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86)화 (86/133)

추악함은 간절함에서 비롯되기에

“지금 당장 말입니까?”

“예. 차후 전쟁이 제대로 시작되면 그때는 이올라오스 경께서 이끌 테니까요. 때문에 모든 기사들에게 귀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렇군요.”

명이 떨어진 기사들에게 더 부탁할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잃은 미렌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기색에 로이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로이아는 이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다만 귀환 후 이올라오스 경께 프레니티 영지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비록 당장은 구하러 갈 수 없지만…… 이올라오스 경께선 분명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로이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게 끝이었다. 미렌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더는 로이아가 걱정하지 않도록 고개를 들었다. 로이아를 바라보던 미렌이 이내 허리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이아 경.”

“아니요, 우드 님. 허리를 굽히실 필요라곤 하등 없습니다. 저는 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놀란 로이아가 서둘러 달려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상관의 지인에게 인사를 받는다는 건 기사인 로이아로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렌은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한 도움 따위는 없는걸요. 응당 해야 할 인사를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제가 불편합니다. 일어서 주십시오.”

로이아의 말에 미렌은 결국 곧은 자세로 섰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미렌이 씩 웃으며 눈을 찡그렸다.

로이아도 그 웃음을 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저 매력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미렌을 보고 있자면, 같은 여자인 로이아조차도 반할 법하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내 로이아는 기사들에게 초소를 정리하란 명령을 내리러 떠났다. 뒤에 남아 있던 헤겔이 미렌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 기다리게?”

“아니요. 물론…… 저도 함께 수도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미렌은 굳은 얼굴로 결심을 마쳤다. 일단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라이언을 만나서…….

라이언을 만나서,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사실은 내게 다른 몸이 있었다는 말?

아니면,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

아직 미렌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일단 그를 만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헤겔이 그런 미렌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듯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물어 왔다.

“마차라도 타고 가게?”

“……파견대가 수도로 귀환할 때 사용하는 게이트를 함께 탈 생각입니다.”

“그거, 우리 마법사들이 그리는 마법진인 건 알고 있어?”

“수십 명이 이동하는데 한 명이 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로이아 경도 이해해 주실…….”

“누구 마음대로?”

헤겔이 샐쭉, 웃음을 지었다.

“내가 허락 못 하겠는데?”

“으응? 탑주님, 그 마법진은 제가 그리는데요? 미렌 님, 같이 가요!”

“리키.”

무섭도록 낮은 목소리로 리키를 부른 헤겔이 순식간에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리키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렌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물었다.

“마법진을 그리시는 리키 경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리키가 내 부하야.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게?”

“그게 무슨……!”

“이제 내 도움은 받지 않겠다며?”

정곡을 찔러 오는 헤겔의 물음에 미렌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가 다소 치사하게 나오는 듯한 감은 있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미렌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옆 영지인 데저트로 가서 사설 게이트를 이용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함께 돌아가고 싶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

“한 가지도 불편한데 두 가지나요?”

“별로 어렵지 않아.”

헤겔이 제 기다란 검지를 펼쳐 들었다.

“첫 번째, 앞으로 내 도움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것.”

“그건……!”

“말했잖아. 이제 네가 내 도움을 불편해야할 이유 따윈 없어.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오면 그때 생각해 보지.”

그는 간접적으로 미렌 에드가의 삶이 끝났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미렌 에드가로서의 삶을 마쳤고, 결혼을 한 몸도 아니었다. 그러니 헤겔의 도움을 거절할 이유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라이언의 제대로 된 소식조차 듣지 못한 상태였다. 적어도 그가 잘 지낸다는 이야기라도 들었다면 포기할 수 있을 터였다.

“두 번째는 수도에 돌아가도 황제를 직접 만나지 말 것.”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데저트 영지로 가겠어요.”

“데저트 영지도 지금 전쟁 때문에 영지민이 아니고선 받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보네? 이 기회를 놓치면 너, 마차를 타고 두 달은 가야 해.”

약 올리듯 말하는 헤겔의 태도에 미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두 달이라니. 가족들을 생각했을 때 그 정도 기간을 수도에 할애할 수는 없었다.

미렌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자 헤겔이 이제야 그녀를 달래듯 속살거렸다.

“어차피 평민이라 넌 황제를 만날 수도 없어. 그의 소식이 듣고 싶은 거면, 그래. 내가 전해 주지.”

