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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70)화 (70/133)

불쌍한 리키

알현실 밖으로 나온 미렌과 이올라오스가 잠시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선 이올라오스가 미렌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이제 어쩌죠?”

“예?”

“아니, 제가 이올라오스 경의 아래로 들어가서 도움 드릴 일이 있을까요? 폐하께서 농담을 하신…….”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올라오스가 폐하는 농담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라고 덧붙여 왔다.

그러나 미렌 에드가의 앞에서는 얼마든지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는 남자였다.

그녀는 대체 제 남편의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아마 폐하께서는 보기보다 우드 씨가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예? 제가요?”

첫 만남부터 멱살이 잡혔던 사이다. 그게 마음에 들어 하는 거였다고?

“그러니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 제게 맡기신 겁니다.”

“하지만, 전 사흘 뒤에는 돌아가야 하는걸요.”

“그럼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하시죠.”

짧게 웃으며 한마디 남긴 이올라오스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갈 곳이 없어진 미렌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가야만 했다.

“지금 어디로 가세요?”

“지금은 기사들의 훈련 시간입니다. 단장인 제가 시간마다 그들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사단 훈련소라니, 처음 가 보는 곳이네요.”

“우드 씨께서는 황성이 두 번째시니 어디든 처음이지 않습니까?”

황후로서 가 볼 일이 없던 곳에 간다는 생각에 내뱉었던 말이었다.

미렌이 숨을 들이켜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죠.”

“훈련소는 이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오늘 제 업무가 많은 편이니 잘 따라오십시오.”

이올라오스의 너른 걸음걸이를 따라가자 정말 저 멀리 훈련소 건물이 보였다.

다른 곳과 달리 화려하지 않은 건물과 넓은 운동장이 눈에 띄는 곳이었다.

익숙하게 철창문을 열고 들어간 이올라오스가 먼저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갈 찾았다.

그러자 각기 나뉘어 운동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단장님, 오셨습니까?”

“단장,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테넷 경은 어디 있나.”

시끌벅적한 기사들의 질문을 모조리 무시한 이올라오스가 제 용건부터 찾았다.

그런데 누군가 대답하기도 전에 인파 사이로 한 명이 빠져나왔다.

“찾으셨습니까.”

“따라오도록.”

“예, 단장.”

이올라오스와 테넷은 동시에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향해 갔다.

혼자 남기도 뭐했던 미렌이 그 뒤를 따라가자 모여들었던 기사들도 다시금 흩어져 훈련을 시작했다.

미렌과 함께 이올라오스의 뒤를 따라가던 로이아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우드 님께선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의 명이다.”

“그렇습니까.”

어떤 명인지에 대해선 로이아도 더 묻지 않았다.

그게 기사로서 지켜야 할 예의기 때문이다.

이올라오스는 폭이 넓고 낮은 계단을 올라가며 로이아에게 질문을 던져 댔다.

“마법사들은 어떻게 되었지?”

“서쪽과 동쪽 마탑에선 거절했습니다. 본인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더군요.”

“본인들은 제국민이 아니라 이건가?”

“……죄송합니다. 설득력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라 귀찮은 일은 감수하기 싫단 개인주의적인 생각이겠지.”

조심스럽게 대화를 엿듣고 있던 미렌은 생각보다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기 싸움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헤겔도 종종 기사들을 두고 머리에 근육만 찬 놈들, 이라고 무시했었다.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이올라오스가 미렌을 불렀다.

“우드 씨,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예?”

“테룬 공국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기사들의 훈련 강도가 저토록 높아진 겁니다.”

창밖을 힐끗 보자 모든 기사들이 쉬지 않고 훈련하는 것이 보였다.

하긴, 아직 테룬 공국이 제국의 국경을 어떻게 뚫었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아마 그동안 기사들의 부담감은 무척이나 높아졌을 터였다.

“하여 마법사들에게도 훈련에 협조를 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고 있는 바인데…….”

“쉽게 협조를 하지 않는군요?”

“그렇습니다.”

원체 개인적이고 따로 행동하는 마법사들이다.

아무리 마탑으로 공문을 보내도 당장 도와줄 인력이 없다, 라고 해 버리면 이쪽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로이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제가 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테넷 경, 저번 협조 요청 때 네가 갔다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나?”

열정 하나는 넘치는 로이아는 이전에도 공문을 들고 마탑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시 그녀가 방문한 마탑은 ‘마녀’ 오퓨커스가 다스리는 서쪽 마탑이었다.

로이아가 하는 모든 말은 정반대의 성격인 오퓨커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고, 오퓨커스는 그대로 로이아를 내쫓았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를 떠올린 로이아가 뒷짐을 지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그때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받지 못해 국가 행사에 마비가 왔었다.

