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81)화 (81/133)

스러져 가는 별

한편, 헤겔은 미렌 우드를 데려다준 뒤 다시 한번 이동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쟁에 남쪽 마탑이 나서기로 한 탓에 곧장 파견대에 합류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경 보수를 위해 모인 파견대와는 프레니티 영지 부근의 산맥에서 합류하기로 한 터였다.

워프 마법이 이뤄지기 직전, 헤겔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홀로 선 미렌이 보였다. 또한 그녀가 자신이 내려 뒀던 우산을 집어 드는 모습까지.

그러나 워프 마법으로 인해 공간이 일그러질 때까지, 그녀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그저 품에 넣고만 있는 것이다.

헤겔은 그 우산의 모습이 꼭 제 꼴 같아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의 광경이 초록색 들판으로 바뀌었다.

리키를 기준으로 삼고 워프 마법을 한 덕분에 그의 바로 앞에는 리키가 서 있었다. 리키가 돌아온 헤겔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였다.

휘청.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한 헤겔이 다리의 힘을 잃고 옆으로 넘어갔다. 겨우겨우 넘어지진 않고 다시 서긴 했지만, 헤겔은 평소와 다른 몸 상태를 느꼈다.

상대적으로 놀란 리키가 허겁지겁 헤겔에게 다가왔다.

“탑주님! 탑주님, 괜찮아요?!”

“……됐어.”

“제가 부축해 드릴…….”

“됐다고 하잖아.”

부축하겠답시고 귀찮게 구는 리키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놈이 저렇게 구니 귀찮기 짝이 없었다.

다만 그도 제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잠시 이마를 짚었다. 과부하가 온 것처럼 머리가 뜨거웠다.

“히익, 대체 워프 마법을 얼마나 해 댄 거예요? 워프 마법은 일정 시간을 두고 사용해야 한다는 거, 탑주님도 아시잖아요!”

“시간 뒀어, 몇 분 정도.”

“장거리면 최소 반나절은 지나야 하는 거 아시는 분이!”

“리키, 입 다물어. 네 목소리 때문에 머리만 더 아프니까.”

그 말에 리키가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파견대는 국경을 향해 움직이고 있어서 헤겔이 당장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의 앞에는 완고하기로 유명한 로이아 테넷이 앞장선 채였다. 그녀라면 잠시 쉬었다 가자 해도 목표한 곳에 도착하기 전까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터였다.

“에휴……. 그러게 왜 전쟁에 제일 먼저 참여한다고 하셔서는.”

“어차피 마탑들 중 하나는 나서야 했어. 이 기회에 골드 좀 쓸어 담으면 좋잖아.”

“헹, 탑주님한테 이제 골드가 무슨 소용인데요? 핑계를 대셔도 그럴듯한 걸 대셔야지.”

기사들이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헤겔도 다리를 움직였다. 물론 제 자신에게 힐링 마법을 잔뜩 걸어 둔 채였다.

그래도 연이은 워프 마법으로 찾아온 충격이 가시진 않았다. 그의 입술이 점차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헤겔이 리키와 떠들며 겨우 괜찮은 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윽……!”

“탑주님? 탑주님, 괜찮…… 으악!”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섰던 헤겔은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온몸이 무거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멈춰 선 그가 손을 올려 제 뒤의 마법사들을 멈추게 했다.

동시에 함께 걷던 리키도 마찬가지로 꽥 비명을 질렀다. 심지어 리키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운 채 쓰러져 버렸다.

다만 그의 앞에서 걷고 있던 기사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제일 선두로 가던 로이아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국경까지 얼마나 남았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무슨 일입니까?”

헤겔은 이 거지 같은 감각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언젠가 아르테미스를 찾기 위해 방문했을 때 길을 잘못 들어 겪었던 감각과 같기 때문이다.

고대 마법 플루톤의 영향이 여기까지 미친 것이다. 헤겔은 탈력감을 느끼며 로이아에게 말했다.

