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2)화 (72/133)

북쪽왕관자리

“정신이 나가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으음, 그것보다 그쪽 소개가 먼저일 것 같은데. 일단 내 연구실로 갈까요?”

미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알페카가 손을 한번 흔들자 순식간에 공간이 뒤바뀌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1층 홀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조용하고 협소한 알페카의 개인 연구실에 도착해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훑어보던 미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미렌 우드, 오늘은 황성 기사단을 대신해 찾아왔습니다. 다만 헤겔 카르너 씨와도 인연이 있어요.”

“헤에? 그거 정말 이상하군요? 황성 기사단이라면 그 고까운 이올라오스 트리온과도 인연이 있다는 말인데, 그런 사람이 헤겔과도 알아요?”

“두 분 다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미렌의 모습에 알페카가 씩 웃었다.

기사와 마법사, 둘 모두와 인연이 있다는 게 얼마나 특이한 일인지 모르는 그녀가 제법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알페카는 먼저 앉으라며 구석에 마련된 소파로 미렌을 안내했다.

2인용 정도의 협소한 소파에 그녀를 앉힌 알페카는 소파 대신 맞은편 업무용 책상에 앉았다.

눈높이 차이가 나긴 했지만, 좁은 개인 연구실에서 그곳 말고는 앉을 만한 곳이 없었다.

알페카가 다리를 달랑이며 물었다.

“트리온 경은 그렇다 치고, 헤겔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건데요?”

“우연히 저희 마을에 왔다가 다쳐 있던 걸 도와 드렸어요. 그 뒤로 일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 마을? 수도 출신이 아닌가 봐요?”

“프레니티가 고향입니다.”

호오…….

그 대답에 알페카가 놀람이 섞인 소리를 냈다.

어느 귀족 영애처럼 차려입은 모습 탓에 당연히 그녀도 귀족일 줄 알았다.

프레니티라면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라 귀족이 살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알페카가 조금 더 질문을 던졌다.

“프레니티가 고향이라는 건, 지금 다른 데서 살고 있다는 말이죠?”

“……트리온 백작가에 신세를 지고 있어요.”

“정말 특이한 이력이네. 기사와 마법사 둘 다 알기가 쉽지 않은 거, 알고 있어요?”

“어째서 쉽지 않죠?”

“그야 우리는 기사들을 혐오하니까요. 아마 기사들은 마법사를 경멸할걸요?”

하지만 이올라오스와 헤겔 모두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모습은 잘 보지 못했는데.

미렌은 그에 대해 반박하길 관두고 다른 걸 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질문을 드려도 됩니까?”

“아? 내게 물어볼 게 있어요? 그래, 뭐.”

“헤겔 씨가 황후 전하를 돕겠다고 정신이 나가 버렸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죠?”

음…….

별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던 알페카는 그녀가 생각보다 집요하게 물어 오자 일단 입을 다물었다.

왜인지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이후 헤겔에게 큰코다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쪽 마탑과 척이라도 졌다간 곤란해지는 건 알페카였다.

“정말 별 뜻 아니었는데.”

“그래도 알려 주세요.”

“얼마 전에 황궁에서 연회가 있었어요. 거기서 헤겔이 황후 전하를 돕겠다고 마법을 썼거든요. 근데 그게, 우리 마탑주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 아니라. 특히 헤겔은 더더욱이요.”

“헤겔 씨가…… 어째서요?”

“녀석이 누굴 위해서 움직일 성격은 아니지 않나요? 하하.”

물론 이 정도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헤겔을 안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알페카와 오퓨커스로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무려 스승이 직접 데려온 제자였던 헤겔은, 첫 만남에서부터 무척이나 거만했다. 그가 유일하게 인간미를 보일 때는 오로지 동생의 앞뿐이었다.

그러다 동생이 병으로 죽었을 때는, 다시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오랜 친구인 오퓨커스와 알페카마저도 그 슬픔을 함께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랬던 헤겔이 대뜸 연회에 참가하더니 황후를 위한 마법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알페카는 그게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대놓고 부정하는 걸 보니 우리가 틀린 걸 수도 있지만요. 황후에게 약점이 잡힌 걸 수도 있죠.”

알페카가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말을 꺼냈지만, 미렌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알페카가 흠, 흠 하고 분위기를 상기시켰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럼 이제 가져온 공문을 볼까요?”

미렌이 소파 앞에 놓인 낮은 테이블 위로 가져온 공문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알페카가 그것을 제 쪽으로 가져왔다.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양피지를 꺼내자 <합동 훈련 협조문>이라는 문구와 함께 가장 아래에 남쪽 마탑의 직인이 보였다.

그를 본 알페카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남쪽 마탑에서 직인을 찍어 줬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네, 다만 헤겔 씨가 안 계셔서 저와 키가 비슷한 남자분께 직인을 받았어요.”

“리키? 혹시 얼굴이 하얗고 무척이나 어리게 생겼던가요?”

“그분의 이름이 리키신가 보네요.”

“오, 이런. 불쌍한 리키.”

또 헤겔에게 끔찍할 정도로 혼나겠구나.

