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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8)화 (78/133)

고마워

회의가 파했다. 새벽부터 대대적으로 진행된 정무 회의는 두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끝이 났다.

하나는 베르디움 공작이 어떻게 소테이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남쪽 마탑이 황후의 편으로 돌아섰대.”

“뭐?! 그게 사실이야?”

회의장을 나서는 귀족들이 저마다 멋대로 떠들어 댔다.

대부분이 황후의 뒤에 남쪽 마탑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녀는 에드가 공작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황제의 하나뿐인 아내였지만 그 위치가 애매했다.

에드가 공작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힘이 빠져 가고 있었고, 황제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대단한 권력을 쥐여 줄 수는 없는 위치였다.

그런데 오늘, 남쪽 마탑이 황후의 뒷배가 되었다는 소문이 돈 순간부터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전하……. 여기저기서 방문을 요청하셨습니다. 전하를 꼭 뵙고 싶으시다는군요.”

“마리아, 일단은 거절하도록 해.”

“예. 그럼 함께 보내온 선물들도 돌려보낼까요?”

“그래.”

달라진 황후의 입지를 들은 귀족들은 무척이나 빨랐다. 하나같이 기다렸다는 듯 선물과 함께 방문 요청을 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미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그녀 자신은 헤겔과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인데, 그가 제 뒷배라는 소문이 나다니.

알페카의 입에서 출발한 소문이라 헤겔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이 소문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할 때였다.

“폐하!”

“미렌, 공작 성에 다녀왔다지?”

그녀의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라이언이 미간을 좁히며 물어 왔다. 망설이던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 황성 밖을 나가거든 꼭 이올라오스를 대동하도록 해. 그게 힘들다면 내가 함께 가지.”

“마리아를 비롯해 기사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리 위험하지 않았어요.”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때야. 약속해 줘, 내 말을 따르겠다고.”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미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라이언이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숨결이 흩뿌려졌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미렌은 결국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럴게요.”

그 한마디에 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렌과 눈이 마주친 그는 눈꼬리를 접어 보이며 깊게 웃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고맙다’고.

미렌은 그런 제 남자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이제껏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말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째서 헤겔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 않는 걸까.

당장 남쪽 마탑이 황후의 뒷배가 되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 대해 짧게라도 물을 법도 한데, 라이언은 그러지 않았다.

그거면 되었다는 듯 그저 다시 얼굴을 기댈 뿐이다.

“……라이언.”

“응, 듣고 있어.”

“회의…… 괜찮았어요?”

그녀의 말끝이 가볍게 떨렸다. 미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눈치 빠른 라이언이라면 곧장 알아챘을 터였다.

그러나 라이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설명, 아주 멋있었어.”

“그게 아니라…….”

“미렌,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멍청한 대신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겠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두고 말이야.”

고마워.

그가 이번에도 고맙단 말을 했다.

빠르게 말을 마친 라이언은 그녀의 허벅지에 다시금 뺨을 기댔다.

그 행동이 꼭 버림받고 싶지 않아 하는 소동물 같아서, 그녀는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쯤 되니 미렌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언은 헤겔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 헤겔과 미렌의 사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건 저번 연회에서 미렌과 했던 약속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라이언.”

“응.”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한 적이 있었나요.”

그저 두려워하고 있었을 뿐.

그는 헤겔과의 사이를 캐묻게 되면 자신이 버려질까,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하면서도 또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이 무서워 이야길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냘파서 미렌은 라이언의 귓가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밤, 당신이 그랬잖습니까.”

‘이만 가라니? 내 신부를 두고 내가 어딜 갈까. 이거 면목 없군.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다니.’

라이언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라이언의 얼굴을 미렌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저는 그때 많이 두려웠습니다.”

“……어째서?”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에겐 사랑받지 못했다.

미렌 에드가는 매일 밤이 혼자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미렌은 매번 낮엔 미렌 우드로, 밤엔 미렌 에드가로 지내길 원했다.

혼자서 잠이 드는 건 너무나도 무서웠으니까.

그나마 우드 가족들이 사랑을 알려 주며 밤을 무서워하는 버릇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렌 에드가는 밤마다 깨어 있었다. 오랜 수면 습관이 고착화된 것이다.

“그 긴긴 밤, 당신이 제 옆을 지켜 줄 때……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이만 가 보라며 밀어낼 때는 언제고.”

그날의 분위기, 습도, 달이 어떤 모양이었는지까지. 미렌은 조금도 잊지 못했다.

긴 밤이 가도록 그녀는 잠들지 못했고, 함께 누운 침대에서 혹여라도 라이언과 손끝이 닿을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 물러서기도 했다.

그러니 그녀는 아마 그때부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밀어내는 게 당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서운하기 짝이 없군. 당신이 밀어내는 동안 매달리는 건 늘 나의 몫이었잖아.”

“매달려 줘서 고마워요.”

미렌은 매달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고맙다고 말했다.

