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토
“확인은 마치셨습니까?”
“예상대로야.”
마리아가 공작 성의 문을 연 사이 미렌이 치마를 잡은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들의 뒤에선 사일런이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마부가 열어 둔 문을 통해 미렌이 다시 마차에 올랐다. 공작 성에서 할 일은 모두 마친 뒤였다.
“아버지께선 마나가 없는 것만이 서재를 건드릴 수 있도록 해 두셨어. 만일 내가 아르테미스를 복용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하지만 전하, 아르테미스는 마나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가라앉게’ 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맞아, 하지만…….”
미렌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리아의 말대로 아르테미스는 마나를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었다.
만일 사라지게 하는 약초라면 그건 이미 약초가 아니라 독초였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체질이 특별했다.
헤겔은 미렌을 두고 ‘다른 사람의 마나가 흐른다.’고 했다.
물론 그건 미렌 우드에게 한 말이긴 했지만, 아마 이어진 미렌 에드가 또한 마찬가지일 터다.
하지만 미렌 우드와 달리 미렌 에드가는 본래의 마나가 약했다.
이 경우 아르테미스를 먹으면 ‘가라앉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살 수 있는 건 미렌 우드의 건강한 마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특수 체질이 아버지의 서재를 건드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미렌은 국경 또한 이와 비슷한 마법이 걸려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지금 중요한 건, 국경에도 내가 예상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마리아, 당장 남쪽…….”
“남쪽 마탑으로 연락을 보낼까요?”
자연스럽게 헤겔이 있는 남쪽 마탑에 도움을 청하려 했던 미렌이 입을 다물었다.
헤겔에게 다시는 볼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했던 게 자신이었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북쪽 마탑으로 가야겠다. 마침 공작 성에서도 멀지 않으니.”
“예, 마부에게 말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마리아가 마부에게 이야길 전하기 위해 창밖으로 고갤 내민 사이 미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직 아침 해조차 뜨지 않은 늦은 새벽이었다. 밤거리가 유난히 조용했다.
그녀는 피곤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황후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마차가 멈추며 말이 우는 소리가 났다.
창밖을 보며 바깥 상황을 살피던 마리아가 미렌에게 말했다.
“전하, 잠시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북쪽 마탑의 문양을 단 마차가 앞에 선 모양입니다.”
그러나 미렌이 내리기도 전에 그녀의 마차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아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이는 알페카였다.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알페카가 미렌을 보자마자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레 마차를 세운 점, 용서해 주십시오.”
“북쪽 마탑의 마법사가 무슨 일이지?”
“전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알페카의 한마디에 미렌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여 북쪽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전하를 찾아가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하하, 하고 실없이 웃는 게 알페카다웠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알페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째서 나를 도우려 하는 건가.”
“제가 잘못을 좀 했습니다. 갚을 게 있어서요.”
“나와 대화하는 건 오늘이 처음일 텐데, 잘못이라.”
물론 미렌 우드와는 대화를 해 봤겠지만.
미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아, 그게. 전하께 잘못한 게 아닙니다. 제가 잘못을 저지른 쪽은 그러니까…… 남쪽 마탑주라서요.”
“……뭐?”
“제가 헤겔 카르너에게 큰 잘못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러더군요. ‘내가 아니라 황후 전하께 갚아라.’ 하고요.”
“무슨 잘못이었기에?”
“입을 함부로 놀렸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음,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이미 미렌도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알페카에게 명령했다.
“국경 마법에 대해 알고 있나?”
“국경이요?”
대화를 나누는 둘의 머리 너머로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
“폐하, 지금이라도 사절단을 보내십시오. 지금은 축제 중입니다. 백성들이 동요할 게 분명합니다!”
“프레니티 영지를 반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테룬 공국은 충분히 납득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폐하, 전쟁을 준비하십시오. 귀족들의 사병을 모으셔야 합니다!”
밤사이 자다 깬 채 모여든 대신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느라 바빴다.
몇몇은 아직 국경이 뚫렸다는 말이 실감이 안 나는 듯 입만 뻥긋거리기도 했다.
가장 상석에서 그 모두를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팔걸이에 제 팔을 올렸다.
그리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이마를 짚었다.
“모두, 입 다물도록.”
그의 싸늘한 한마디에 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머리가 아픈 듯 잠시 눈을 감은 채 이마를 매만지던 그가 눈을 떴다.
“사절단을 보내자는 건 무슨 헛소리지?”
“폐하께선 아직 전쟁 경험이 없으십니다. 더군다나 축제로 한참 어수선한 지금, 전쟁은 안 될 일입니다.”
“내가 전쟁 경험이 없다라.”
