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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7)화 (77/133)

구원자

“하, 그게 지금 중요한가? 살아 있는 생명체는 지나갈 수 없다는 게?”

어느 귀족의 반박을 들은 알페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시비를 건 귀족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러나 별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황후가 덧붙여 설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모두 무릇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황후 전하께서는 지금 회의와 상관없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한시가 바쁠 때입니다, 전하. 지금은…….”

아무리 최근 들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황후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 누워만 있던 사람이었다.

대신들 사이로 은근한 무시가 담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미렌은 그들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씩 눈에 담으며 똑똑히 말했다.

“그럼, 마나는 없으나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미렌의 나지막한 물음에 회의장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처음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찌푸리던 귀족들도 하나둘씩 두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비로소 이해한 것이다.

어느 정도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하위 귀족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들며 물어 왔다.

“하지만 그게 가능합니까? 마나가 없는데 살아 있는 게……. 동물들도, 하다못해 식물들도 가지고 있는 게 마나입니다. 마나가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빅터 자작,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마나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죠.”

미렌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직 나가지 않은 채 서 있던 알페카가 있었다.

가볍게 턱짓하자 알페카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서 나온 건 흰 꽃잎을 가진 약초였다.

“하지만 마나를 사라지게끔 하는 약초는 있습니다.”

“설마……?! 테룬 공국이 그걸 사용했단 말입니까?”

누군가의 경악에 찬 물음에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이 꽃의 이름은 소테이라. 그리고 때때로 이것은…… ‘아르테미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

사실 소테이라와 아르테미스는 정확히 말해 다른 약초였다.

전설의 꽃이라 불리는 아르테미스는 쉽사리 찾을 수 없는데 반해 독초인 소테이라는 비교적 흔하기 때문이다.

생긴 것도 비슷하고, 그것이 내는 효과도 비슷했다. 다만 소테이라는 생명체의 마나를 없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독초였다.

미렌은 테룬 공국의 사람들이 그것을 복용했다 말한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트리온 백작이 미간을 모은 채 중얼거렸다.

“확실히…… 신빙성 없는 말은 아니군요. 전하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플루토가 걸린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순식간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테이라를 먹고 살아남는다라.”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던 베르디움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가 고개를 모로 돌린 채 연이어 말했다.

“전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테룬 공국인들은 모두 제 목숨을 걸고 소테이라를 복용했나 보군요.”

“공작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또각, 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가 점차 공작에게 가까워졌다.

미렌은 베르디움 공작 앞에 멈춰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언제, 테룬 공국인들이 소테이라를 복용했다 했습니까?”

“그건……!”

무어라 반박하려던 베르디움 공작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한 번도 테룬 공국인이 소테이라를 ‘복용해서’ 넘어왔다 한 적이 없었다.

그저 트리온 백작이 짐작으로 한 말에 넘어간 것이다.

베르디움 공작이 눈을 찌푸리고 트리온 백작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고개를 돌린 지 오래였다.

베르디움 공작이 얼굴을 구긴 채 고개를 숙여 왔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좋습니다. 그렇다면 공작, 용서받고 싶다면 이 소테이라를 복용하세요.”

“……예?”

“들리지 않습니까? 소테이라를 복용하라 했습니다.”

그의 앞으로 어느새 소테이라가 내려왔다. 공작이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죽으라는 말과도 같았다. 당장 그를 치료해 줄 치료사도 이곳엔 없었으며, 소테이라는 치료사가 있다 해도 살아남기 힘든 독초였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테이라를 집어 들었다. 입 안으로 자꾸만 침이 솟아났다.

“두려우십니까?”

“…….”

“공작께서는 이 소테이라에 대해 제법 잘 알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그녀의 나지막한 말에 공작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미렌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뒤늦게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앉은 귀족들이 모두 의아한 눈으로 베르디움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은 그제야 깨달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소테이라에 대해 무지했다.

그것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 이는 이곳에서 베르디움 공작밖에 없었다.

소테이라가 얼마나 위험한 약초인지, 어째서 치료사가 있어도 살아남기 힘든 약초인지…… 알고 있는 이라곤 공작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새하얀 면사포 아래로 웃고 있는 황후의 모습을.

“공작의 무례는 용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소테이라를 돌려주시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알페카, 소테이라의 제대로 된 복용법을 설명해 주겠나?”

