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83)화 (83/133)

나의 비겁한 구원자

허억, 헉…….

어두운 밤.

프레니티 영지의 오래된 주택 2층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새벽 중에 일어났던 그렌의 귓가가 쫑긋거렸다.

그렌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제 누나가 머무는 2층 계단으로 향했다. 타박, 타박. 아이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누나……?”

그렌이 다가갈수록 방 안쪽에선 이상한 소리가 났다. 때때로 비명이 들리기도 했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이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누나였다. 그렌은 두려움에 울먹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끼이익.

녹이 슨 경첩에서 특유의 불쾌한 소음이 났다. 그렌이 제 누나의 이름을 부르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으으, 으…….”

침대 위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은 인영이 있었다. 그 익숙한 실루엣에 그렌이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누나, 누나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렌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찼다. 분명 제 누나의 목소리는 맞는데, 꼭 누나는 이미 어둠에게 잡아먹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침을 삼키던 그렌은 덜덜 떨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그래도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누나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허억.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미렌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이마 위로 채 식지 않은 땀 한 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동공을 크게 벌린 채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그녀는, 마침내 주변을 둘러보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렌……?”

“누나, 왜 그래. 흐어엉.”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렌이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 안겼다. 미렌은 거칠게 뛰어 대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얼떨결에 그렌을 안아 주었다.

지독한 악몽을 꾸기 시작한 지 벌써 2주째였다.

호흡이 워낙 불안정해 이틀 전에는 아버지가 올라오신 적도 있었다. 오늘은 그게 아버지가 아니라 그렌이었을 뿐이다.

“미안, 누나가 미안해…….”

“으응, 아니야.”

미렌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그저 그렌을 껴안아 주었다.

악몽의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꿈을 꾸지 못하는 이 현실을 아직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렌 에드가가 죽었다.

그리고 미렌 우드는, 이제 하나의 몸으로만 살아가고 있다.

그 언젠가 미렌 에드가가 쓰러졌을 때 며칠 동안 황후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때와는 달랐다.

미렌은 자신이 죽어 갈 때의 감각을 조금도 잊지 못했고, 매일 밤마다 죽음의 악몽에 사로잡혔다.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다는 충격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나.”

“응?”

“우리 언제까지 집에만 있어야 돼? 흐윽, 누나랑 같이 시장에 가고 싶어.”

어린 그렌의 물음에 미렌이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테룬 공국 병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쥐 죽은 듯이 산 것도 벌써 며칠째였다.

차라리 자유롭기라도 했으면 어떻게든 라이언을 찾아가기라도 했을 텐데. 물론 그는 믿지 못할 터다. 그러나 알려 주고 싶었다.

당신을 버리고 간 게 아니라고.

숨기고 싶어서 숨겼던 게 아니라고.

자신만큼이나 절망에 빠져 있을 그에게,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신문마저 끊긴 이 머나먼 영지에서 황제의 소식을 들을 수단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렌, 조금만 더 기다리자. 먹고 싶은 게 있는 거야?”

“복숭아. 나 복숭아 먹고 싶어.”

나갈 수 없다는 말에 시무룩해진 그렌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각이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제 동생을 내려다보던 미렌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 이렇게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렌, 내려갈까?”

“응, 응!”

그렌의 손을 잡은 미렌이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계단 아래에선 그들의 부모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곧 해가 뜨는걸. 일찍도 아니란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미렌이 마침내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가 지원군을 요청하러 다녀올게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테룬 공국 병사들이 프레니티 영주 성을 장악하고 있단다. 그들의 눈을 피해서 영지를 벗어나는 게 쉬운 줄 알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저 숨어만 있잖아요. 더군다나…… 식량도 점점 떨어져 가고요.”

프레니티 영지민들과 테룬의 병사들은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무시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테룬의 병사들이 영지민들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끔씩 산에서 시체가 나와도, 사람들은 모두 그러려니 했다.

그게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본 것을 못 본 척하고, 들은 것을 못 들은 척해야만 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만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었다.

테룬 공국의 병사들이 프레니티 영지민들을 말살하지 않은 이유야 간단했다. 병사들에겐 영지민들이 곧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에나 복숭아를 수확하는 우드네와는 연관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농작물을 수확하는 족족 빼앗기고 있다 들었다.

구해 주러 올지도 모르는 지원군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미렌은 가족들의 상태도 확인했으니 우선 자신이 나가 파견대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여자애 혼자 어떻게 탈출하겠다고. 차라리 이 아빠가 가마. 너는 여기서 기다려.”

“프레니티 뒷산을 따라 달리면 국경이 나와요. 거기에 수도에서 온 파견대가 있을 거예요. 이곳에 오기 전 분명 그런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이 아빠가…….”

“아버지보다 제가 산길에 더 익숙하잖아요.”

미렌은 프레니티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에게 이 근처 산들은 놀이터였으며, 크고 나서는 약초를 캐느라 매일같이 오르던 산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농사를 짓느라 바빴던 아버지보다 그녀가 더 익숙하단 뜻이었다. 미렌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약초꾼이 저였어요, 모르세요?”

“넌……!”

“여보.”

결국 미렌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막아섰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그럼, 약속하렴. 미렌.”

“무슨 약속이요?”

