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누워서 꿀 것
“퉷!”
“재수 없는 놈들!”
묶인 사내들은 이미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침까지 뱉어 가며 테룬 공국을 모욕했다.
사람들은 묶여 있는 이들이 숫제 테룬 공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을 비난했다.
“테룬 공국 놈들은 다 죽어 버려야 해!”
“선량하게 사는 우리 제국민들 약탈이나 해 대고…….”
라이언의 큰 손으로 인해 미렌은 눈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말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미렌이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한 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프레니티 영지인가? 거긴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나?”
“아, 벌레처럼 죽지도 않고 꾸역꾸역 살아. 테룬 공국 출신들이 다 그렇지. 아무리 제국령으로 소속됐다고 해도 그 뿌리가 달라지나?”
공작 부인 살해 사건을 기점으로 테룬 공국과 제국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물론 프레니티 영지도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백성들 사이에선 심심치 않게 프레니티 영지민들을 모두 내쫓자는 말도 나오고 있었다.
그 정도로 프레니티 영지에 대한 이야기가 좋지 않았다.
“프레니티는 그냥 테룬 공국이야. 절대 워로덴 제국이 될 수 없다고!”
대화를 듣고 있던 미렌이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미렌?”
곁에 있던 라이언이 그런 미렌의 기색을 눈치채고 서둘러 고개를 가까이 했다. 그가 속닥이듯 괜찮냐고 물어 왔다.
그러나 미렌은 거기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결국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가 버렸다.
그녀를 따라 나온 건 라이언이었다.
“미렌, 무슨 일……. 안색이 좋지 않아. 상태가 나빠진 건가?”
“아니,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라이언…….”
미렌이 휘청이는 다리로 인해 중심을 잡지 못하자 라이언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
미렌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지지대로 삼았다.
아찔할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방금 전 보았던 광경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탓이다.
테룬 공국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니티 영지민들에 대한 이야기마저도 그토록 심각할지 몰랐다.
문득 미렌의 머릿속으로 밝게 웃는 제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그저 국가 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 나라에 왔을 뿐이었다.
만일 그녀가 황후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저 광경을 아무렇지 않게 보았을지도 모른다.
묶여 있던 두 남자는 무언가를 도둑질하다 잡힌 듯했다. 우연히 그들의 출신이 테룬 공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언.”
“말해, 미렌.”
“당신은 아직도…… 테룬 공국에 대해 반감이 있어요?”
“반감? 그들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어.”
미렌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과 두 눈이 마주치자 그가 한 나라의 황제다운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의 백성들을 죽인 이들을 용서할 수 없을 뿐이야.”
어째서 그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건가.
그녀는 황후였고, 제 나라와 제 백성을 사랑하는 황제를 바라보며 기뻐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을까.
미렌은 때때로 라이언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미렌, 당신은 저번에도 분명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지.”
그가 문득 한쪽 무릎을 굽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던 미렌과 눈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고개를 모로 돌리자 라이언이 집요하게 그 눈을 따라왔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던졌지?”
“…….”
“미렌.”
대답해 줘, 미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그녀를 타일렀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이대로 모든 걸 털어놓아도 라이언은 그녀를 감싸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면…….
참 이상도 하지. 목구멍에선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이 그토록 많은데도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해 버리면, 달라질 건 무엇인가?
이 나라의 황후가 사실은 프레니티에 사는 촌부였다고, 그렇게 말하면 무엇이 달라지느냔 말이다.
테룬 공국과의 전쟁은 기정사실이었으며 백성들의 인식이 달라질 리도 없었다.
라이언은 아마 그녀로 인해 고민만 깊어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이대로 두는 게 나았다. 차라리 라이언이 이대로 사감 따위는 없이 테룬 공국을 처리하는 게 옳은 일일 터였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결국 미렌은 끝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닙니다.”
“미렌.”
“아니에요, 라이언. 저도 모르게 감정이 차올랐나 봅니다.”
미렌이 한마디를 더할 때마다 더 이상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제 어깨를 짚은 라이언의 손 위로 제 손을 덮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게 더 가혹해. 차라리 마음 편히 당신을 걱정하고 싶어.”
“이제 곧 완치될 사람인걸요.”
“완치가 된다 해도 평생 당신은 내게 유리보다 약한 사람일 거야. 그러니…… 그러니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돼.”
아이처럼 조르는 라이언의 목소리에 미렌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완치만 되면 더 이상 걱정은 없었다.
미렌 에드가는 성공한 황후의 삶으로, 미렌 우드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농부의 삶으로…….
그렇게 완전히 두 삶을 갈라내면 되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피곤하고 바쁜 삶을 살지라도 이제는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라이언, 이만 움직일까요?”
“그래. 이 밤이 가기 전에 축제를 모두 구경해야 하니까.”