미렌이 주위의 시선을 환기시키기 위해 알페카를 내세웠지만 공작에게 붙은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았다.

방금 전, 황후가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공작은 소테이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따라붙는 질문은 단순하다. ‘어째서?’

베르디움 공작이 의심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묘한 분위기가 연회장 내부를 떠돌았다. 정확히 말해서는, 베르디움 공작을 향한.

공작은 황후의 여우 같은 꾀에 치가 떨려 이를 악물었다. 황제의 눈치를 슬쩍 보았지만 그는 내도록 무표정한 채였다.

“고매하신 공작 각하의 말씀대로 소테이라는 직접 복용할 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극독초입니다. 다만.”

“다만?”

“잘 으깨어 몸에 바르게 되면 일시적으로 마나가 ‘느껴지지 않게’ 하는 약초입니다. 마법사들도 흔적을 없애고 싶을 때 자주 쓴답니다.”

알페카의 설명마저 끝나자 미렌이 한 발짝 물러서 상석에 앉아 있는 라이언을 바라봤다.

그리고 드레스의 양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설명이 모두 끝났다는 뜻이었다.

“테룬 공국에 대한 조치를 말하겠다.”

라이언은 그런 미렌에게서 두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도록 담담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성 기사단과 함께 마법사들을 국경으로 보낸다. 소테이라가 통하지 않도록 국경 마법을 보완하며, 기사단은 그들을 보좌한다.”

“예, 폐하.”

“또한, 파견대는 로이아 테넷이 이끈다.”

곁에 서 있던 이올라오스와 로이아가 표정 없이 대답했다. 기사단장인 이올라오스는 지금 당장 수도를 비울 수 없었다.

라이언의 명령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파견대 마법사를 지원할 마탑은…….”

라이언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그는 바로 아래 미렌의 뒤에 선 알페카를 바라보다 느릿하게 말했다.

“북쪽 마탑으로 선택한다.”

그 한마디에 미렌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라이언의 말을 듣고 있던 귀족 몇 명도 의문을 품었다.

이제껏 황성은 마탑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남쪽 마탑과 함께했다.

남쪽 마탑의 마탑주 헤겔 카르너가 그만큼 대단한 남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번만큼은 다른 선택을 했다.

그건 아마 단순히 지금 당장 그의 앞에 알페카가 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라이언의 한마디에 알페카가 조금 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폐하, 외람되오나 한마디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북쪽 마탑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디 남쪽 마탑으로 연락을 보내 주십시오.”

“어째서지?”

사실 북쪽 마탑에게 이는 좋은 기회였다.

황성과 함께한다는 것은 언제나 큰 권력을 쥐여 줬기 때문이다.

알페카가 제안을 거절하자 라이언이 흥미로운 눈길로 그를 내려다봤다.

“현재 남쪽 경계선은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전투 마법사가 많은 남쪽 마탑이 참가하는 게 옳습니다.”

“이번 파견대에 참가한다면 북쪽 마탑엔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절한다는 건가.”

음, 하고 고민하던 알페카는 결국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제가 욕심이 없습니다. 하하!”

멋쩍게 웃은 그가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라이언은 별다른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쪽 마탑이지?”

“그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남쪽 마탑이 아무래도 전투 마법사도 많으니.”

“그건 동쪽 마탑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 그게, 음.”

알페카가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야 다른 이유가 있었다.

헤겔에게 주먹으로 맞은 그날, 알페카는 헤겔로부터 한 가지 부탁 아닌 명령을 들었다.

‘가볍게 입을 놀린 죄는 황후 전하에게 갚도록 해.’

‘그래…… 알겠어, 아무튼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어?’

‘입이나 다물어.’

‘……응…….’

‘그리고.’

‘응?’

당시 헤겔의 기분이 무척이나 저조해 보였기 때문에 알페카는 그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러나 헤겔은 제법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이번 전쟁엔 남쪽 마탑을 앞세운다.’

‘뭐? 대체 왜?’

헤겔은 알페카의 되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홀로 남은 알페카만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헤겔 또한, 알페카와 마찬가지로 황후에게 무언가 갚아야 할 게 있다고.

불쌍한 나의 친우.

헤겔을 떠올린 알페카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도 없었다.

비록 그의 연심은 아무리 친우라도 도와줄 수 없지만…….

“황후 전하의 부름이라면…… 언제든 지원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나마 편하게 해 줘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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