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88)화 (88/133)

복수와 순리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일런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 뒤로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떨리는 손길로 책을 집어 든 미렌이 그 첫 장을 펼쳤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 특유의 거칠거칠한 표면이 만져졌다.

차락.

<사랑하는 미렌을 위해, 이 책을 남긴다.>

첫 번째 페이지에 적힌 한마디. 그녀는 그것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어머니의 흔적이라곤 초상화밖에 보지 못했다. 에드가 공작이 어머니를 추억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한 줄만으로도, 제 어머니의 사랑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다음 순간 페이지가 넘어갔다. 본문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두 번째 페이지 또한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나의 발리오딘에게.>

에드가 공작의 이름이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발리오딘이라 적힌 그 주변 종이가 우글우글하게 주름져 있었다는 점이다.

꼭 그 부분만 물에 젖었던 것처럼.

“네 이름,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어. 스쳐 지나가듯 본 글자라 기억하지 못했을 뿐.”

“……어머니가 이런 걸 남기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일기장이나 편지라곤 없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럼 아마 이 책이 일기장이었을 거야. 아르테미스에 대한 내용이긴 하지만 꽤 사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짧게 말한 헤겔이 그녀 대신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이 뒤부터가 책의 진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아르테미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생기고부터였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 미렌.>

<아이가 생긴 지 넉 달이 흘렀을까. 의원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아이의 체내에서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모든 글들은 수기로 적혀 있었기에, 글자만 보아도 다프네의 당시 마음이 전해졌다. 아이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다는 글자 끝이 엉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이야기들을 처음 본 미렌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니.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죽었냐는 나의 질문에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마나가 없되, 살아는 있다는 말. 나는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마나를 타고난다. 내 아이는 살아 있으나 살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렇게 태동이 느껴지는 나의 아이가 살 수 없다니. 나는 그 모든 게 내 탓처럼 느껴졌다.>

아이가 건강하지 않은 게 제 탓처럼 느껴졌다는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하셨을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당시 발리오딘과도 많은 언쟁이 벌어졌다. 나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 말했고, 그는 아이를 포기하라 명령했다.>

<죽고 싶지 않은 거라면 지금 당장.>

<나는 도저히 내 배로 품은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살아 있는데.>

차락.

그 뒤로도 발리오딘과 다프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책이라기보단 다프네가 남긴 일기장과도 같았다.

차락.

페이지가 넘어갔다. 다음 장부터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때였다.>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전설의 꽃.>

<나는 발리오딘의 발아래에 주저앉아 애원했다. 제발 아르테미스를 구해 달라고.>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달의 여신에게 기꺼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어머니의 글씨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간격과 글자 끝이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발리오딘은, 그 부탁을 거절했다.>

아버지가 아르테미스를 찾지 않았다는 말에 미렌이 숨을 들이켰다.

헤겔은 분명 제 아버지로부터 아르테미스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굴 위해 아르테미스를 찾았단 말인가.

<그 뒤로 발리오딘과의 대화는 끊어졌다.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지만, 내 배 속의 아이가 더 소중했다. 이것이 이기적인 행동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아르테미스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을 고용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뿐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 꽃을 피운다. 나는 보름이 올 때를 한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나와 아이에게 남은 보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뒤엔 어머니가 아르테미스를 찾기 위해 한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를 찾아내는 일에는 진전이 없었고, 곧 출산일이 다가왔다. 아이가 생긴 지 9개월이 흘렀을 때였다.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르테미스는 어쩌면 전설로만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 아이는 나의 배 속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의 진찰을 거부했다.>

<미안하단다.>

<미안해, 미렌.>

<부족한 엄마라 미안해…….>

눈물이 왈칵 터졌다. 그녀는 제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입을 틀어막았다.

사과는 끊어지지 않은 채 몇 번이고 반복됐다. 끝으로 갈수록 글씨체의 힘이 사라져 가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차락.

페이지를 넘기자 몇 줄 되지 않는 문장들이 보였다. 나머지는 모두 빈 공간이었다.

<나는 내 아이를 살리기로 결심했다.>

<그게 비록 달의 여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녀의 글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겨 봤지만 뒤는 모두 빈 공간이었다.

마침내 미렌이 책을 덮으려 했을 때였다. 헤겔이 그 손을 붙잡았다.

“아직 내용이 끝나지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헤겔이 보란 듯 페이지 수십 장을 뒤로 넘겼다. 그곳엔 또 다른 글자들이 남아 있었다.

다만 다프네 에드가의 글씨체가 아니었다. 굵고 선명한, 힘이 느껴지는 글씨체였다. 그녀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게 제 아버지의 글씨란 것을 알아챘다.