그게 미렌이 라이언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미렌, 피곤할 테니 이만 자도록 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미렌은 자신이 오랫동안 미렌 에드가의 몸으로 일어나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몸이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던 라이언은 어느샌가 일어나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다.

그가 조심스레 미렌을 침대에 눕히자 그녀는 까마득한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미렌.”

“……예, 라이언.”

“잘 자.”

이마에 느껴지는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

“후…….”

끊어졌던 숨이 쉬어지듯 숨결이 뱉어졌다.

건강하기 짝이 없던 미렌 우드의 몸이 무척이나 뻐근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너무 오랜 잠을 잤더니 머리가 다 아팠다.

그녀가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일어난 곳은 백작가의 저택이 아니었다.

북쪽 마탑 인근의 인적 드문 여관이었다.

헤겔과 헤어진 다음, 돌아갈 방법이 사라진 미렌은 외박을 택했다.

그날 밤엔 라이언과의 밤 약속도 있던 터라 시간을 맞추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벌어진 일들로 인해 제법 오래 잠이 들어 있었다.

아마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한 그녀로 인해 트리온 저택에서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에 잠겼던 미렌은 문득 회의장에서 라이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이올라오스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평소와 조금은 달랐는데.

그의 얼굴 위에는 언제나 은은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바로 옆의 무표정한 로이아 테넷과는 정반대의 태도라 더욱 두드러지기도 했다.

그런데 회의장에선…….

“이봐요, 곧 나갈 시간이오!”

“아, 네! 정리하고 나가겠습니다!”

하룻밤의 값만 치렀던 미렌은 서둘러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물론 씻지도 못한 채였다.

바깥은 유난히 우중충하고 습했다.

그녀가 발을 재게 놀려 자신을 백작가까지 데려다줄 마차를 구했다.

“트리온 백작가로 가 주세요.”

일단 갈 곳은 그곳뿐이었다.

물론 당장 내일이 되면 프레니티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라 인사차 들르는 것이기도 했다.

마차는 마부의 성급한 성질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값을 치르고 마차에서 내리던 미렌이 누군가에게 탁, 팔뚝이 잡힌 건 그다음이었다.

“……이올라오스 경?”

“어딜 다녀옵니까?”

“아, 그게…….”

그래, 이 표정.

회의장에서도 이올라오스는 이런 얼굴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표정.

그녀가 무어라 변명할 새도 없이 이올라오스가 입을 열었다.

“공문을 들고 마탑에 갔다 돌아오지 않다니. 일을 할 생각이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 공문을 잃어버렸어요.”

“하……. 그럼 왜 돌아오지 않은 겁니까?”

그야, 라이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서…….

라고 말할 순 없었던 미렌은 눈을 도르륵 굴리다 마지못해 변명했다.

“공문을 잃어버려서 혼이 날까 무서웠습니다. 죄송해요.”

비록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녀는 당장 내일이면 프레니티로 돌아가 농부의 삶을 살 예정이었다.

이올라오스나 기사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언제 우드 씨를 혼낸 적이나 있었습니까?”

“없, 없긴 하지만 그래도 공문이었다 보니.”

“공문 따위야 다시 한번 만들면 되는 겁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올라오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다 그 자신도 그걸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불편한 침묵에 미렌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 곤란하게 해 죄송합니다. 역시 저는 이올라오스 경의 아래에 있기엔 부족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사실 내일이면 프레니티 영지로 돌아갑니다. 그동안 챙겨 주셔서 감사했단 말을 전하기 위해 왔어요.”

미렌의 말에 이올라오스가 잡고 있던 그녀의 팔뚝을 놓아 버렸다.

그가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다시금 물어 왔다.

“돌아간다고요?”

“예. 약속드린 2주가 지났으니까요.”

“그럼, 그럼……. 폐하의 명을 어기실 생각입니까?”

“그, 내기는, 음. 사실 어째서 제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 그저 황후 전하, 의 부탁을 받고 참가한 것인걸요.”

그러니 미렌 우드에겐 내기의 결과까지 감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감히 제 또 다른 몸을 핑계로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황후 전하, 께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볼을 긁적인 미렌이 이올라오스의 눈치를 보다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 자리를 피했다. 이올라오스뿐만 아니라 알프레도 집사나 백작 부인에게도 인사를 전해야 했다.

다행히 모두가 아쉬운 얼굴로 그녀에게 잘 돌아가라는 말을 전했다. 다만 백작 부인의 반응은 다소 달랐다.

“돌아간다고요?”

“예, 부인.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올라오스는? 그 아인 뭐라던가요?”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는데요?”

“하!”

백작 부인이 차락, 부채를 펼쳐 들었다. 그러곤 어쩐지 실망감 섞인 어조로 미렌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전해 왔다.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백작 부인의 방에서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곳엔 이올라오스가 동상처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올라오스 경? 여기서 뭐 하세요?”

문득 백작가 저택 밖에서 거센 비가 쏟아졌다.

그 커다란 빗줄기 소리를 뚫고, 이올라오스는 그렇게 물어 왔다.

“우리…… 친구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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