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속삭임
“저, 실례지만 누구신지…….”
미렌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리키가 그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마탑으로 향했다.
벌컥!
문이 열리자 놀랍게도 이전과 다른 넓은 홀이 나왔다.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탑은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장이 높았다.
거기다 벽들에는 빼곡하게 책이 채워져 있었다. 물론 미렌이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홀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던 공간이, 리키와 함께 들어가자 밝다 못해 눈이 부셨다. 책들 사이사이로 창문이 존재해서 특유의 꿉꿉한 냄새도 없었다.
“여기, 원래 이렇게 밝나요?”
“응? 아. 혼자 먼저 들어오셨어요? 마탑들은 각각의 방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동행 마법사가 없으면 혼자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요. 뭘 보셨나요?”
“제가 들어갔을 땐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어요.”
“아하. 악몽의 밤에 다녀오셨나 보네요. 오래 계셨으면 악몽을 꾸듯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리키의 모습에 미렌이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게 있다면 문 앞에 주의하라는 문구라도 붙여 놓는 게 정상 아니던가.
미렌과 키가 비슷한 리키는 그대로 앞서 나가 휙 돌아섰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남쪽 마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에 미렌이 어색하게 박수를 쳐 주었다.
들어오고 난 뒤부터 혹시 다른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주변을 살펴봤지만 인기척은커녕 생물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키도 무안했는지 서둘러 팔을 내리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가 용건을 말하기 위해 다시 미렌에게 돌아왔다.
“직인을 받으러 오셨다고 했죠? 탑주님과는 어떤 사이신가요?”
“예? 어떤 사이……요?”
“네! 탑주님이 이런 중요한 문서를 아무에게나 들려 보낼 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리키가 미렌의 양옆으로 얼굴을 쏙쏙 내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셔서요. 탑주님은 친구 없으신데.”
“헤겔 씨가 친구가 없어요?”
“헉, 이름을 부르세요?! 진짜 친구인가 봐!”
미쳤다, 미쳤어. 리키가 호들갑스럽게 제 입을 가려 댔다.
이올라오스도 그렇고, 헤겔도 그렇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게 왜 그리 놀랄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렌이 나고 자란 프레니티에서는 사람들끼리 이름 대신 성을 부르면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던 탓이다.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하네요.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에엑, 저희 탑주님은 그런 것도 없어요! 맨날 세상 자기 혼자 사는 줄 아는 사람인데! 멜리크 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니까요.”
대화를 나누던 리키가 손바닥을 짝 치며 돌아섰다. 직인을 찾으러 간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미렌이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걸어가던 그가 우뚝 멈추더니 뒤돌아섰다.
그러고선 그녀에게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안 따라오세요?”
“제가…… 따라가요?”
“그럼요! 탑주님 친구분인데 못 올 게 뭐가 있어요. 같이 가요!”
아, 아니 친구가 아니라…….
하고 덧붙여진 미렌의 말들은 모두 무참히 씹혔다. 리키는 다짜고짜 미렌의 팔을 이끌고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는 말이다.
“어? 어어!”
“헤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참고로 저는 이동 마법 전문이에요. 이동 마법은 쥐약이신 탑주님이 절 선택한 이유죠!”
“헤겔 씨가 이동 마법에 쥐약이었어요? 모든 마법에 재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앗, 이거 비밀이에요. 탑주님은 자기가 마법에 재능이 없다는 말을 지독히도 싫어하시거든요.”
소곤소곤 리키가 해 온 말에 미렌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위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였다.
“어쩐지 본인이 못하는 건 죽어도 인정 안 하더니.”
“와와! 맞아요, 맞아! 탑주님은 자존심이 너무 세요. 솔직히 이동 마법은 저 못 따라오시면서.”
리키가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정 높이에 다다르자 그녀와 자신을 깃털처럼 가볍게 안착시켰다.