<다프네가 죽어 가고 있다.>

<의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내 아내의 몸이 약해지고 있었다.>

<나는 배 속의 그 아이를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미렌의 손이 멈칫했다. 어렸을 적, 제 아버지의 이유 모를 증오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다프네와 반대로 배 속의 아이는 벌레처럼 목숨을 연명했다.>

<마침내 나는 빌어먹을 아르테미스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아닌 나의 아내를 위하여.>

차락.

또다시 페이지가 넘어갔다. 어머니가 썼던 것과 달리 띄엄띄엄 쓰인 내용은 모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저명한 약초꾼으로부터 아르테미스가 1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사실에 절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찾아냈다.>

발리오딘은 기어코 아르테미스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다프네와 전혀 달랐다.

<이름 모를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아르테미스를 빼앗았다. 출산일이 임박한 지금, 나는 타인의 사정을 봐줄 여력이 없었다.>

<아이는 제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며 내 발치에 이마를 대고 빌었다. 제 이름을 걸고 다시 찾아내겠다며 덧없는 약속을 그리기도 했다.>

<아이의 이름은 #$N%…….>

<그 아이에게 보상을 바라거든 에드가 가문으로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나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이의 이름을 적어 둔 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려도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었다.

결국 포기한 미렌이 다음 장으로 넘겼다. 차락, 또다시 페이지가 넘어갔다.

<다프네가 죽었다.>

<또한 아이가 태어났다. 다프네와 꼭 닮은 머리 색을 가진, 미렌.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이야기는 그게 끝이었다. 그 뒤로는 아르테미스의 학명이나 채취 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존재했다.

탁.

씁쓸한 기분으로 책을 덮은 미렌이 젖은 제 뺨을 쓸어내렸다.

아버지가 한없이 미우면서도, 어머니를 몹시도 사랑한 그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제 아비에게 건 기대가 적어서일지도 몰랐다.

“……괜찮아?”

“괜찮아요. 오히려 아버지가 왜 절 그렇게도 미워했는지 이해가 가는 걸요.”

미렌의 덤덤한 태도에 오히려 헤겔이 눈을 찌푸렸다.

어렸을 때의 헤겔은 남의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이 책을 보고도 앞에 쓰인 일기들은 읽지 않았었다. 제일 뒤에 적힌 아르테미스에 대한 정보만 읽고 덮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 이토록 자세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잠시 할 말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요.”

“어?”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어디가?”

차르륵.

그녀가 덮었던 책을 다시금 폈다. 무언가를 찾듯 손가락이 문장을 하나씩 훑어 내렸다.

그러다 멈춘 곳은, 발리오딘이 적은 구절이었다.

<다프네가 죽었다.>

“이게 왜?”

“아버지는 결국 아르테미스를 찾아내셨죠. 그런데 왜 어머니께선 돌아가셨을까요?”

“돌아갔을 때엔 이미 늦었던 거 아니야?”

“그랬다면 ‘다프네가 죽었다’고 쓰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늦었다’가 옳을 테니까요.”

“잠깐, 그럼……. 아르테미스로도 살릴 수 없었다는 건가?”

헤겔의 기막힌 질문에 미렌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헤겔을 바라봤다.

“아르테미스로도 살릴 수 없는 죽음이셨던 겁니다. 그건….”

“자살…….”

그가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러다 놀란 헤겔이 제 입가를 가렸다. 죽은 어머니를 둔 이의 앞에서 꺼낼 단어가 아니었던 탓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남아요. 그렇다면 사용하지 못한 아르테미스는 어디로 갔을까요?”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것 아니야?”

“아니요.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다음 말이 나올 때였다. 문득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잊고 있던 사일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의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럴게요, 사일런. 그런데 잠시 들어와 주시겠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사일런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문이 열리며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미렌이 들어온 사일런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물었다.

“혹 에드가 부인이 돌아가신 뒤 한 아이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까?”

“아이……요?”

에드가 공작이 어렸을 때부터 저택을 관리하던 사일런이었다. 아마 그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 음, 아이라…….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게 있군요. 부인께서 돌아가신 뒤 몇 년이 흘렀을 때입니다.”

“말씀해 주시겠어요?”

“웬 여자아이가 돌려받을 게 있다며 찾아왔답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돌아갔어요. 아직 받을 게 없다더군요.”

직감적으로 헤겔과 미렌은 사일런의 이야기 속 아이가 발리오딘이 빼앗은 아르테미스의 주인임을 깨달았다.

사일런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중에 다시 받으러 오겠다고요. 그때 마침 깨어 계셨던 미렌 아가씨가 제 또래라 반가웠는지 아이를 붙잡고 이름을 물었지요.”

사일런은 오래된 기억이라 잘 생각이 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마침내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마리아 네메시스. 분명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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