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9)화 (79/133)

미안해

“친구라고요?”

“친구 아닙니까?”

미렌의 되물음에 이올라오스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성큼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로 천둥이 내려쳤다.

천둥소리에 놀란 미렌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성큼 다가섰던 이올라오스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놀란 줄 알았는지 표정을 풀었다.

그가 다소 가라앉은 말투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이올라오스 경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천둥소리에 놀랐을 뿐입니다.”

미렌의 덤덤한 대답에 이올라오스가 안심이라는 듯 겨우 숨을 뱉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친구라니요?”

“우리, 친구 아니었습니까?”

“친구……요?”

왜 이렇게 친구에 집착하세요?

라고 물을 뻔했지만, 눈치 빠른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이올라오스의 태도를 살펴보니 왜인진 몰라도 일단 친구라는 확신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친구라고 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녀는 속 편하게 대답했다.

“맞죠, 친구.”

“그런데 왜 갑자기 떠나는 겁니까?”

“질문이 이상한걸요, 이올라오스 경. 애초부터 저는 2주만 머무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무어라 더 반박하려던 이올라오스는 그럴듯한 이유가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제 애꿎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폐하의 명도 있으니만큼 우드 씨가 더 오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야……. 그런데 이올라오스 경도 저택엔 잘 없으시잖습니까? 제가 있는 동안에도 그랬고요.”

미렌이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이올라오스는 대부분을 황성에 있는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물론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평소보단 더 저택을 찾았다는 것 같았지만.

“제가 이곳에 꼭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

이올라오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 그에 대한 대답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잡을 수도 없었다. 이올라오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올라오스 경.”

“말씀하십시오.”

“제가 떠난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픽, 짧게 웃은 그녀가 손을 들어 이올라오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친우에게 하듯 가벼운 스킨십이었다.

“서로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는 게 친구니까요.”

“서로가 어디에 있든…… 상관이 없다는 겁니까?”

“예. 가끔씩 안부를 전하고, 때때로 찾아오기도 하고. 그러면 되잖아요.”

“그게 ‘친구’인 겁니까?”

“그럼요.”

간결한 대답을 들은 이올라오스는 잠시 동안 침묵에 빠졌다. 그사이 미렌이 이제 되었냐는 듯 뒤돌아섰다.

“내일 아침이 되면 떠날게요. 나머지 인사는 그때 하도록 하죠.”

미렌이 제 앞을 떠날 때까지 이올라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아주 오랫동안, 그의 기사도만큼이나 고결한 모습으로.

***

미처 해가 뜨기 전.

가벼운 가방을 챙긴 미렌이 홀로 백작가를 나섰다. 새벽부터 나설 생각에 미리 인사를 해 둔 만큼 그녀를 배웅해 주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함께 돌아가기로 약속한 잡화점 아저씨는 새벽부터 움직이는 이였다. 그 시간을 맞추려면 지금 백작가를 나서야 했다.

백작가를 떠나기 전, 미렌은 잠시 뒤를 돌아봤지만 이내 걸음을 옮겼다.

잠시 비가 그친 하늘은 당장이라도 또 비를 쏟을 것처럼 어두웠다.

미렌은 잡화점 아저씨와 헤어졌던 장소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

새벽이라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커다란 짐 마차와 함께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에 그녀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아저씨의 행색이 이상했다.

심지어 멀리서부터 목소리까지 내어 가며 다가갔는데 그는 미렌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결국 다가간 미렌이 그의 등을 툭 두드렸을 때에는, 행색이 엉망인 잡화점 아저씨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뒤돌아봤다.

“아저씨,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왜…….”

“미렌, 미렌……! 이걸 어쩌면 좋니!”

“네?”

행색도, 얼굴도 말이 아닌 잡화점 아저씨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댔다.

미렌이 우선 진정하라며 투박한 손을 잡자 아저씨가 문득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그의 입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프레니티, 프레니티 영지에 큰 불이 났다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렌이 멍한 얼굴로 아저씨를 올려다봤다. 그가 울먹이며 설명을 이었다.

“얼마 전 테룬 공국이 국경을 뚫고 들어왔다더구나. 그래서 급하게 돌아갈 길을 찾고 있는데……. 그놈들이 프레니티 영지에 불을 질렀다지 뭐냐! 흐윽……. 여보, 여보…….”

“아저씨, 뭔가 잘못 들으셨겠죠. 프레니티 사람들은 모두 테룬 공국 출신이라고요. 그런데 왜 테룬 공국 병사들이 그곳에 불을 질러요?”

“너…… 아직도 모르는 게냐? 그놈들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그는 미렌을 보고 겨우겨우 다잡았던 마음이 무너졌는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아저씨께선, 이렇게 말했다.

“배신자. 우리를 그렇게 부르더구나.”