“그럼 누구를 보내는 게…….”

“기사들은 모두 훈련받고 있나?”

“예, 그렇습니다.”

축제로 인해 모두가 한창 바쁠 때였다.

직접 갈 수도 없는 이올라오스가 고민하다 문득 옆에 멍하니 서 있던 미렌과 눈이 마주쳤다.

이올라오스가 다정히 웃었다.

“좋은 적임자가 있군요.”

***

터덜터덜.

양피지를 손에 쥔 미렌이 기사단 훈련소 정문을 나섰다.

제 손을 한번 내려다보던 그녀가 푸욱,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언의 명령으로 이올라오스를 따라오게 된 그녀는 졸지에 이번엔 마탑에 가게 생겼다. 심지어 기사단 대표로서.

이올라오스는 미렌을 발견하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남쪽 마탑에 먼저 가십시오. 헤겔 카르너가 그곳에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헤겔과 인연이 있으니 잘 해결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마차를 타고 남쪽 마탑까지 가라니.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마차에 올랐다.

어서 움직여야 오늘 내로 남쪽 마탑에 갔다 정반대에 있는 북쪽 마탑에도 도착할 수 있었다.

“마부님,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그럼요. 제게 맡기십시오.”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던 미렌이 마부의 대답을 듣고 다시 들어왔다.

기사단에서 준비해 준 마차는 이제껏 황후인 미렌이 탔던 것들과 다르게 무척이나 수수했다.

황성에서 남쪽 마탑까지는 서너 시간은 가야 했다.

그녀는 그동안 잠시 잠이 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와아아아아!”

“…….”

“……?!”

황성을 나서자 마차 밖이 시끄럽다 못해 귀가 아팠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

축제 날답게 거리의 악사들과 곡예사들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젊은 연인들이 구경거리를 즐기느라 바빴다.

그러고 보면, 오늘 밤에는 라이언과 함께 거리를 나서기로 했었다.

그 전까지는 잠이 들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깥 구경을 하고 있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차가 출발한 지 두 시간여쯤 지났을까, 저 멀리 마탑의 실루엣이 보였다.

남쪽 마탑이었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 아닙니다. 먼저 돌아가셔도 돼요.”

마차를 기다리게 하면 대기비 또한 추가로 들었다.

사설 마차인 터라 돈이 아까웠던 미렌은 손사래를 쳐 그것을 거절했다.

북쪽 마탑으로 향할 때에는 차라리 헤겔에게 말해 새 마차를 구해 달라는 게 나을 것이다.

미렌에겐 미리 이올라오스로부터 받은 공금도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끼이이.

마탑의 문에서는 녹슨 경첩 특유의 오래된 소리가 났다.

똑똑. 들어온 그녀가 혹시 싶어 문을 두드렸지만 안쪽에서 나오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 앞에는 새까만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휘이이.

바람 소리마저 을씨년스러운 이곳이 정말 마탑이 맞는 걸까. 헤겔은 이런 곳에서 지냈던 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휙, 미렌의 눈앞으로 새하얀 무언가가 지나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다시금 눈을 뜨자 그녀의 앞에 한 남자가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어두운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자 반가웠던 미렌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저는 남쪽 마탑주인 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눈을 한 번 더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처음 들어왔던 문 앞에 있었다.

어이가 없어진 미렌이 다시금 문을 열려고 했지만 녹슨 경첩이 달린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녀가 쾅! 그곳을 발로 찼다.

“없긴 뭐가 없어?”

누누이 자신을 ‘위대한 남쪽 마법사’라고 소개했던 헤겔이다.

그런 남자가 마탑에 없으면 지금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공문을 들고 온 입장에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미렌은 미간을 구긴 채 잠시 고민했다.

“누구세요?”

“어? 혹시 마법사십니까?”

“네, 그렇긴 한데……. 저는 이 탑을 관리하는 ‘리키’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헤겔 카르너를 찾아왔는데요.”

“네?”

오랜만에 시장에 나가 빵을 사 들고 돌아오던 리키는 분홍 머리의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미 자리를 비운 지 오래인 제 상관을 찾아온 손님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손에 리키도 아는 익숙한 종이가 보였다.

리키의 머릿속으로 오늘 아침 헤겔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남쪽 마탑은 그 전쟁에 참가한다.’

‘네에에에?!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그러니 직인을 준비해 두라 했잖아.’

결국 일이 터졌구나. 침을 꼴깍 삼킨 리키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남쪽 마탑의 직인을 받으러 오신 거죠?”

“그걸 어떻게…….”

“후, 저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어요. 절 따라오세요. 직인을 찍어 드릴게요.”

헤겔 카르너가 마탑주가 된 뒤로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남쪽 마탑과 황성 기사단의 합동 훈련이 이루어지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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