헤겔이 멀미까지 해 가며 해 보였던 워프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물론 하늘을 나는 마법과 워프 마법은 다른 거긴 하지만, 조금 전 보여 준 리키의 섬세함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다정한 마법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헤겔 씨는 지금 어딜 가셨어요?”
“아, 그게요. 오전까지는 계셨는데 갑자기 ‘확인하러 가 봐야겠다.’ 하시더니 대뜸 가 버리셨어요. 뭘 확인하러 가신 걸까요?”
“글쎄요. 매번 멋대로 왔다가 훌쩍 가 버리긴 하죠, 헤겔 씨가.”
“오, 그거 정말 공감해요.”
둘이 내린 곳은 마찬가지로 책장들이 있긴 했지만 구석에 어지럽게 물건이 펼쳐진 책상 하나도 있었다.
그 앞으로 간 리키가 물건들을 치우고 뒤적거리더니 동그란 도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찾았다!”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새까만 도장에 리키가 후, 입바람을 불었다. 그것을 제 로브에도 몇 번 슥슥 닦더니 다시금 미렌에게 돌아왔다.
“편지 주실래요?”
“편지요? 아.”
공문을 말하는 건가? 원래 공문을 두고 편지라 하나?
어딘지 이상했지만 미렌은 일단 내내 쥐고 있던 양피지를 건넸다. 방금 하늘을 나느라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꽤 새것 같았다.
봉투를 벗기고 안의 것을 꺼내 든 리키는 고민하지 않고 가장 아래에 직인을 찍었다.
득의양양한 표정의 리키가 공문을 돌려주자 미렌이 의아해하면서도 받았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 끝인가요?”
“네? 네! 탑주님은 매번 자리를 비우셔서 언제나 최종 결재는 제가 하거든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어디로 가세요? 저도 아는 곳이면 제가 도와 드릴게요.”
리키가 그 정도야 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제 입으로 이동 마법의 귀재라고 했으니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그녀게 제 목적지를 털어놓았다.
“북쪽 마탑으로 갈까 하는데요.”
“오! 저도 아는 곳이네요! 좌표를 알고 있으니 바로 보내 드릴게요.”
“네?”
신이 난 리키가 미렌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속사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얼이 빠졌던 미렌은 그런 리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그녀가 눈을 한 번 감은 순간, 미렌이 리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무사히 미렌을 보내 버린 리키는 속 시원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마탑에 찾아온 손님도 잘 배웅했고, 탑주는 아마 며칠 뒤에나 돌아올 테니 이제 해방이었다.
사 온 과자나 먹으면서 소설이나 읽어야지. 리키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을 때였다.
“……어디 갔어.”
“윽, 으아아아악!”
“시끄럽다, 리키.”
고개를 돌리던 리키는 자신보다 훨씬 큰 헤겔을 발견하고서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거기다 워프 마법이라면 질색을 하는 상관이었다.
그런 그가 멀미까지 해 가며 마탑에 워프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리키의 고민을 풀어 주듯 헤겔이 눈썹을 구기며 다그쳤다.
“미렌 우드, 어디 있어? 여기로 왔다며.”
“미렌…… 우드요? 아, 그 분홍색 머리 여자분 말씀이신가?”
“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리키가 놀라게 좀 하지 말라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헤겔은 이미 리키의 엉덩이 따위엔 관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미렌 우드가 지금쯤이면 일어났을까, 싶어 갔더니 그녀는 이미 백작가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소식을 들어 보니 제 마탑으로 갔다는 말에 서둘러 따라온 참이었다.
“방금 갔어요. 제가 특별히 워프 마법으로 보내 드렸죠! 헤헤, 제가 또 이동 마법엔 일가견이 있잖아요. 탑주님 손님이라고 정반대에 있는 북쪽 마탑인데도…….”
“뭐, 어디로 갔다고?”
“북쪽 마탑이요!”
남쪽 마탑과는 정반대에 있는 곳이라 워프 마법에 재능이 있는 리키로서도 꽤 많이 힘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싶어 우쭐거리는 얼굴로 허리를 짚었다.