테룬 공국에게 국경이 뚫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렌 또한 영지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프레니티 영지 사람들은 모두 테룬 공국 출신이니 테룬의 병사들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아저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가족들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미렌의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단 어서 영지로 돌아가요. 아저씨,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나도 돌아가고 싶단다! 그런데 현재는 프레니티로 돌아가는 길이 모두 끊겼어……. 방법이 없다. 미렌, 우리 가족들은 모두 어쩐다냐? 응?”

당장 어제 회의가 끝난 뒤부터 남쪽 경계선으로 가는 길은 모두 차단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미렌이 허탈한 표정으로 아저씨의 짐마차를 보았다.

그곳엔 짐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잡화점 아저씨 또한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찾아본 것이다.

“지금 당장 프레니티로 갈 수 있는 건 기사들과 마법사밖에 없다는구나……. 우리 가족들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저씨께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미렌 또한 당황을 감추지 못해 괜한 손만 움켜쥐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렌 우드의 몸으로 프레니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그런 게 있을까.

“기사들과…… 마법사.”

아마 아저씨가 말한 일행들은 라이언이 지시한 파견대를 말하는 것일 터다. 로이아 테넷과 남쪽 마탑이 이끄는.

로이아 경에게 부탁을 해 볼까?

하지만 그러려면 황성에 들어가야 했다. 물론 평민인 미렌으로선 당장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주 잠시 동안 이대로 잠들어 미렌 에드가의 권력을 이용할까 생각했다.

이제껏 고려조차 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제 가족들이 위험하단 소식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저기, 미렌.”

……하지만 그런 황후의 행동을 누군가 책잡는다면?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황후의 행동이 대신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어린 그렌의 얼굴과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결심을 하려 했을 때였다.

“미렌, 누군가 널 찾아온 것 같구나.”

“네?”

“네 뒤에.”

생각에 잠겨 누군가 가까이 오는 줄도 몰랐던 미렌이 아저씨의 손짓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뒤엔 누군가 서 있었다.

미렌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헤겔 씨.”

당신이 대체 왜 이곳에?

자존심이 강한 헤겔이라면,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말에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을 줄 알았다.

그것을 각오하고 한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헤겔은 굳게 가라앉은 얼굴로 그녀를 찾아왔다.

예전처럼 그를 반겨 줄 수는 없었다.

미렌이 굳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 순간, 헤겔의 뒤로 투둑, 툭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잘못을 용서받으려고 온 건 아니야.”

그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단지.”

“…….”

“단지, 네가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왔을 뿐이야.

쏴아아-.

헤겔의 말을 끝으로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짐마차를 챙기고 있던 아저씨는 서둘러 천막 아래로 짐들을 옮겼다.

이제 거리에 남은 건 미렌과 헤겔뿐이었다.

그는 전처럼 장난스럽게 웃지도 않았고, 유연하게 넘어가려는 기색도 없었다. 잘못을 빌지도 않았다.

찾아온 이유라곤 그뿐이라는 듯 그 한마디를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신은 매번…….”

“……어.”

“내가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에만 날 찾아와요.”

굵은 빗줄기로 인해 미렌의 속눈썹 끝을 타고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건 헤겔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선 도저히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에만, 그렇게.”

“사과, 해야 해?”

“비겁합니다.”

악마의 속삭임임을 알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눈을 내리깐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럴 때에만 찾아오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그래.”

“용서했다고 생각하지 마요.”

“알겠어.”

뚜욱, 뚝.

이제는 완전히 젖어 버린 미렌의 옷자락을 타고 물기가 흘러내렸다.

그것을 바라보던 헤겔이 문득 손을 내밀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제 앞에 다가오자 미렌은 머뭇거리다 그것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성큼 다가온 헤겔이 그녀의 눈가를 가렸다. 발아래가 일그러지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워프 마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헤겔이 그녀의 귓가에 짧게 속삭였다.

-.

그녀의 가려진 시야가 어느새 밝아졌다.

미렌은 뒤바뀐 풍경이 익숙하지 않아 눈을 끔뻑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이곳은 미렌 우드의 집 앞, 그녀가 자주 오르던 뒷산이 맞았다.

그러나 그곳엔 오로지 그녀만이 있을 뿐 헤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얇은 빗방울 사이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미 헤겔은 떠난 뒤였다.

그제야 미렌이 깊은 숨을 토해 냈다.

마법이 실현되기 전, 헤겔이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그가 한 말이라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더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비겁해서 미안해.’

미렌은 문득 제 발치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우산 하나.

버려졌다기엔 너무나도 새 것 같았다. 꼭 누군가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그러나 미렌은 우산을 펴지 않았다. 다만 버리지도 않았다.

누군가 그녀를 위해 준비해 뒀을 그 우산은, 제 쓸모를 다하지도, 그렇다고 버려지지도 못한 채 챙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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