“소테이라를 준비해야겠어. 여기부터 고대 마법의 영역이야.”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죠.”

로이아가 소테이라를 준비하는 사이 헤겔이 겨우 한쪽 발을 뻗어 쓰러진 리키를 툭툭 발로 찼다.

플루톤은 본래 마나가 풍부한 마법사일수록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니 헤겔과 리키가 유난히 힘들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헤겔이야 미리 방어 마법을 해 두어 쓰러지진 않았다만, 리키는…….

“야, 리키.”

“으엑…….”

“정신 차려, 인마.”

속이 헤집어질 대로 헤집어진 리키는 얼마 안 가 코피를 주룩 흘렸다. 이대로 두면 내상으로 인해 온몸에서 피가 흐를지도 몰랐다.

로이아가 다가와 먼저 헤겔에게 소테이라를 으깨어 만든 진액을 건넸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다음 리키를 턱짓했다.

“저 멍청한 놈 먼저.”

바닥에 쓰러진 리키를 확인한 로이아도 무릎을 굽혀 그의 이마에 소테이라를 발라 주었다. 그러자 리키가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탑주님! 저 죽을 뻔했어요!”

“차라리 죽지 그랬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리키는 눈을 끔뻑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제게 소테이라를 발라 준 로이아와 눈이 마주쳤다.

딸꾹.

리키가 쉴 새 없이 딸꾹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헤겔은 자신도 소테이라를 사용하다 리키를 보곤 가지가지 한다며 혀를 찼다.

곧 로이아는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소테이라를 나눠 주라 명령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울상이 된 리키가 헤겔에게 터덜터덜 다가왔다.

“그냥 죽고 싶어요……. 이번 파견대에선 든든한 마법사 이미지를 굳히려 했는데!”

“누가 봐도 너보단 테넷 경이 더 든든해 보이니까 집어치워.”

“싫어요!”

파견대는 얼마 안 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이아의 말대로 그들은 머지않아 국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헤겔은 조심스럽게 그 위로 손을 올렸다.

기사들을 뒤로 물리던 로이아가 그런 헤겔에게 다가왔다.

“가능하십니까?”

“돈 받았으면 해야지.”

벽에서 손을 떼어 낸 헤겔이 로이아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로이아는 그럼 알았다며 고개를 한 번 숙이곤 뒤로 물러났다.

로이아가 떠나자 후다닥 다가온 리키가 작게 소리를 질러 댔다.

“진짜 지금 하시게요? 탑주님 상태도 안 좋잖아요, 조금만 이따가…….”

“시간이 없잖아.”

“으으!”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리키는 결국 마법사들에게 하나씩 지시하기 시작했다. 헤겔을 필두로 다른 마법사들의 도움도 필요한 일이었다.

국경으로 세워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는 이미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리키와 헤겔은 그 마법진을 다시 덧그려야만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헤겔은 제 마나를 가다듬었다. 이제 자신의 마나만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탑주님!”

순간적으로 다리에서 힘이 풀린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 멀리 서 있던 로이아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울컥.

그의 입가로 핏물이 치솟았다. 헤겔 또한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 얼굴을 닦아 내리다 손에 묻은 피를 확인하곤 얼굴을 굳혔다.

“그러게 당장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몸 상태가 좋을 때 해도 힘든 마법인데!”

“조용……히 해, 리키.”

“그럼 잠깐이라도 쉬어요. 한두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하아.

벅찬 듯 숨을 내쉰 헤겔도 결국 리키의 잠깐이라도 쉬라는 말에는 공감했다. 그의 말대로 이대로 마법을 속행할 수는 없었다.

입에서 피를 토했다는 건 속에 그만한 무리가 왔다는 뜻이다. 소테이라를 사용하기도 했으니 플루톤의 영향은 아닐 테고, 아마 연이은 마법 사용으로 인한 내상일 터였다.

계속했다간 무리가 와 마나 서클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마침 다가온 로이아에게 헤겔이 잠시 쉬겠다는 말을 전하려 했을 때였다.