“예, 선황 폐하께서도 계시지 않은 …….”
“내 형제들이 어떻게 죽어 갔는지 모두 잊은 건가, 남작?”
그 나지막한 질문에 남작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황제가 그때의 일을 꺼내 들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남작의 말대로 라이언은 타국과의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과의 내전에서 목숨을 걸고 승리해 살아 돌아온 사내였다.
황족이었던 형제들의 목을 제 손으로 직접 베었던 이.
순간 그때가 떠오른 남작이 바들바들 떨리는 제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그가 입을 다물고 더는 말을 못 하자 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전쟁을 준비하자고 했나, 자작?”
“예! 지고하신 폐하께선 분명 어떤 전쟁이라도 무사히 치러 내실 것입니다.”
“자작은 지금이 축제 중이란 걸 잊어버린 건가?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는 없겠지.”
라이언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흠칫 놀란 자작이 파드득 고개를 숙였다.
축제 중인 지금, 병사들을 보내 전쟁을 해 버리면 축제를 위해 들어간 모든 자금이 회수도 못한 채 날아갈 것이다.
사실 이미 기정사실화된 전쟁으로 인해 국가 예산은 버거워졌다.
그런데 축제마저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전쟁을 해도 그 뒤가 문제였다.
“다른 의견은 없는 거로군, 그래.”
결국 비슷비슷한 말만 해 대던 대신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라이언의 한마디에 노신 몇 명이 불편한 기침을 내뱉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방법이 없었다.
당장 테룬 공국이 국경을 뚫은 방법이라도 알았다면 축제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벌었을 텐데, 이제껏 대단한 마법사들도 알아내지 못한 일이었다.
대회의장이 대신들의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벌컥.
“무슨, 누가 감히……!”
회의장의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던 대신들이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들어온 이가 다름 아닌 황후, 미렌 에드가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드레스 차림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가벼운 구두 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황후 전하, 지금은 중요한 회의 중입니다. 개인적인 일은 추후에…….”
“개인적인 일이 아니네.”
이미 귀족들은 미렌을 향해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 중 참다못한 하위 귀족 한 명이 입을 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렌도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 귀족을 바라봤다.
얇은 면사포 아래 숨겨진 녹안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며 침을 삼켰다.
눈빛만으로 귀족의 입을 다물게 한 미렌은 이번엔 가장 상석에 앉은 라이언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테룬 공국이 어떻게 국경을 뚫었는지 알아내었습니다.”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이름 높은 대마법사들도 알아내지 못한 일입니다!”
“전하, 지금은 함부로 나서실 때가 아닙니다.”
미렌의 충격적인 한마디에 장내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그들을 다시금 조용하게 만든 것은 물론 라이언이었다.
“모두 입을 다물라고 했을 텐데.”
단 한마디로 그들을 모두 조용히 시킨 라이언이 상석에서 내려왔다.
그가 회의실 중앙을 가르며 미렌에게 다가갔다.
“……폐하.”
“미렌. 설명할 수 있겠어?”
라이언에게서 놀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그녀의 불안할 정도로 높은 구두를 걱정스레 바라볼 뿐,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는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이언은 단순히 그녀에게 설명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미렌이 앞으로 할 말을 이미 모두 믿는 것처럼.
“제게 조금의 시간을 허락하신다면…… 모두 설명하겠습니다.”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렌은 신뢰가 가득 담긴 라이언의 두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윽고 앉아 있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국경에 걸린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야 고대 마법이지 않습니까? 정확한 주문의 이름이야 모르지만, 그 무엇도 지나갈 수 없는.”
“그 마법의 이름은 ‘플루토’입니다.”
“플루토?”
“플루토가 뭡니까?”
귀족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바빴다.
국경에 걸린 마법의 이름까지 알아야 할 필요라곤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다.
“전하, 지금 중요한 것은 고대 마법의 이름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요, 레이튼 남작. 우리가 모인 이유가 고작 고대 마법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이름이 불린 레이튼 남작은 순간 황후가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았나 싶어 멈칫했다.
그러나 미렌은 그에 대한 조금의 설명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 마법이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해선 알아야 할 필요가 있죠. 폐하, 잠시 사람을 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미렌이 손짓하자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실실 웃고 있는 얼굴, 그는 바로 알페카였다.
“설명하도록.”
“아아, 고대 마법 플루토 말입니까? 고매하신 귀족분들께선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고대 마법은 그 이름이 직관적입니다.”
알페카가 제 머리를 긁적였다. 모든 귀족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플루토. 죽음의 신 ‘하데스’의 또 다른 이름을 본뜬 그 마법은…….”
알페카가 히죽 웃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통과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