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남쪽의 마법사
미렌이 눈을 들었다. 제 앞에 내려온 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그것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끌어당겨져 일어섰다. 다만 발목에서 올라오는 불쾌한 고통에 미렌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질렀다.
“읏!”
“다쳤어?”
손을 잡아 주던 헤겔이 놀라 서둘러 달려왔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 살피려 했을 때였다.
“괜찮습니다.”
미렌이 절뚝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헤겔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그는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더니,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다친 것 같아서 봐주겠다는 거잖아. 내가 치료 계열에도 두각을 보였다는 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네가 그렇게 내외하는 게 더 우습다는 건 아냐? 발목이나 내밀어.”
헤겔이 특유의 귀찮아하는 목소리로 제 무릎에 손을 올렸다. 주저하던 미렌은 결국 헤겔의 손 위로 발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발목을 다친 채 버티고 있어 봐야 짐밖에 더 되지 않았다. 그녀가 가야 할 길은 제법 멀었으니까.
헤겔의 손에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제 발목에 따스한 감각이 닿는 것을 느끼곤 질문을 던졌다.
“국경에서……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아아, 뭐. 내가 갔는데 실패했을 리가 없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헤겔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가 그의 마음을 알게 되어 서로가 불편해졌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파견대는요?”
“다음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서 아직 국경 쪽에 초소를 짓고 머물러 있어. 나도 거기서 온 거고.”
“로이아 경도 거기 있습니까?”
그 질문에 미렌을 올려다보던 헤겔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대강의 응급 처치가 끝난 미렌의 발목을 잡아 바닥에 내려 두었다. 차갑게 식은 손이 발목에 닿자 움찔 놀랐던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제대로 섰다.
“로이아 경은 왜?”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부탁? 무슨?”
그 질문에 미렌은 잠시 말하기를 주저했다. 헤겔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간 또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기색을 눈치챈 헤겔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내가 불편하면, 그냥 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북쪽 마탑에서 일 이후로 날 불편해하고 있잖아. 너.”
헤겔은 미렌을 산속에 두고 떠나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 일어서 반쯤 몸을 돌리기도 했다. 그 태도에 미렌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헤겔 씨, 전 결혼한 사람이에요.”
“미렌 우드는 내가 알기로 미혼인데.”
“그 말이 아니라는 것, 아시잖습니까.”
그의 장난스러운 어조에도 미렌은 넘어가지 않고 부러 딱딱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 모습에 헤겔이 픽 웃었다.
“미렌 에드가?”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이름에 미렌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눈을 감은 사이 헤겔의 얼굴 위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 사람 죽었어.”
단호한 한마디에 미렌이 두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장난스럽지 않은 태도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헤겔이 있었다.
그는 미렌에게 주지시키듯 한 번 더 말했다.
“이제 못 살아나.”
또 다른 자신의 죽음.
그녀는 제 볼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다시 비가 오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제 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미렌은 그것을 깨닫고서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말 못 할 슬픔이 쏟아져 내렸다.
“받아들여.”
“……예.”
“너는 이제 미렌 우드로 살아야 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미렌은 붉어진 눈가를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헤겔이 한 걸음 다가와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한없이 냉정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미렌을 향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넌 충분히 노력했어.”
“무엇을요?”
“멍청하게 죽어 버린 폐비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며. 그 어떤 백성도, 신하도 널 그렇게 기억하지 않아.”
‘이대로 멍청하게 죽어 버린 폐비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요. 그 삶도 내가 살아온 삶이야.’
처음으로 쓰러졌던 날, 미렌은 헤겔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이제껏 죽음을 핑계로 자신이 미뤄 왔던 모든 일을 바로 잡고 싶어서.
늦었다 할지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미렌 에드가 또한 그녀가 살아온 삶이기 때문이다.
문득 헤겔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수도에선 모든 백성들이 죽은 황후를 애도해.”
“…….”
“모든 귀족들은 누구보다 총명하고, 누구보다 자애로운 황후였다고 회고하지.”
사교 파티를 열어 귀족파와 황제파를 가리지 않고 귀족들의 기부 열풍을 불게 했다. 그 모든 구제품들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힘이 되어 줬다.
공작 부인의 죽음으로 인해 가라앉아 있던 축제의 사기를 올려 준 건 황후 미렌 에드가였다. 가난한 여인마저 품에 안아 주는 황후의 모습은,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한 국경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대신들에게 그녀는 해답을 알려 줬다.
모두를 압도할 만한 위세는 없었으나, 모두를 품어 낼 만한 자애로움이 그녀에겐 있었다.
미렌 에드가는 연명한 삶으로 많은 것을 바꿔 냈다. 이젠 그 누구도 죽은 그녀를 두고 ‘멍청하게 죽어 버린 폐비’로 기억하진 않을 터였다.