“그럼, 제 조건도 들어주세요.”

“조건?”

헤겔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첫 번째. 앞으로 헤겔 씨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전적으로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렌의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그녀는 이제껏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겨우 헤겔에게 했다.

“폐하가 현재 어떤지……. 제가 죽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모두 말해 주세요.”

생각지 못한 조건에 헤겔이 표정을 굳혔다. 폐하의 소식에 대해 리키도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기에 이제 그녀가 물어볼 수 있는 곳은 헤겔뿐이었다.

물론 수도로 돌아가면 이올라오스든, 어느 귀족이든 잡고 물으면 된다지만 당장 여기선 헤겔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그에게 도움을 구했다.

“미렌 에드가가 죽은 뒤 황제는 일주일간 황후의 침실에서 칩거했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황제의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제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미렌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라이언의 고통이 그녀에게도 생생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음부턴 의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뒤로는 별 게 없어.”

“그게, 그게 무슨 소립니까? 폐하께서……!”

“본인을 추스르고 나온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국정에 참가했으니까. 믿기지 않는다면 로이아에게 물어도 좋아. 그녀도 이올라오스로부터 대강의 소식은 전해 들었겠지.”

헤겔이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저 멀리서 기사들을 다루고 있는 로이아를 턱짓했다. 바쁜 그녀를 바라보던 미렌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헤겔을 바라봤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폐하께선…… 더는 슬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미렌은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안도와 더불어 실망이 찾아온 기분.

라이언이 제 죽음으로 하여금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완전히 잊길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그가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렸어.”

“……무슨…….”

“더 이상 자신의 앞에서 황후의 이름을 꺼내지 말라, 는.”

쿵.

미렌의 심장이 아래로 추락했다. 자신을 완전히 잊으려는 그의 명령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던 미렌이 제 가슴팍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이자 헤겔이 놀라 다가왔다. 미렌의 뺨 위로 굵은 물방울이 뚝, 뚝 흘러내렸다.

“제가, 제가…… 그토록 미우셨을까요.”

“……아니.”

“폐하께서는, 황제이시니……. 흠이 되지 않으려면 그게 옳은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자꾸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가장 빛나는 태양.

그 찬란한 빛이 꺼지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그의 그림자가 되어도 좋으니 자신의 황제만큼은 언제까지나 빛나기를 꿈꿨다.

그러기 위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건만…….

막상 다가온 죽음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무자비했으며, 또한 차가웠다. 미렌은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미렌 에드가의 죽음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비록 멍청하게 죽어 버린 폐비는 되지 않았으나.

죽어 간 모든 이가 그러했듯 미렌 에드가 또한 잊혀 갈 것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라이언에게서마저도.

허리를 굽힌 그녀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헤겔이 서둘러 그녀의 등을 둘러 안았다. 미렌을 품에 안은 헤겔이 천천히 숨을 내쉬라며 귓가에 속삭였다.

토닥. 토닥.

그의 길고 섬세한 손이 일정한 박자로 등을 두드려 왔다. 미렌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듯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오래도록 울었다.

그녀의 눈이 발갛게 물들 때까지 헤겔은 그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달래는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완벽한 거짓은 조금의 진실을 섞어 탄생한다.

헤겔은 자신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약해졌을 때, 그 틈을 파고들어 껴안은 지금의 행동 또한 옳지 않음을 인정했다.

다만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누구보다 명석한 뇌를 가졌다. 그랬기에 그의 머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선택지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그런 선택지 중 하나였다. 헤겔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수도로 돌아가자.”

“……예.”

“황제를 만나는 일은 관둬.”

겨우 눈물을 멈춘 미렌이 헤겔의 품속에서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눈을 감아 막았다.

“테룬 공국으로 인해 수도의 분위기가 좋지 못해.”

“…….”

“지금 그를 흔들어선 안 된다는 걸…… 너도 알잖아.”

헤겔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 네가 사실 미렌 에드가였음을 알려 봤자, 황제인 그는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다가가지 말라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심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던 미렌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나지막한 대답에 헤겔은 미렌을 한 번 더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는 미렌이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턱을 꼿꼿이 세워야만 했다.

제 얼굴이 어떤지는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든, 이것을 그녀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비겁하다는 것을 안다. 가장 약할 때를 노려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 갔다.

그러나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 아니, 어쩌면……. 현명한 그는 알기를 거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릇, 모든 추악함은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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