그리고, 헤겔에게 딱밤을 맞았다.
“걔를 거기로 왜 보내!”
“이씨……. 북쪽 마탑에서도 직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럼 가야죠!”
“북쪽 마탑에서‘도’? 설마, 너 직인을 찍어 줬어?”
“네? 당연하죠. 탑주님이 그렇게 시켰잖아요!”
“내가 언제!”
“오늘 아침에요!”
억울해진 리키도 헤겔에게 지지 않고 소리쳤다.
헤겔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그가 발돋움까지 해 가며 반박해 오자 분노를 억누르듯 한마디씩 짓씹어 내뱉었다.
“내가, 언제, 합동 훈련에, 참여한다고, 했는데.”
“합…… 합동 훈련이요?”
“그래. 불쌍한 리키, 말해 봐. 내가 언제 그런 걸 시켰지?”
“저, 전쟁 관련된 편지가 아니었어요?”
본인이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직인부터 찍었음을 알고 있던 리키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곧장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가 헤겔을 바라봤다.
“전 진짜 몰랐단 말이에요!”
“일단 이리 와.”
“시, 싫어요!”
“더 불쌍한 리키가 되고 싶어?”
헤겔이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리키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헤겔이 긴 팔을 뻗어 그를 잡으려는 순간.
사아악!
리키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워프 마법을 사용했음을 안 헤겔이 분노의 숨을 내쉬었다.
도망친 것이다. 헤겔이 이토록 화가 났을 때면 리키는 매번 이런 식으로 도망을 갔다.
일단 헤겔은 생각을 바꿨다.
리키보다 미렌을 잡는 게 먼저였다.
북쪽 마탑으로 갔다고 했으니 지금이라도 리키의 이동 마법을 통해 움직이면…….
리키의 이동 마법?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다른 마법은 전혀 못 하는 대신 이동 마법은 수준급으로 하는 제 부관이 당장 도망쳤다는 것을.
그 말은, 그가 또다시 헛구역질을 해 가며 워프 마법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헤겔의 리키를 향한 고성이 남쪽 마탑을 가득 채웠다.
***
“어서 오세요. 북쪽의 왕관, 북쪽 마탑입니다. 누구를 찾아오셨나요?”
“아, 저는 황성 기사단에서 공문을 들고 온 사람입니다. 북쪽 마탑주님을 뵈러 왔는데요.”
눈을 감았다 뜨자 북쪽 마탑의 앞에 서 있던 미렌은 자연스럽게 마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북쪽 마탑은 아무도 없던 남쪽 마탑과 달리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물론 다들 마법사용 로브를 입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남쪽 마탑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처음 안내를 맡아 줄 사람도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제 용건을 말하자 아마도 마법사일 상대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전해 왔다.
“마침 알페카 님이 연구실에 계시네요. 안내해 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
“내 손님?”
“알페카 님!”
대화를 나누던 이가 반가운 얼굴로 외치자 자연스럽게 미렌도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연회에서 잠깐 지나가듯 얼굴을 보았던 북쪽 마탑주 알페카가 있었다.
“이쪽은 누구?”
“황성에서 오셨답니다. 공문을 전달하러요.”
“안녕하세요. 미렌 우드입니다.”
“미렌? 미렌……, 음,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알페카가 문득 박수를 짝 쳤다.
“아! 헤겔이 푹 빠졌다는 황후의 이름도 미렌이었지, 참.”
“네?”
“아, 그쪽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헷갈렸어요. 안녕, 나는 알페카. 북쪽 마탑을 다스리고 있답니다.”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세요? 헤겔 씨가 황후 전……하에게 푹 빠졌다니요?”
“아아,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냥 우리끼리 하는 우스갯소리니까.”
미렌이 눈을 찌푸린 채 알페카에게 한 번 더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알페카가 알아서 대답해 주었기 때문이다.
“헤겔이 요즘 황후 전하를 돕겠다고 아주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거든요.”
안 그래요? 알페카가 미렌을 바라보며 살갑게 웃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