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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3)화 (73/133)

저물다

다행히 북쪽 마탑은 남쪽과 달리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남쪽 마탑처럼 계단도 없이 오로지 마법으로만 움직이는 곳이었다면 헤겔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터다.

미렌이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가자 헤겔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내려가는 동안 온갖 마법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대한 남쪽 마법사’?”

“헤겔 카르너가 여긴 왜 온 거야?”

“듣기로 성격이 그렇게 괴팍하다던데.”

분명 좋은 말들은 아니었다. 대개가 두려워하거나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미렌은 헤겔이 혹시 그런 눈빛들에 상처를 받을까 힐끗 고개를 돌렸지만 헤겔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보려면 더 보라는 듯 턱을 꼿꼿이 든 채였다.

걸어서 직접 마탑을 나갈 때까지 둘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헤겔 씨.”

드디어 밖에 나왔을 때였다. 북쪽 마탑은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초심자가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녀는 멀리 가지 않고 숲 한가운데 서서 헤겔을 바라봤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네가 공문을 들고 남쪽 마탑을 찾아왔다며. 멍청한 리키 자식이 읽지도 않고 직인을 찍어 줬다던데.”

“……역시 리키 씨가 실수한 거였나요?”

미렌은 역시 그랬냐는 듯 손에 쥐고 있던 공문을 꺼내 들었다.

하긴, 리키의 태도가 너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직인을 찍어 주었다. 아마 다른 문서와 착각한 거겠지.

사악.

봉투에서 공문을 꺼내 든 미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펜으로 남쪽 마탑의 직인을 그으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헤겔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찡그린 헤겔이 그녀를 막았다.

“뭐 해?”

“의도하신 게 아니라면서요. 본의 아니게 리키 씨를 속인 게 됐으니 없던 일로 하려는 겁니다.”

“됐어, 그냥 둬.”

오히려 미렌으로부터 공문을 빼앗은 헤겔이 그것을 다시금 봉투 속으로 집어넣었다.

헤겔이 봉투를 건네자 미렌이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요?”

“뭐?”

“어째서 막으시냐는 겁니다.”

“그야…….”

헤겔이 일단 받으라는 듯 한 번 더 공문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미렌은 그것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손을 뒤로 물렸다.

“워프 마법도 싫어하시는 분이 이 훈련을 막겠다고 쫓아오셨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갑자기 왜 그냥 진행하라는 건가요.”

“그건.”

“제가 진행한 일이라서요?”

미렌의 얼굴 위에는 어떤 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섬뜩할 정도로 무감각한 얼굴이 헤겔을 향했다.

“저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헤겔 씨.”

“……아니야.”

“그럼 어째선데요?”

결국 헤겔은 공문을 건네지 못한 채 손을 떨어트렸다.

그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자 미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페카 씨는 헤겔 씨를 두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남을 도와줄 위인이 아니라고요.”

“나도 가끔씩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 그냥, 그뿐이야.”

“미렌 에드가의 일도, 미렌 우드의 일도 도와준 게 그냥이라고요?”

“그래.”

헤겔은 미렌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제껏 웃으며 대화하던 그녀가 유달리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무섭다고 느껴진 것은, 아마도 헤겔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제게 마음이 있으십니까?”

결국 그녀는 헤겔이 피해 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미렌과 두 눈이 마주친 순간 헤겔은 직감했다.

그녀의 입이 어떤 말을 할지.

“불편합니다, 그 감정.”

“……그렇다고 하지도 않았어.”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셨죠.”

어째서 이토록 불쾌할까.

꼭꼭 숨겨 놓았던 제 감정이 알페카로 인해 들켜 버려서?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이 박살 나 버려서?

글쎄. 그런 건 모두 틀렸다.

“헤겔 씨가 가지신 그 마음, 그건 미렌 에드가이자 미렌 우드인 절 모욕하신 겁니다.”

“…….”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미렌 에드가와 미렌 우드가 동일 인물임을 아는 것은 이 세상에 오로지 헤겔과 그녀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기혼자임을 안 순간, 접어야 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헤겔은 그녀를 모욕했다.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는 것도 당연했다.

“안녕히 가세요. 공문은…… 잃어버린 걸로 하겠습니다.”

돌아선 미렌이 홀로 숲속을 걸어 나갔다. 길은 아는 건지, 돌아갈 수단은 있는 건지 물을 수도 없었다.

오로지 그 등을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아아, 동생이 죽었을 때. 이런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문서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온 팔에 핏줄이 설 정도로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제 마음을 고백하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 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제 것이 아님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냥.

그냥…….

헤겔은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던 건지, 받아 주지 못할 마음을 어떻게 하려 한 건지.

그 사실이 가장 답답하고 불쾌했다.

***

“미렌, 일어났나?”

“……라이언.”

아직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녀가 미렌 에드가로 눈을 떴을 때는 라이언이 기다리고 있는 채였다.

어둠 속에서 다정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그녀의 속을 채웠다.

어쩌면 이제껏 라이언이 헤겔에 대해 그토록 경계심을 세웠던 게 아무 이유도 없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좋은 밤입니다, 라이언.”