“어때.”
“…….”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어?”
‘네가 원하는 걸 이루어 줄게.’
‘…….’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가 약속하지.’
물어 오는 헤겔의 얼굴 위로 몇 달 전 약속을 해 오던 그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가 맞았다. 꼭 악마처럼, 혹은 천사처럼 자신이 약속한 모든 것을 철저히 지켜 냈다.
그의 위로와도 같은 한마디에 미렌은 꺽, 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제껏 그녀에겐 또 다른 자신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것은 미렌 우드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다가온 헤겔은 고개 숙인 미렌의 앞에서 잠시 손을 들었다. 가늘게 떨리는 저 어깨가 그토록 처연해 보였다.
그러나 들어 올린 손은 결국 닿지 못하고 다시금 내려졌다.
그것이 아직은 제게 허락되지 않은 일임을, 헤겔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일단 파견대가 있는 곳으로 가자. 프레니티 영지민들을 도와주고 싶다며.”
“더 이상 헤겔 씨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요.”
“내가 불편해?”
“불편한 게 아니라…….”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미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눈가에 붉은 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제법 진정된 채였다.
헤겔은 그런 미렌을 내려다보다 흠, 하고 소리를 내더니 결론을 내렸다.
“이건 내가 도와주는 게 아닌데.”
“……예?”
“로이아 테넷이 결정하겠지. 그를 설득하는 건 네 일이고.”
그럼 됐지?
단순하게 결론을 내 버린 헤겔은 파견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렌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보다 한 걸음 앞선 헤겔은 담담한 태도로 계속해서 말을 붙여 왔다.
“불편할 필요 없어.”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내가 널 좋아하는 게 불편하다는 거잖아.”
“그야 전 이미 결혼을 했으니까요.”
“난 미렌 에드가를 좋아한 적 없어. 복숭아나 수확하며 웃는 미렌 우드를 좋아한 거지.”
그녀는 연이어 헤겔의 마음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처 받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덤덤해서, 어쩌면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웃음을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제겐 미렌 우드와 미렌 에드가가 하나였어요.”
“그럼 나는 널 좋아하지 않는 걸로 해.”
헤겔의 이상한 논리에 미렌이 미간을 좁혔다.
“넌 미렌 우드와 미렌 에드가가 하나처럼 느껴졌다며. 난 그게 아니니까 좋아하지 않는 걸로 하자고.”
“……그게 말이나 됩니까?”
“왜 안 돼? 난 미렌 우드를 좋아한 거야. 미렌 에드가에게 마음을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
미렌이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헤겔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 고위 귀족 특유의 말투가 묻어나는 미렌 에드가를 어떻게 좋아해? 오해하지 마라, 너.”
“그건 황후니까 어쩔 수……! 하아. 장난 그만 치세요.”
“장난친 적 없어.”
우뚝. 헤겔이 멈춰 섰다. 따라가던 미렌은 갑작스레 멈춰 선 헤겔 때문에 그의 등에 코를 부딪쳐야 했다.
그녀가 제 코를 움켜쥐고 눈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헤겔은 이미 돌아서 미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장난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널 좋아한 게 아니라, 미렌 우드를 좋아한 거야.”
“…….”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가 허리를 굽혔다. 미렌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헤겔이 작게 속삭였다. 그 간지러운 속살거림에 미렌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내게 넌 결혼한 적이 없다는 뜻이야.”
말을 마친 헤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서 길을 떠났다.
멍하니 있던 미렌이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순간 어이가 없어 곧장 대답하지 못했지만 곱씹을수록 열이 올랐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밀을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어, 그래.”
“이럴 거면 차라리 도와주지 말지 그랬어요!”
“그래, 그래.”
헤겔은 미렌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따금씩 새끼손가락으로 제 귀를 파 대기도 하는 게,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혼자서 화를 내던 미렌도 지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사이 그들은 파견대가 머무르고 있는 임시 초소와 가까워졌다. 저 멀리 유난히 키가 큰 로이아 테넷의 실루엣도 보였다.
그녀를 발견하자 미렌은 잠시 걸음을 망설였다.
프레니티 영지민과 관련하여 도움도 청해야 했지만, 그녀가 로이아를 찾아온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던 미렌은 결국 헤겔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한량처럼 걸어가던 헤겔이 그 손길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미렌은 대답하기 전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헤겔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조금 전, 미렌 에드가의 얘기를 할 때.
이상하게도 헤겔이 유난히 제 입에 올리지 않던 이야기였다. 막상 그녀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은 미렌 에드가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도, 신하들의 대응도 아니었는데.
“폐하는요?”
“…….”
“제가 죽은 뒤에, 폐하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질문에 헤겔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