오래전 마리아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독사에 물려 고생했을 때였다.

그 당시, 결국 독사를 푼 범인은 찾아내지 못했다. 외부의 침입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서식지가 다른 독사에게 물렸는데도 불구하고.

내부 소행임이 확실했지만 미렌이 먼저 사건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길 거부했다. 자신이 물린 것도 아니었으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아마 그 독사도 마리아가 푼 것일 터다. 똑똑한 그녀라면, 독사가 직접 제 다리를 물게 해 의심을 없앴을 테니까.

그리고 일련의 사건은 미렌과 라이언이 그 뒤로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일을 자제하도록 만들었다.

당시의 마리아는 미렌이 황제와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독사 사건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어째서 내게 낮에 폐하가 오셨다고 알리지 않았지?’

‘그 사랑이 전하의 목을 조일까 두렵습니다. 이토록 연약하신 분의 목을요.’

마리아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황제를 조심하라 말했다. 꼭 정말로 조심해야 할 이에 대한 주의를 돌리는 것처럼.

마리아는…… 지독히도 오랫동안 미렌을 죽이기 위해 준비해 왔던 것이다.

***

미렌은 식사를 하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

식사가 끝나 갈 즈음, 결국 보다 못한 헤겔이 먼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겨우 생각에서 빠져나온 미렌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을 리가요.”

“……역시 그렇지?”

다른 어떤 이가 배신을 했다 하더라도 이토록 충격 받진 않았을 터다.

혼자서 외로이 지내야 했던 황성에서, 마리아만큼 오랫동안 제 옆을 보필한 이는 없었다. 그녀는 미렌의 언니였으며 곧 친구였다.

“아, 이런. 물이…….”

“제가 채워 드리지요.”

식사를 마친 미렌이 빈 물 잔을 발견하고 중얼거렸을 때였다. 어느샌가 다가온 사일런이 다시금 물을 가득 채웠다.

미렌 또한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그녀가 제 무릎에 올려져 있던 냅킨을 거두어 옆으로 내밀었다.

사일런은 트레이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냅킨을 치웠다. 그러며 조심스럽게 미렌의 모든 행동거지들을 살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마지막엔 사일런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내려선 미렌이 뒤늦게 제 실수를 알아차리고 눈을 치떴다.

그러나 사일런은 전과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어느 가문의 영애십니까?”

“……예?”

“기본적인 교양을 배우신 듯하여 여쭈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저는……. 지, 지방에 있는 한미한 가문 출신입니다. 아마 말씀드려도 모르실 터예요.”

그 대답에 사일런이 풋 웃었다. 미렌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가씨……지요?”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고개를 들자 백발이 성성한 사일런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방 귀족들은 냅킨을 이렇게 내려 두지 않습니다. 수도에서 유행하는 양식이니까요.”

그는 미렌 에드가가 태어났을 때부터 옆을 지켜 주던 이였다. 어머니도, 제대로 된 아버지도 없는 미렌에게 가족보다 나은 사랑을 알려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법. 냅킨을 무릎에 올리는 방식. 잔을 들 때 손가락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

“모두 제가 직접 가르친 것들입니다, 아가씨.”

사일런이 따뜻하게 웃었다. 그의 주름진 볼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느리게 흘러내렸다.

아마 사일런 또한 이미 미렌 에드가가 사망했단 소식을 들었을 터다. 그의 몹시도 수척해진 얼굴은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끝까지 보필하지 못한 아가씨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던 사일런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이로부터 느껴지는 익숙한 모습이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사일런은 믿기지 않으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제 이름은 오래된 아이들이 아니면 시종들도 잘 모른답니다. 분명 저를 부르셨지요?”

‘그럴게요, 사일런. 그런데 잠시 들어와 주시겠어요?’

그 부름을 들었을 때부터 사일런은 그녀에게 낯설지 않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사일런 또한 시중을 드는 방식으로 그녀를 시험했던 것이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숨기신 데에는 무릇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사일런이 살풋 웃었다.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가씨가, 제가 보지 못한 곳에서 외로이 돌아가셨을까 봐……. 이 노인, 마음이 편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해요, 사일런. 내가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했어요.”

어렸을 때, 미렌은 사일런에게 이상한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했었다. 물론 당시엔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말할 수 없었던 건 사일런 또한 에드가 공작을 모시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제 이런 상황이 알려지지 않길 바랐다.

