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
헤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에 마음이 급해진 것은 미렌이었다. 그녀가 헤겔의 옷자락을 조금 더 잡아당기며 다시금 물어왔다.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폐……!”
“알려 주기 싫은데.”
“네?”
오랫동안 기다린 대답은 허탈할 정도로 짧았다. 딱 거기까지만 말한 헤겔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쥐고 있던 옷자락도 놓친 미렌이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발걸음을 재게 놀려 속도를 맞춘 미렌이 자꾸만 같은 것을 물어 댔다.
“알려 주기 싫다니요? 어차피 로이아 경께만 가도 들을 이야깁니다. 그냥 알려 주면 되잖아요.”
“그럼 로이아 경에게 듣지 그래.”
헤겔의 눈썹이 까닥였다. 무언가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쯤 되자 미렌도 더는 헤겔을 붙잡을 수 없었다. 곧 어디선가 튀어나온 리키가 헤겔과 미렌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탑주님! 자꾸 어딜 다녀오세요? 수도에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요!”
“리키, 입 다물어.”
“수도요? 헤겔 씨, 수도에 다녀오셨습니까?”
리키의 입에서 나온 수도라는 단어에 미렌이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자신이 수도에 다녀온 사실을 들킨 헤겔은 귀찮게 됐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리키도 뒤늦게 헤겔의 옆에 선 미렌을 보았는지 쪼르르 달려왔다. 그가 그녀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어! 그으, 그!”
“……안녕하세요. 남쪽 마탑에서 뵙고 처음이네요.”
“어어, 그……! 공문서 사기 쳤던 사람!”
“전 사기 친 적이 없는걸요.”
미렌의 당당한 한마디에 리키가 억울해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혼자 제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은 리키였다.
진짜 전쟁이 나는 바람에 결국엔 기사단과 함께하게 된 터라 크게 억울하지도 않았다. 리키가 속으로만 툴툴거리고 있을 때였다.
미렌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수도에 다녀오셨어요?”
“네! 제가 이동 마법 전문이라 탑주님을 모시고 같이 황성에 다녀왔어요. 다음 명령을 들으러요.”
미렌이 휙 고개를 돌려 헤겔을 바라봤다. 이미 그는 저 멀리 산속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직접 황성에 다녀왔다는 사람이 왜 알려 줄 수 없다는 건가?
결국 미렌은 자꾸만 딴청을 피우는 헤겔을 포기하고 목표를 바꿨다. 리키가 함께 다녀왔다면 그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
“폐하께선 잘 지내고 계신가요?”
“폐하요? 음…….”
리키가 애매모호한 얼굴로 대답을 꺼렸다. 언제나 해맑은 리키마저 그런 반응이자 미렌은 왜인지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잘, 못 지내십니까?”
“그런 건 아닌데. 으음……. 그걸 잘 지낸다고 해야 할지, 못 지낸다고 해야 할지.”
“왜, 왜요?”
으음……. 리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황성에서 만나고 온 황제 폐하의 모습은, 어딘지 이상했기 때문이다.
‘국경은 성공적으로 보완을 마쳤나?’
‘예, 폐하! 마탑주님께서 고생하셨어요.’
리키는 제 상관인 헤겔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폐하, 라이언은 무감각한 얼굴로 그런 리키와 헤겔을 한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심하고 위압적인 태도야 예전부터 그랬다지만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그렇게 묘한 침묵에 리키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즈음. 곁에 있던 헤겔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황후 전하께선 어떻게 돌아가신 겁니까.’
예고도 없이 들어간 질문이었다. 제 상관의 난데없는 공격에 리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빠른 것은, 헤겔을 향해 날아간 검 한 자루였다.
정확히 헤겔의 목을 노리고 날아간 검은 헤겔이 방어 마법을 둘러 둔 덕분에 끔찍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대신 검이 스쳐 지나간 뒤로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 반쯤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후가 돌아가셨다니.’
‘…….’
‘그게 무슨 소린가, 마법사?’
라이언이 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저번 트리온 백작도 그렇고. 자꾸만 잘 살아 있는 황후를 두고 죽었다고 하다니. 다들 정말 죽고 싶은 건가?’
라이언의 표정 없는 얼굴이 리키와 헤겔을 내려다봤다. 그 눈을 마주한 리키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눈.
분명 황제는 살아 있건만, 꼭 죽은 것처럼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 눈은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리키는 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헤겔은 마찬가지로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폐하.’
‘말하라, 카르너.’
‘황후 전하께선 돌아가셨습니다.’
콰앙!
헤겔의 한마디에 황좌가 날아갔다. 엉망이 되어 버린 황좌를 바라보던 헤겔의 눈이 다시 라이언을 향했다.
라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저벅저벅, 그곳을 내려와 헤겔의 앞에 섰다.
이윽고 그가 헤겔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죽지 않았어.’