라이언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녀가 길을 잃지 않도록 시가지를 안내했다.
축제는 한밤중에도 뜨거운 열기로 휩싸여 있었다. 그 어떤 술집도 문이 닫힌 곳이 없었다.
계속해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던 라이언과 미렌이 쉬기 위해 들어간 곳은 제법 고급스러운 선술집이었다.
라이언은 가벼운 맥주를, 미렌은 간단한 음료를 주문했을 때였다.
옆자리에 있던 이들로부터 의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황후 전하께서 건강해지셔서 다행이야.”
“그럼, 자네 며칠 전 신문 못 봤나? 거리에서 길을 막고 선 어느 가난한 여인도 안아 주는 그 고귀한 자태 말이야.”
“폐하께는 천운이나 다름없지.”
갑작스레 들려온 자신의 이야기에 미렌이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그들은 제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그녀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사이 반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렌이 방향을 돌리자 라이언이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미안해.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그러했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걸요.”
“하긴, 당신은 잠행을 나온 게 처음이니까.”
“폐……, 라이언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몹시도 자주 들었지.”
때마침 그들의 앞으로 음료가 나왔다. 라이언이 가볍게 목을 축이고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를 신처럼 떠받드는 자들도 있었고, 내가 하루라도 빨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 자들도 있었어.”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마세요.”
“아주 쓸데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실제로 나를 원망하는 이유가 꽤 그럴듯했거든.”
라이언이 픽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가 제 잔을 미렌이 들고 있는 잔에 가볍게 부딪치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으니까.”
쨍-.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데 라이언은 음료를 마시지 않고 그대로 미렌의 옆자리를 떠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옆, 미렌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사내들의 사이였다. 다가간 라이언이 잔을 들이밀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하나?”
“오, 이런. 우리 목소리가 그렇게 컸나? 실례했소.”
“아니, 하는 이야기가 제법 재밌어 보여서 말이야. 일단 한잔하지.”
축제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가 라이언을 그들에게 동화되게 만들었다.
서로 잔을 부딪치자 안에 든 내용물이 넘칠 듯 출렁였다.
“황후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사실 나는…… 그분을 실제로 뵌 적이 있거든.”
“그래? 대체 어디서?”
라이언이 어깨를 들썩이며 놀란 척 물었다. 그 넉살스러운 반응에 오히려 미렌이 마시던 음료를 뱉을 정도였다.
“얼마 전 황성 연회에 초대되어……. 오, 이거 자네도 옷차림을 보아하니 귀족인가 보군? 혹시 연회에 왔었나?”
“아니, 아쉽게도 나는 초대받지 못했어. 그날도 혼자서 외롭게 술이나 마시고 있었지.”
“아아, 그런가. 안타깝군 그래.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내의 목소리 기저에는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었다.
황성 연회에 초대되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대단한 가문이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미렌의 기억에도 없는 얼굴인 걸 보면 그리 고명한 가문의 자제는 아니어 보였다.
“얼굴 한번 보여 주지 아니하신 채로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그 모습이 가히 천상에서 내려오신 것 같더군. 꼭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어.”
“오, 맞아. 그다음 날 아마 제대로 걷지 못하는 놈들이 몇 명 있었지. 감히 황후 전하께 반했다고는 말도 못 하고 말이야.”
사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더 신나 떠들었다.
그들은 제 일은 아닌 양 말했지만 사실 그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알았다.
그것이 떠드는 사내들 본인의 이야기라는 것을.
라이언의 말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하하, 맞네, 맞아. 엉거주춤 걸어 다니는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밤을 꼴딱 새운 거지.”
“거기다 그날 전하께서 처음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셨잖나?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며 술도 안 마시고 자리를 지키는 놈들이 몇 명이었는지.”
“폐하께서 아셨다간 진노할 이야기군, 그래! 하하!”
라이언은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손에 든 맥주나 몇 번 음미할 뿐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지자 사내 중 한 명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해 왔다.
“이봐. 자네, 벌써 취했나? 갑자기 조용해졌군.”
라이언이 아무런 말 없이 스윽 고개를 돌려 제 어깨를 건든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서 그 손의 주인을 지그시 바라봤다.
모자 아래, 표정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의 사내는 술에서 번뜩 깨어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기묘한 기시감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라이언.”
사내를 바라보던 눈길이 겨우 떼어졌다. 라이언은 제 등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웃으며 뒤로 돌았다.
그곳에선 모자의 챙을 붙잡아 얼굴을 가린 미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 갈까요?”
“그래, 좋아.”
라이언이 먼저 손을 내밀자 미렌이 우아하게 제 손을 올렸다.
둘은 조용히 선술집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사내만이 그 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내가 술을 마시다 말고 물었다.
“왜 그리 멍청하게 서 있어?”
“아니, 레이튼. 나 아무래도…… 또 꿈을 꾼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