“언제부터……셨습니까?”

사일런의 물음에 미렌이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기나긴 이야기가 전해졌다. 사일런은 그 모든 사실들을 거짓이라며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제게 왜 말하지 않았냐며 나무라지도 않았다.

미렌이 모든 이야기를 끝낸 순간 그저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아가씨.”

“사일런은 섭섭하지도 않아요? 알아보지 못했다면……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걸요.”

미렌의 미묘한 투정 섞인 물음에 사일런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제 소망은 언제나 아가씨께서 건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놀라울 것도, 섭섭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아가씨께서 그리되신 이유는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두 개의 삶으로 살게 된 이유?

미렌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사일런이 실마리를 쥐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헤겔 또한 귀를 기울였다. 둘을 살펴보던 사일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마도…… 공작 부인께서 소원을 이뤄 내신 거겠지요.”

“어머니가요?”

“공작 각하께는 말씀드리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다프네 님께서 제게 직접 하명하신 일이니까요.”

집사인 사일런은 오래전, 다프네를 따라 에드가 가문에 들어왔다. 사실 다프네와 발리오딘이 결혼한 것은 무척이나 어릴 때라 사일런은 두 주인 모두를 성심성의껏 모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리오딘보다는 다프네에게 더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그는 다프네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발리오딘에게 그 어떤 것도 알리지 말라는 명이었다.

“아버지께 알리지 않으셨다고요?”

“예. 각하께서는 그저 다프네 님이 미렌 아가씨를 낳다 돌아가신 줄로만 아셨습니다.”

본인이 죽는 날까지도.

표정을 굳힌 사일런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야 일기장 속 이야기가 어째서 그토록 단편적이었는지 이해가 갔다. 발리오딘은 그저 다프네의 몸이 약해져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인데요?”

“허락되지 않은 마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잠깐, 허락되지 않은 마법? 설마 흑마법을 말하는 건가?”

갑작스러운 헤겔의 질문에 사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겔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알 만하군. 사용자의 목숨을 바치면 그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아스타로트’잖아.”

“맞습니다. 다프네 님께서는 결코 손대지 말아야 할 마법을 직접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마법을 들어주려는 미친 마법사는 없었을 텐데? 흑마법사로 낙인찍혔다간 어느 마탑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아주 젊은 마법사였습니다. 늘 커다란 로브를 쓰셨기에 저 또한 얼굴을 뵌 적이 없지요. 이름은 아마…….”

“그거, 설마……!”

“다프네 님께선 멜리크, 라고 부르셨습니다.”

헤겔이 제 이마를 짚었다. 동쪽 마탑의 주인. 멜리크, 그 반쯤 미친 자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헤겔이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사일런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프네 님께서 빈 소원은 무척이나 간단했답니다.”

“무엇이요?”

“아가씨가…… 건강하게 크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렌 에드가는 태어나길 약하게 태어나 평생을 시한부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미렌이 그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때였다. 생각에 잠겼던 헤겔이 그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아스타로트’는 본래 악마의 이름인 것을 알지?”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악마니까요.”

“그 마법에 아스타로트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간단해. 아스타로트처럼 심보가 고약한 마법이라 시전자의 소원을 그대로 이뤄 주지 않으니까.”

다프네가 빈 ‘미렌이 건강하게 크는’ 소원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미렌 에드가가 아닌 또 다른 미렌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

다만 미렌 우드는 곧 미렌 에드가였으므로, 아스타로트의 마법은 어쩌면 이루어졌다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비록 다프네가 바란 방식은 아니었을지라도.

다프네 또한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절벽에 내몰린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니 악마에게 빈 것이다.

그게 비록, 달의 여신이 아닐지라도.

“그래서 아가씨께서 아프실 때면 한편으론 늘 의문이었습니다. 목숨을 바친 다프네 님의 소원이 이뤄졌다면 건강하셨어야 했으니까요.”

미렌 우드는 이제껏 단순한 감기에도 한번 걸려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모두 제 어머니의 소원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리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사일런, 내게 다른 삶이 있다 하더라도요?”

“그럼요, 아가씨.”

사일런이 나직이 말했다.

“다프네 님께서는 아마…… 아가씨가 어떤 방식으로든 부디 건강하시길 바라셨을 겁니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던, 당신의 어머니셨으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