‘황, 후 전하께선…… 돌아가셨습니다. 포기하십시오.’
‘입 닥쳐라.’
헤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놀란 리키가 서둘러 두 사람을 말리려던 순간, 황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와 눈이 마주친 리키는 꼭 홀드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공포였다.
‘내 아내는, 지금 잠시 잠이 들었을 뿐이야.’
‘……하아, 그렇습니까?’
헤겔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리키가 속으로 제 상관에게 제발 그만하라며 간절히 빌어 댔다.
‘깨어나시거든 제게 꼭 말씀해 주십시오. 진찰은 이 헤겔 카르너가 볼 테니.’
그 한마디에 헤겔의 멱살을 쥔 채 들어 올렸던 라이언이 천천히 그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툭, 마침내 헤겔의 발이 땅에 닿자 그가 완전히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헤겔은 거칠게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막혔던 숨이 한 번에 들어오며 숨 쉬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라이언은 그런 헤겔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지.’
대화가 끝난 듯 라이언이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갔다. 그러다 문득 그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라이언이 물었다.
‘황후가 쓰러졌다는데, 슬퍼하는 기색조차 없군.’
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도록 기침을 토해 내던 헤겔이 그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은 헤겔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 곁에 서 있던 리키가 헤겔의 얼굴을 확인했다. 리키는 다시금 제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저는 단 한 번도, 황후 전하에게 마음을 가진 적이 없다고.’
헤겔 카르너가 웃고 있었다.
***
“로이아 씨! 여기 미렌 우드 님이 오셨어요!”
“리키 님, 분명 제가 로이아 ‘씨’가 아닌 로이아 ‘경’이라고 불러 달라 했지 않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치만 입에 붙어서 어쩔 수가 없어요.”
“주의해 주십시오.”
리키가 헤헤 웃자 로이아도 더는 그를 나무라지 못했다. 리키는 대신 제가 데려온 헤겔과 미렌을 양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는 사이시라면서요? 미렌 님이 로이아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대요.”
리키는 방금 전 했던 로이아의 말을 곧바로 잊어버리며 해맑게 소개했다. 로이아의 한숨이 깊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리키를 차치하고, 결국 로이아는 일단 오랜만에 만난 미렌에게 인사를 하려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우드 님.”
“로이아 경도 잘 지내셨어요?”
“예.”
미렌이 조심스럽게 로이아 경이라고 부르자 그녀도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테넷 경이라 불렀지만 이젠 이름으로 부를 때도 된 것이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은 미렌도 좀 더 편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프레니티 영지 출신입니다. 영지민들을 구하고 싶어 찾아왔어요.”
“사람들이 영지 내에 갇혀 있습니까?”
“맞아요. 프레니티는 아시다시피 테룬 공국의 병사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로이아는 부단장이긴 했지만 일단 이 파견대 일행의 총책임자였다. 그리고 이 정도 인력이라면, 비록 테룬 공국의 병사들을 모두 정리할 순 없더라도 영지민들 정도는 구해 낼 수 있을 터였다.
“영지 내에선 현재 살인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모두 테룬 공국 병사들의 짓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프레니티 영지민들은 분명 모두 테룬 공국 출신일 텐데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렇게 불리는걸요.”
배신자.
그 한마디에 로이아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테룬 공국은 애초부터 가난한 프레니티 영지민들을 반환 받으려는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무사히 보호받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로이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테룬 공국의 전쟁 습성을 생각하면, 배신자라 낙인찍힌 영지민들을 어떻게 대할지 짐작이 갔다.
미렌은 제 사적인 이야기를 제외한 채 로이아와 기사단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사로운 일에 기사단이 나설 수 없단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
“하지만 이대로 가면 프레니티 영지민들은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요.”
고향인 테룬 공국은 그들을 버렸다. 워로덴 제국 또한 귀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레니티 영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레니티 영지민들은 어떻게 살아남으란 말인가?
그녀는 한 명의 프레니티 영지민으로서, 로이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드립니다.”
그 직관적인 구걸에 매번 딱딱한 표정만 짓던 로이아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 상관의 지인인 미렌 우드가 이런 부탁을 해 오니 그녀로선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꽤 오랫동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던 로이아는, 마침내 대답했다.
“당장 도와 드릴 순 없습니다.”
“어째서요? 전쟁 중 일반 백성들을 구해 내는 건 기사단의 첫 번째 원칙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다만 저희에게도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명령이 내려왔다는 말에 미렌이 얼굴을 굳혔다. 기사인 그녀에게 명령이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미렌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장 도움을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명령이…… 뭔가요?”
로이아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곁에 선 헤겔을 바라봤다. 헤겔 또한 로이아와 마찬가지로 일행의 총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동의를 얻어 낸 로이아도 곧 입을 열었다.
“수도로 귀환하라는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