알페카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어쨌든 남쪽 마탑은 제쳐 두고, 알페카는 제법 진중한 얼굴로 공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읽은 공문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 뒀다.

“미안하지만 우리 북쪽 마탑은 함께해 줄 수 없을 것 같군요.”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음? 음…….”

대뜸 이유를 묻는 미렌으로 인해 알페카는 내심 당황했다. 이제껏 공문을 들고 찾아왔던 기사들은 안 된다고 말하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그건 기사들 특유의 고지식한 반응이기도 했고, 마법사와 기사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서로가 너무나 잘 알아서 그렇기도 했다.

그런데 이유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질문이다.

“전시 상황도 아닌 지금, 굳이 합동 훈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시가 아닐 때 훈련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뒤에는 늦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제국은 테룬 공국으로 인해 불안한 분위기고요.”

“어…… 하지만 우리 마법사들은 대부분 바쁘고 개인적인 외주를 처리하고 있어서요. 아무리 모의 훈련이라지만 모두의 시간을 맞추는 건…….”

“공문에는 분명 마법사 열 명 정도의 지원을 부탁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정확히는 기사들의 마법 공격 대응 훈련을 위해서니까요. 조금 전 보니 마법사분들이 무척이나 많던데, 힘드실까요?”

“힘들지는 않죠, 그런데, 음…….”

어라?

이상했다. 왜인지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다.

알페카가 심기일전하여 대화를 주도하려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도 마법사와 기사들의 사이가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언제까지 손 놓고 있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훈련이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직이 말한 미렌이 조심스럽게 공문을 알페카 쪽으로 밀어 왔다.

멍하니 고개를 들던 알페카는 우연히 미렌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씩 웃어 보였다.

그제야 알았다. 어째서 제 앞에 있는 여자가 기사단장과 마탑주 둘 모두와 인연이 있을 수 있는지.

기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 여기. 북쪽 마탑은 훈련에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민하던 알페카는 곧 품에서 직인을 꺼내 들었다. 남쪽 마탑도 참여하니 어쩌면 정말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건 모두 알페카가 4방위 마탑주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열린 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아, 그런데. 헤겔과 황후 전하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지금, 무슨 소리야?”

마지막 한마디는 미렌의 것도, 알페카의 것도 아닌 낮은 목소리였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머리가 엉망으로 휘날린 헤겔이 서 있었다.

“헤겔?! 네가 여긴 어떻게, 꼴은 그게 뭐야?”

“입 닥쳐, 알페카. 나는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어.”

“어? 왜 화가 났…….”

아, 들었구나.

그가 조금 전 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버렸음을 직감한 알페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헤겔의 성격상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알페카는 일단 웃었다. 웃는 얼굴을 설마 치기라도 하겠냐는 마음이었다.

“헤겔 씨, 조금 진정하는…….”

퍼억.

미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겔의 주먹이 날아갔다.

명치를 제대로 맞은 알페카가 뒤로 밀려나며 제 배를 붙잡았다.

온 얼굴이 구겨진 알페카를 두고 헤겔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분명 내가 입 닥치라고 했었을 텐데. 그걸 지키지 않은 건 너야, 알페카.”

“야……!”

“헤겔 씨!”

헤겔의 손이 한 번 더 나가려는 순간, 미렌의 부름이 그의 손을 멈추게 했다.

잠시나마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미렌이 서둘러 알페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신 헤겔과 마주 보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너…… 비켜. 저놈과 아직 할 말이 남았으니까.”

“지금은 알페카 씨가 아니라 저와 대화를 해야 할 때 아닌가요?”

미렌의 두 눈이 올곧게 헤겔을 향했다.

만일 그녀가 알페카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헤겔을 막기 위해 입을 열었다면 그는 멈추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바라보라는 듯, 단호하고 올곧은 눈길로 헤겔을 마주할 뿐이었다.

결국 헤겔의 주먹도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죠. 우리 할 얘기가 있는 듯싶네요.”

미렌이 한마디를 남기고 먼저 연구실을 나갔다. 헤겔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직 배를 붙잡은 채 서 있는 알페카를 내버려 두고 그녀를 따라갔다.

순식간에 홀로 남은 알페카가 슥슥 제 배를 문질렀다.

“그래도 봐줬네. 성격대로 했으면 주먹이 뭐야, 바로 마법이 나갔지.”

알페카가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는 헤겔이었다면 알페카를 죽이겠다고 최상위 공격 마법을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혹시 싶어 창가로 다가가자 이제 막 마탑을 빠져나가는 미렌과 헤겔의 모습이 보였다.

창틀에 걸터앉아 그것을 내려다보던 알페카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황후 이야기에 저 여자가 끼는 거야?”

둘은 다른 사람인데.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들은 아무리 변장을 하거나 마법으로 모습을 바꿔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미렌 우드와 멀리서 본 미렌 에드가 황후는 전혀 다른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알페카의 주 마법이 치료 계열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두 여자의 상관관계에 대해 흥미가 생긴 알페카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오퓨커스에게 부탁해 볼까.”

오퓨커스, 그녀는 치유 마법으론 헤겔을 능가하는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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