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5)화 (75/133)

달의 여신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응?”

“검으로 손이 움직이는 거, 제가 봤어요.”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렌이 급하게 나가자 재촉한 이유는 그뿐이었다.

라이언의 손이 허리에 찬 검으로 가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결혼한 사람에게 눈독 들이는 거, 그거 불법이야.”

“설마 진심으로 그랬을까요. 그저 농담이었을 겁니다. 제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게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들이 미운 걸 어떡해.”

계속되는 미렌의 나무람에 라이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가 혼이 난 아이처럼 시무룩해지자 미렌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더는 혼내지 못했다.

그런 미렌의 기색을 눈치챈 라이언이 입술을 툭 내밀며 말했다.

“왜 내 편은 들어 주지 않아?”

“편이라뇨, 그런 적 없습니다.”

“자꾸 다른 사내의 편을 들면 질투가 날 거야.”

“그런 적 없다니까요?”

미렌과 라이언이 길거리를 걸으며 투닥이다 종내에는 서로 웃음이 터졌다.

그건 아마 둘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편안한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축제 거리가 주는 떠들썩하고 난잡스러운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라이언, 저쪽에서 곡예단이 공연을 한대요.”

“보러 가고 싶어?”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라던걸요. 자리가 있을까요?”

“얼마든지. 없으면 내가 당신을 안고 보지, 뭐.”

일반인들과 비교해도 머리 하나는 월등히 큰 라이언이었다. 순간 그가 자신을 안고 곡예 공연을 보는 모습을 떠올린 그녀가 짧게 웃었다.

그러자 라이언도 푹 웃음을 터뜨린다.

미렌이 한번 웃을 때마다 자꾸만 이유도 없이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는 탓이다.

미렌과 라이언이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갈 때였다. 누군가 저 골목 사이로 사람들을 헤집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폐하.”

기사복을 입지 않은 이올라오스가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라이언을 불러 왔다.

그를 확인한 라이언이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급한 일이 아니면 찾지 말라 했을 텐데.”

“급히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라이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미렌의 손을 꾹 잡아 왔다.

“……국경이 뚫렸다는 소식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이 깨지는 것은, 무척이나 빠르고 고요한 일이었다.

***

“국경이 뚫렸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평소의 옷으로 돌아온 라이언이 자신의 집무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

그곳엔 이미 옷을 갈아입은 미렌과 함께 이올라오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올라오스가 라이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남쪽 경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입니다. 주의를 기울이곤 있었으나…… 생각보다 테룬 공국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예전, 국경이 한번 뚫렸을 때 라이언은 이미 병사들을 더 보내 경계선을 삼엄히 경비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결국 국경이 어떤 경로로 뚫린 것인지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고, 그것이 지금의 사태로 번진 것이다.

아무리 사람을 보내 충원한다 해도 그 한계가 있었다.

이올라오스의 보고를 듣던 라이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병사들은, 경계선을 지키던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나.”

“일부는 살아서 도망쳤지만 그러지 못한 나머지는 모두…… 테룬 공국이 사살했다는 보고입니다.”

라이언의 두 눈이 참담히 감겼다.

결국 예상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렌이 다가와 라이언의 손을 잡아 들었다.

더는 그의 손톱이 제 손바닥을 할퀴지 않도록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라이언,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 내가 국경의 조사를 마치지 못한 탓이야.”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습니까. 내로라하는 제국의 마법사들도 알아내지 못했던 일이에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올라오스는 황후가 황제를 보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제껏 이올라오스에게 있어서 황제란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 오로지 그뿐이었다.

황제가 된 라이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털어 낸 적이 없었고, 힘들다 투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모두가 그를 세상의 유일한 군주라며 칭송한 것이다.

하지만 황후의 앞에서 황제는 그저 한 명의 범부일 뿐이었다.

누구의 말처럼 한없이 냉정하지도, 상처라곤 조금도 받지 않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 기분이 이상해서 이올라오스는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황제를 그렇게 만드는 건지, 아니면 황제가 황후의 앞에서만 그렇게 변모하는 건진 알 수 없었다.

“이올라오스, 밤이 늦었지만 정무 회의를 속행한다. 대신들에게 알리도록.”

“예.”

“또한 지금 이 시간부로 모든 기사들은 전시 태세에 들어간다.”

“예, 폐하.”

라이언의 나지막한 명령에 고개를 숙인 이올라오스가 곧 집무실을 떠났다.

라이언 또한 회의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가 잡고 있던 미렌의 손을 놓으며 그녀를 한번 끌어안았다.

“미렌.”

“괜찮습니다, 폐하.”

“미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미렌은 그저 괜찮다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속이 무너져 가는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끝까지 미렌을 끌어안고 있던 라이언은 회의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마침내 자리를 떠났다.

빈 집무실에 홀로 남은 미렌도 길을 나섰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럼. 마리아, 일단 돌아가지.”

“예, 침실로 돌아가셔서 쉬세요. 많이 놀라셨습니다.”

“아니, 아니. 침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치장을 다시 하러 가야겠다는 말이었어.”

“……치장이요? 이 밤중에 말입니까?”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지금 시작한 회의는 해가 뜰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미렌이라고 해서 속 편하게 잠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화장을 하러 향했다.