“만약 우리가 죽거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가 미렌의 두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넌 단지 우리 가족을 위해 가는 게 아니야. 이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가는 거란다.”

“…….”

“그럴 용기가 없다면 관두렴. 아직 식량은 버틸 만하단다.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어머니의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미렌은 제 동생과 부모님의 얼굴을 차례대로 살폈다.

연로하신 부모님. 아직 어린 동생.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민하던 미렌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이 선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게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렴.”

“하지만 가족들이 살아 있다면 저는 꼭 돌아올 거예요. 기다릴 수 있지, 그렌?”

“응!”

아이의 해맑은 대답이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그들 중 누구도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하나의 약속을 했다.

꼭 살아서 만나자고.

***

가방 하나만 멘 채 집을 나온 미렌은 곧장 뒷산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산은 테룬 공국과 마주한 국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감시가 덜한 편이었다.

아마도 그건 일반인이 국경으로 가 봐야 어차피 탈출로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랬기에 프레니티 영지민들도 뒷산에 숨어들면서도 탈출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렌은 알고 있었다. 수도에서 나온 파견대가 국경을 향해 가고 있음을.

그러니 거기까지만 가면 된다. 파견대를 이끄는 로이아와도 아는 사이니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되었다.

“……!”

서둘러 수풀을 밟고 걸어가던 미렌은 제 발 아래에 걸린 것을 확인하곤 잠시 멈칫했다.

죽은 사람의 몸이었다.

그녀도 아는 얼굴이었다.

작은 마을인 만큼 미렌 또한 마을 사람들 대부분과 일면식이 있었다. 제 발치에 걸린 이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테룬 공국의 병사들이 프레니티 영지민들을 함부로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체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자신 또한 죽어 가는 감각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덜덜 떨리려는 제 손을 조심스레 모아 쥐었다. 주변에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비명이나 지를 수는 없었다.

“하아…….”

숨을 몰아쉰 미렌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파견대를 찾아가는 것도 있지만, 라이언과의 재회를 위해 파견대를 찾는 것도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뻗을 때마다 그녀는 제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본국에서 지원군이 온다던데.”

“아아, 나도 들었어. 이 지루한 곳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지.”

남자 둘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미렌은 발을 뻗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억양이나 말투가 워로덴 제국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도 부모님을 통해 조금은 알고 있는, 테룬 공국의 말씨였다.

“우린 여기서 버티고만 있으면 되나?”

“그야 어쩔 수 없지. 우리가 들어온 국경이 막히는 바람에 고립되었잖아.”

“그래도 이만큼 들어온 게 어딘가. 우리 덕분에 전쟁이 훨씬 수월해졌으니 말이야.”

“그야 그렇지.”

미렌은 숨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들과 미렌 사이에는 나무 몇 그루가 있어서 몸집이 작은 그녀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다만, 미렌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들이 고개를 잠깐이라도 뒤로 돌렸다간 당장에 들킬 수 있는 위치였다.

미렌은 나무를 돌아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기 위해 한 걸음 뻗은 순간이었다.

뚜둑.

발아래의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미렌이 제 발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누구야?!”

“하아? 이 녀석들이 또 그새를 못 참고 나왔나?”

집에서 얌전히 농사만 지으면 살려 준다니까.

히죽거리며 웃는 목소리가 산속을 울렸다. 미렌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던 사내들이 하나씩 검을 빼 든 채 미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산의 초입에서 보았던 마을 사람의 시체가 떠올랐다.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도망쳐야 한다.

살아남아야 해.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미렌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산의 생김새, 강의 위치, 익숙한 오솔길. 약초꾼인 미렌 우드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마을 사람들 중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지리를 잘 알더라도 그녀의 체력과 훈련받아 온 병사들의 체력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겨우 거리를 벌렸지만 미렌은 제 숨이 벅차오를 때마다 느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잡힐 것이다.

하지만 힘을 쥐어 짜내 달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숨겨진 길로 발을 들여도 집요하게 흔적을 찾아낸 병사들이 따라왔다.

그리고 점차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미렌은, 제 앞의 나무뿌리를 보지 못하고 굴러 넘어졌다.

“그러게, 왜 살려 준다는데도 죽여 달라고 기어 나와?”

“저래 놓고 우릴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본다니까.”

미렌이 넘어지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덫에 걸린 쥐를 대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속도를 늦췄다. 다시 일어나 도망가기에도 늦은 거리였다.

그녀가 기어서라도 도망가기 위해 팔을 내뻗었다. 그러나 이미 병사들 중 한 명이 미렌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윽……!”

“얼굴이 곱구나. 편하게 보내 줄게. 응? 무서…….”

무서워하지 마.

병사는 분명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대로 목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털썩.

손아귀의 힘이 사라지자 머리채가 잡혔던 미렌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자유로워진 그녀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인지 확인했다.

“이번에도, 너무 비겁했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산속을 울렸다.

프레니티에 미렌을 내려 두고 떠났던 헤겔이 돌아왔다.

이상한 것은, 그의 머리카락이 예전과 달리 목이 드러날 정도로 짧아져 있다는 점이었다.

저벅, 저벅.

다가온 그가 쓰러져 있던 미렌의 앞에 섰다. 헤겔의 흰 손이 다시금 그녀를 향해 내밀어졌다.

“그래도 상관없어.”

너는 이번에도 내 손을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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