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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87)화 (87/133)

아르테미스를 위한 님프

“눈 떠도 좋아.”

미렌은 제 눈가를 가리고 있던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겨우 눈을 떴다. 귓가로 말이 우는 소리 또한 들려왔다.

리키가 그려 낸 이동 마법은 그 수많은 파견대의 인원을 단번에 수도 근처로 옮겨 놨다. 미렌이 놀란 눈으로 리키를 바라보자 그가 헤죽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이동 마법에 자신 있으실 만하네요.”

“그죠? 그죠?! 탑주님이 그 많은 마법사들 중에서 괜히 절 고르신 게 아니라니까요.”

“헤겔 씨가 리키 씨를 선택했어요?”

“그럼요. 공간을 접어 이동하는 제 마법을 보곤 와안전 반하셔서!”

“그게 아니라 이동 마법을 제외하곤 재능이 없는 네가 불쌍해서겠지.”

제 자랑에 신나 들떠 있던 리키의 말을 뚝 자른 건 헤겔이었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리키의 약점을 말해 버렸다.

그에 리키가 성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물론 조금 씩씩거리기만 했을 뿐, 헤겔에게 복수하는 일은 없었다.

“전 이만 갈래요!”

“어. 리키, 마탑으로 돌아가면 정리 좀 해. 과자 먹은 건 치우고.”

“몰라요!”

리키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동 마법의 귀재답게 그가 사라지기까진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로이아가 다가왔다. 그녀의 뒤로는 기사 몇 명이 시립한 채였다.

“그럼, 카르너 님.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아. 마음대로 해. 보고는 네가 올릴 건가?”

“예.”

짧게 묵례한 로이아가 물러서 떠났다. 이곳에서 황성은 멀지 않으니 아마 곧 황제의 귀에도 파견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어갈 터였다.

미렌은 그런 로이아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곧 헤겔이 곁에 다가와 섰다. 주의를 환기시키듯 그가 미렌의 이름을 불렀다.

“미렌, 해야 할 일이 뭔데? 마을 일은 이올라오스를 만나야 해결할 수 있을 거고.”

수도에 오기 전, 미렌은 라이언을 만나는 일과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있다 말했었다.

가장 급한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로이아가 이올라오스를 만난 뒤에야 의논할 수 있을 테니, 당장은 시간이 비었다. 때문에 헤겔이 물어 온 것이었다.

“공작 성에 가고 싶어요.”

“에드가 공작 성? 거긴 어째서?”

“미렌 에드가의 죽음에 대해 조사할 겁니다.”

눈을 내리깐 그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평생을 시한부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던 미렌 에드가지만, 그녀의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더군다나 미렌 에드가는 점차 건강이 나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갑자기 죽다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걸렸던 점은…….

“죽기 전, 마리아가 제게 그러더군요.”

“……뭐라고?”

“좋은 꿈을 꾸라고.”

눈을 감기 전까지 바라보고 있던 마리아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녀는 쓰러져 가는 미렌을 두고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가 꺼진 뒤에도 조그맣게 들려오던 자장가 소리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잠정적으로 마리아가 제 죽음에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미렌은 그것을 밝혀내고 싶었다.

“그런데 공작 성에는 왜?”

“헤겔 씨는 제가 왜 두 개의 몸으로 살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글……쎄.”

“없으실 겁니다. 저조차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으니까요.”

어렸을 때엔 모두가 그런 줄 알아서, 그리고 크고 나서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가지지 않은 의문이었다.

‘전하.’

‘마, 리아……. 왜…….’

‘좋은 꿈 꾸세요.’

미렌은 마리아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자신이 이렇게 살게 된 이유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건 공작 성이었다.

“좋아,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럼 공작 성엔 어떻게 들어가게?”

이마를 찌푸린 헤겔의 질문에 미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헤겔 씨가 생각하실 일이죠.”

“뭐?”

“제 일을 전적으로 도와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프레니티 영주 성에도, 황성에도 잘만 침입하셨는걸요.”

“그게 같은 줄 알아? 영주 성은 워낙 시골이니 보안이 약했고, 황성은 침실 주인인 네가 있어서 어떻게든 가능했던 거지!”

바깥문이야 어떻게든 뚫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내성에까지 잠입하긴 힘들었다. 에드가 공작이 살아 있을 당시 철벽의 성이라고 불렸던 공작 성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미렌의 태도는 꿋꿋했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하아……. 꼭 들어가야 한단 거지?”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렌 에드가의 죽음, 그리고 탄생을 알아보려면 그곳밖에 없었다.

“그럼 바로 가자.”

“지금 바로요?”

“그래. 생각난 방법이 하나 있어.”

무슨, 방법…….

미렌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헤겔이 그녀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이라면 질색하는 헤겔 덕분에 그들은 꽤 오랜 시간을 걸어야만 했다.

***

“……뭐라고요?”

“못 들었어? 벨을 누르라고.”

공작 성 앞에 도착한 그들은 창살을 앞에 두고 있었다.

당연히 몰래 들어갈 줄 알았던 미렌은 헤겔이 벨을 누르라며 턱짓하자 얼굴을 찌푸렸다.

“방법이 이거였어요?”

“그래. 보안 마법도 엄청 걸어 놨는데 이걸 어떻게 뚫고 들어가? 이것밖에 없어.”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겁니다. 사일런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미렌은 자신이 어릴 적 누구보다 완고했던 사일런의 모습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잡상인이라도 찾아왔다간 에드가 공작가의 품격이 떨어진다며 쥐 잡듯 내쫓았었다.