“마리아.”

“예, 전하.”

“그런데 왜 오늘일까?”

“……예?”

“왜 하필 테룬 공국이 오늘로 날을 정한 건지 궁금해서.”

“축제 날이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장 즐거울 때가 곧 가장 방심할 때니까요.”

마리아를 비롯해 시녀들이 옷을 입히는 동안 미렌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 화장이 이어졌다.

“국경도 그러해. 그 이후로 온갖 마법사들이 다녀왔지만 다들 국경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만 전했지. 자기들은 절대 넘어갈 수가 없었다고 말이야.”

“음…… 국경이 사람을 가리는 걸까요?”

“사람을 가려?”

“이야길 들어 보면 테룬 공국민은 넘어갈 수 있는데 제국민은 넘어갈 수 없으니까요.”

사람을 가리는 마법.

미렌은 문득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 마법, 분명히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래, 아버지의 서재.

에드가 공작의 서재는 분명 사람을 가렸다.

함께 갔던 헤겔은 종이 한 장도 건드리지 못했지만 미렌은 어떤 것을 만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경도 그 서재처럼 사람을 가리는 걸까?

“전하, 드레스를 갈아입으셔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문득 그녀의 눈에 일렬로 걸린 드레스들이 들어왔다.

드레스들은 옅은 색에서부터 시작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진한 색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미렌이 그것을 바라보며 물었다.

“드레스들은 모두 색깔별로 정리해 두나?”

“예? 아니요, 전하. 색깔별로 정리한 게 아닙니다. 저건 모두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드레스들이에요.”

시녀 한 명의 말에 미렌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녀의 말대로 그 옆과 뒤에는 다른 수많은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다.

“소재와 색, 두 가지로 구분한다는 건가?”

“예. 전하의 옷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색으로만 구분하는 줄 알았던 미렌은 숨겨진 구분법이 더 존재한다는 사실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

……숨겨진 구분법?

그녀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이 드레스로 다가가 몇 벌을 움켜쥐었다.

손에서 차르륵 떨어지는 실크의 감촉에 미렌은 작게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시립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명령을 내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마리아, 공작 성으로 가야겠어.”

“지금 이 시간에요? 전하, 그건…….”

“폐하께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다. 회의가 끝나기 전에 다녀와야 해.”

미렌이 단호하게 말하자 결국 마리아도 한 번 더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가 시녀들에게 명령해 마차를 준비시켰다.

이윽고 빠르게 준비된 마차에 미렌은 그대로 올랐다.

라이언에게 다녀오겠다 말하는 것은 다녀온 다음 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은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공작 성은 어쩐 일로 가십니까?”

급하게 준비된 마차라 어쩔 수 없이 동승하게 된 마리아가 미렌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물어 왔다.

그녀가 눈썹을 모으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내가 속아 넘어간 게 있어.”

“예?”

“마리아, 기억나나? 집사인 사일런이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안색이…… 좋지 않다고 하셨죠.”

“아니, 아니. 그것 말고. 아버지의 서재를 그대로 두었냐는 말에 무어라 대답했는지 말이야.”

“그건…….”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전하가 아니면 무엇도 바꿀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선대 공작께서는 아가씨가 아니면 공작 성의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유지를 남기셨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사일런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충성심 있는 집사인 사일런의 말에 미렌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재에 걸린 마법이 제게만 통하지 않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딸인 미렌에게만 마법이 통하지 않도록 해 두었다고.

“그렇게 생각한 내가 바보였어.”

“바보라니요, 전하. 그런 속된 말을 쓰셔선 안 됩니다.”

“우습지도 않지. 생전 딸에게 눈길 한번 주시지 않았던 아버지가 사후에야 내 생각을 해서 그런 마법을 걸어 두었다고?”

“……전하.”

“드레스도 그러해. 일단 눈에 보이는 게 색깔이라 해서 단순히 그렇게 믿었어. 사실 더 큰 기준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의미 모를 말이 계속해서 오갔다. 그러다 미렌이 마리아에게 나직이 물었다.

“마리아, 아르테미스의 정확한 약효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예? 그것까진, 잘…….”

헤겔이나 주치의가 처방을 내리며 마리아에게 이런 자세한 것까지 설명해 줬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미렌은 안다. 그녀가 그 아르테미스를 캔 장본인이었으니까. 전설의 약초인 아르테미스의 효과는 아주 단순하다.

“복용자의 마나를 가라앉게 해 줘.”

“네?! 그건, 대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마나가 사라지면 죽는다. 모든 생명체란 무릇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니까.

그런데 그런 마나를 가라앉게 만든다니.

“사라진다는 게 아니야. 가라앉게 해 준다는 거지. 날뛰던 마나가, 아주…… 고요히.”

“전하, 그 말씀은 설마…….”

“이제야 알겠어?”

머지않아 말이 멈추는 소리와 함께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미렌은 마리아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서재는 마나가 없는 것, 즉 죽었다고 판단한 것만이 건드릴 수 있던 거야.”

우연히, 나는 아르테미스를 마시고 있었기에 멋대로 만질 수 있던 거고.

그렇다면 그 무엇도 ‘지나다닐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국경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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