몸을 세운 그녀가 라이언의 양 볼을 감싸 쥔 채 이마에 짧게 키스를 남겼다.

그러자 라이언이 낮게 웃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었어? 오늘따라 후하군, 그래.”

“악몽을 꿨는걸요.”

“이런, 괜찮은 건가?”

악몽이라는 말에 다가온 그가 미렌을 제 품에 안아 짧게 등을 토닥였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품속에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밤놀이를 나갈 수 있겠어? 그러려고 낮잠을 길게 잤는걸.”

“피곤하진 않습니다. 다만…….”

미렌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내자 마리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해 왔다.

“아르테미스를 준비했습니다, 전하.”

마리아가 끌고 들어온 트레이 위에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가온 마리아가 그것을 들어 건네자 미렌도 라이언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받아 들었다.

고급스러운 음각이 새겨진 찻잔 속에 든 아르테미스는 약재라기보다는 귀한 차 한 잔 같았다.

그녀가 마시기 직전 그것을 내려다보다 문득 물었다.

“이제 아르테미스는 얼마나 남았지?”

“사흘이면 동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아르테미스를 다 마시고 난 뒤에는?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러고 보면 헤겔로부터 아르테미스를 다 마시고 난 뒤의 일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나직이 말했다.

“완치, 라고 하셨습니다.”

완치.

그 말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어려서부터 언제나 병을 달고 살았던 미렌은 자신이 건강해지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찻잔 속에서 찰랑이는 물을 그녀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수면 위로 머리 위에 뜬 초승달이 오붓이 담겨 있었다.

결국 그녀는 더 고민하지 않고 그것을 말끔하게 마셔 냈다. 이제는 익숙해진 쓴맛이었다.

“라이언, 이제 나가는 겁니까?”

“아아. 그래. 다만 이렇게 나갈 수는 없겠지.”

그가 미렌과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옷들은 이대로 밖에 나갔다간 곧장 황제와 황후인 걸 들키고 말 터였다.

마리아가 시녀들을 불러 옷가지 몇 벌을 가져왔다.

미렌의 것은 귀족 영애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원피스였고, 라이언은 영식이 입을 법한 양장이었다.

둘 모두 옷을 갈아입자 제법 그럴듯한 귀족가의 사람으로 보였다. 물론 둘 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각각의 모자를 썼지만.

미렌이 제 옷을 내려다보며 살풋 웃었다. 미렌 에드가로서 드레스나 잠옷이 아닌 옷을 입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나가는 게 이 몸으로선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라이언은 조용히 나가기 위해 마차 대신 말을 타야 한다며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정원 쪽에 그가 자주 타는 말 한 마리가 대기한 채였다.

먼저 말에 오른 라이언이 미렌에게 손을 건네었다.

장갑을 낀 손들이 서로를 맞잡자 라이언이 그녀를 껴안아 제 앞에 태웠다.

곧 말이 출발했다. 그녀는 마차와 달리 곧장 시원한 바람이 제 뺨을 간질이자 짧게 웃었다.

“말을 타는 게 처음이야?”

“배울 수도, 태워 줄 이도 없었으니까요.”

“앞으로는 언제든 나갈 수 있게 될 거야.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라이언의 들뜬 마음도 그대로 느껴졌다. 처음부터 오로지 둘이서만 황성을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이언.”

“음?”

“제가 완치되면 무엇이 가장 하고 싶으십니까?”

“당신이 건강해지면? 글쎄.”

라이언은 능숙하게 말을 다루면서도 대답을 고심했다.

그녀가 건강해지는 일, 그건 아마 라이언으로서도 깊게 상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라이언이 숨을 탁 트며 농담하듯 말했다.

“황위를 내려놓는 것?”

“폐하.”

그녀가 단호하게 그를 부르자 라이언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겠지. 후계도 정하지 않았으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마세요. 모두 들고 일어날 겁니다.”

“그래, 알겠어. 나는 그냥…… 내 바람은 아주 소박해.”

말의 속도가 점차 높아지자 라이언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무척이나 마른 미렌이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렌도 제 모자가 날아갈까 싶어 조금 더 움켜쥐었다.

그사이 저 멀리 황성 앞 거리의 시끄러운 소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신과 오랫동안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

“…….”

“그게 내가 꿈꾸는 전부야.”

시가지에 들어가기 전 말을 세운 라이언이 먼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그가 아직 말에 타고 있는 미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리자 라이언도 미렌을 껴안아 아래로 내렸다.

말에서 내리는 그들의 모습은 황후와 황제라기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영식과 영애 같았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아직 축제가 한창인 시가지로 들어섰다.

웃음소리가 가득한 사람들 사이로 유난히 시끄러운 목소리가 있었다.

“황후 전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미렌과 라이언의 눈길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사람들 몇 명이 모여 양손을 들어 가며 황제와 황후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곳에 다가가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미렌과 라이언은 그들 사이를 비집고 조금 더 안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이런.”

라이언이 서둘러 미렌의 두 눈을 가렸다.

그곳에선 테룬 공국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묶인 채 돌팔매를 맞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테룬 공국을 욕하는 낙서들이 난무했다.

“보지 마, 미렌.”

볼 필요가 없는 일들이야.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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