그런 사일런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유약해졌을 리가 없었다.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미렌 우드와 헤겔이라면 그대로 내쫓길 터였다.

“이럴 게 아니라 제가 어렸을 때 사용하던……!”

찌르르르!

미렌이 방심한 사이 헤겔이 팔을 뻗어 벨을 눌렀다. 오랜만에 나타난 방문객에 새 울음소리가 공작 성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당장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내성 문이 열리며 사일런이 직접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미렌은 어서 도망가려 했다. 사일런에게 얼굴 도장이 찍혔다간 입성은커녕 이 근처에서 돌아다니기도 힘들 터였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은 헤겔로 인해 저지됐다. 그는 미렌의 뒷덜미를 꾹 잡은 채 꼿꼿이 그 앞에 섰다.

“누구십니까?”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사일런이 완고한 얼굴로 헤겔을 마주했다. 미렌은 허둥지둥 제 얼굴을 가리면서도 그런 사일런을 힐끗거렸다.

못 본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건만 사일런은 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수척해져 있었다. 미렌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볼 때였다.

“에드가 공작을 만나러 왔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철창을 사이에 둔 헤겔이 뱉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렌이 경악하는 얼굴로 헤겔을 바라봤다. 이미 죽은 에드가 공작을 만나겠다니? 당혹스러운 말이었다.

사일런 또한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면식도 없는 이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당당했다. 그가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가, 발리오딘 에드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

내내 미간을 좁힌 채 헤겔을 바라보던 사일런이 점차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또한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탓이다.

“위대한, 남쪽 마법사라면……! ‘헤겔 카르너’입니까? 아르테미스를 약속했던?”

“그래.”

사일런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사이 헤겔이 어서 문을 열라는 신호로 철창을 톡톡 두드렸다.

겨우 표정을 관리한 사일런이 손을 들어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곧 미렌과 헤겔의 앞을 막아섰던 두꺼운 철창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열렸다.

한달음에 다가온 사일런이 그런 헤겔을 향해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겔 카르너 님. 공작 각하로부터 들은 바가 있습니다.”

“아아, 뭐…….”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허리를 편 사일런이 눈을 돌려 고개를 푹 숙인 미렌을 바라봤다.

미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지금, 사일런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쩐지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에드가 공작을 대신해 어렸을 때부터 제 아버지 역할을 해 주던 사일런의 얼굴을……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내 부하.”

“일행이셨군요.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깨를 으쓱인 헤겔은 곧 앞서가는 사일런의 뒤를 따라갔다. 미렌이 제 뒤에서 어정쩡하게 따라오자 그녀의 팔을 붙잡아 제 옆으로 당기며 속삭였다.

“당당하게 굴어. 왜 그래?”

“사일런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입니다.”

“속이긴…….”

“부르셨습니까?”

앞서가던 사일런이 용케도 제 이름을 듣곤 고개를 돌렸다. 미렌과 헤겔은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사일런이 안내한 곳은 오래된 알현실이었다. 잠시 소파에 앉으라 말하고선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일런은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가져오겠습니다.”

뚜벅, 뚜벅.

곧 사일런이 알현실을 떠났다. 둘만 남게 되자 겨우 숨을 편하게 내쉰 미렌이 득달같이 헤겔에게 물었다.

“아르테미스를 약속했다니요? 아버지와 약속했던 게 있습니까? 그게 뭔데요?”

“하나씩 물어. 침 튀겠다.”

“저한텐 그런 말씀 안 하셨잖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10년도 더 된 일을 누가 기억해?”

헤겔 또한 그때의 약속을 이제와 꺼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한 이 약속이 정말로 먹혀들 줄도.

“무슨 약속이었는데요?”

“간단해. 그가 알려 준 아르테미스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을 것. 그리고.”

“……그리고?”

“아르테미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혹은 찾게 되면 언젠가 공작 성을 찾아와 정보를 남길 것.”

물론 당시 헤겔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보를 넘겨 봤자 제게 좋을 점이라곤 하나도 없잖은가?

그래서 그때 헤겔은 공작과 약속을 하면서도 그가 멍청하다 판단했다. 자신이 정보를 넘기지 않으면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며.

“이 공작 성에는 오로지 아르테미스를 위해 집필된 책이 있어.”

“이곳에요? 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그 책의 저자는…….”

“실례하겠습니다.”

어느샌가 돌아온 사일런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렌과 헤겔은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곧 다가온 사일런의 손에는 헤겔이 말한 그대로 책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헤겔의 앞에 내려 두며 설명했다.

“전에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래. 달라진 게 없네.”

“공작 각하께서 보관 마법을 걸어 두셨으니까요. 만일 헤겔 카르너가 찾아오면 건네주라는 말도 함께 남기셨습니다.”

소파 앞 테이블 위로 오래된 가죽 표지의 책이 놓였다. 그리고 정중앙에 적힌 ‘아르테미스’라는 단어와 함께, 모서리에는 저자의 이름이 박힌 채였다.

저자의 이름을 발견한 미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자, 다프네 에드가.>

익숙하지만 누구보다 낯선 이름.

미렌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글자를 엄지로 훑어 내렸다.

다프네 에드가.

그녀는 미렌 에드가의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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