“카르너 경, 괜찮으십니까?”

“신경 꺼. 무슨 일이라도 있나?”

“사실 전해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잠시 쉬었다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말을 하려던 헤겔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의아한 눈으로 로이아를 바라봤다.

무언가 고민하던 로이아는 결국 그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셨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헤겔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바로 다음이었다.

소매로 입가를 대강 닦아 버린 헤겔은 그대로 마법사들에게 다시 작업을 지시했다. 곁에서 리키가 아무리 그만해야 한다고 난리를 쳐도 요지부동이었다.

“이러다 죽는다고요!”

“안 죽어.”

“그걸 탑주님이 어떻게 알아요! 제 스승님이 마나 폭주로 돌아가셨어요. 탑주님은 모르시잖아요!”

“알아. 그런데 난 안 죽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헤겔의 고집에 리키가 순간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헤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들 중 하나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전했고, 그는 곧장 제 몸에서 요동치는 마나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주위로 고요한 빛이 감돌았다. 리키는 그런 헤겔을 성난 얼굴로 바라보다 결국 포기하고 돕기 시작했다.

제 옆에서 입을 꾹 다문 리키를 힐끗 확인한 헤겔이 툭, 말했다.

“끝나고 과자 사 줄게.”

“그딴 거 필요 없어요!”

“프레니티 특산물로 만든 수제 과잔데?”

“……탑주님은 아직도 제가 어린애인 줄 알아요?”

“그래서 필요 없다고?”

리키는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정말 과자가 탐이 나서가 아니라, 헤겔이 저렇게까지 말해 온다는 건 화해의 의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경에 마법을 덧씌우는 작업은 대략 두 시간 정도가 지속됐다. 그동안 마법사들은 모두 자신의 마나를 전력으로 쏟아부어야만 했다.

물론 그건 리키와 헤겔도 마찬가지였다. 고된 작업에 벅찬 리키가 숨을 헉헉 몰아쉬다 제 옆의 헤겔에게 눈길을 돌렸다.

“힘들면 가서 쉬어.”

“탑주님도 안 쉬는데 제가 어떻게 쉬어요?”

“평소엔 잘만 놀러 갔잖아.”

“그건 탑주님도 맨날 그러니까요!”

투닥거리긴 했지만 둘 다 서로가 한계에 치달았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하위 마법사들은 모두 탈진해 쓰러진 지 오래였다.

이제 마무리 작업이었다. 헤겔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리키에게 물러서라 말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결국 보다 못한 리키가 손을 떼 버렸다. 제 뒤에 쓰러진 마법사들처럼 조금 쉬었다 해도 되잖은가?

황제가 급하다곤 했지만, 시일을 정해 준 것도 아니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시일이 문제던가.

그러나 헤겔은 리키가 손을 떼자 자신이 그의 몫까지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탑주님…….”

“…….”

“형.”

마침내 리키의 나지막한 부름에 헤겔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모든 작업을 끝낸 뒤였다.

며칠은 걸릴 거라 생각한 작업이 두 시간 만에 끝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헤겔의 몸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놀란 리키가 서둘러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자 헤겔은 이미 정신이 혼미한 얼굴로 리키가 아닌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헤르더.”

“……탑주님, 정신 차려요. 저 리키잖아요.”

“헤르더, 형이…… 빨리 갈게…….”

그러니까…… 죽지 마. 응?

헤르더는 죽은 헤겔의 동생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던 리키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이윽고 헤겔이 정신을 잃었다.

리키는 헤겔을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기기 위해 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무지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헤겔이 태도를 바꾼 건 다가온 로이아가 이야기를 전한 직후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대체 뭐가 중요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로이아는 그렇게 전했다.

‘황후 전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그 소식을 떠올린 리키가 나직이 물었다. 그의 눈이 발갛게 물든 채였다.

“탑주님.”

황후 전하가, 그렇게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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