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초식 동물이 될 때
“바로 폐하를 뵈러 갑니까?”
“그렇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 주셨으니, 부디 저번과 같은 실수는 하지 마십시오.”
“실수는 이올라오스 경이 하셨는걸요.”
“예?”
앞서가던 이올라오스가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자 미렌도 그를 따라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실의 넓은 복도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는 복숭아를 머금은 듯 생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를 미렌이라 부르셨잖아요.”
백작 부인의 권유로 착용한 챙 넓은 라피아햇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가 그 챙을 짧게 잡아당겼다.
이올라오스는 저도 모르게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마도 미렌이 그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래도록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군이 기다리고 있을 그 순간에.
“물론 폐하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이셨겠지만요.”
“알고…… 계셨습니까?”
“이올라오스 경은 언제나 저를 제 성으로만 부르시잖습니까?”
미렌을 두고 언제나 딱딱하게 우드 씨, 하고 부르던 이올라오스가 그 순간만 특별히 미렌이라 불렀을 리가 없었다.
그는 미렌에게 황후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했지만 결국 당장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금기를 어긴 것이다.
미렌은 그에 대해 제대로 된 감사를 전한 적이 없었다.
이제껏 너무 정신없이 바빠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매번 절 챙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올라오스 경.”
“……그런 적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수도에 올라와서, 얼마 없는 재산도 잃어버리고, 거기다 도둑으로 몰렸는데 구해 주셨어요. 이게 다 도움이 아니면 뭔가요?”
그 말에 이올라오스가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올라오스는 수도에 올라온 미렌을 얼마든지 프레니티로 내려 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다고 도움을 청하지 않은 탓이라며 부정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깨달은 지 오래였다.
수도에 올라온 그녀가 헤겔 카르너가 아닌 제게 도움을 청하는 게 좋아서. 그래서 굳이 나서지 않았다.
이올라오스는 결국 한마디 더 덧붙이지 않고 다시금 돌아섰다.
어서 황제 폐하의 알현실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설마 저랑 황후 전하를 헷갈리신 건 아니죠?”
“아닙니다!”
왠지 이올라오스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 농담을 했던 미렌은 신경질적으로 뻗어져 나온 목소리에 눈을 둥글게 떴다.
이올라오스도 자신의 높아진 목소리에 잠시 흠칫했는지 손을 움찔 떨다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전혀 닮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도요.”
“그렇습니까?”
“몇 번을 말해야 믿으실 겁니까?”
이올라오스의 미간에 골이 패었다.
미렌은 그 모습을 보고 물러설까 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를 떠보았다.
“어째서요?”
“어째서라니요? 황후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는?”
“다가가기 힘든 분이십니다.”
무척이나 중의적인 대답이었다. ‘황후 전하’라는 지위 탓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것도 같았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성격 자체가 다가가기 힘들다는 말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미렌은 눈치껏 이올라오스가 그 모든 점을 통틀어서 다가가기 어렵다고 표현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경께서는 아직 황후 전하께 반감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렇게 티가 납니까.”
“아니요. 전에 제게 상담할 때도 그러셨잖습니까? 그럼 좋은 감정을 가지기 어렵죠.”
이올라오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아마도 평생 황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기란, 이올라오스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발길은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이올라오스가 먼저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신호가 들려왔다.
끼익.
“폐하를 뵙습니다.”
“고귀하신 제국의 태양, 폐하를 뵙습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보는 이올라오스의 간결한 인사와 달리 미렌의 인사법은 제법 그럴듯했다.
모자를 벗은 그녀가 제 원피스 끝자락을 말아 쥔 채 무릎을 굽히자 서류를 들고 있던 라이언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못 본 새에 교양이 많이 늘었군.”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그대의 능력에 감탄했을 뿐이다. 능력 있는 부하라는 내 아내의 말이, 틀리지 않았나 보지.”
조금 더 어색하게 할걸 그랬나? 평민치고 너무 배운 티가 났나?
미렌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와 함께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란히 선 미렌과 이올라오스 앞에 서자 라이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가 꼭 거대한 맹수의 것처럼 두렵게 느껴졌다.
“이올라오스.”
“예, 폐하.”
“네가 공작 부인을 살해한 사형수들을 직접 잡아 왔다지.”
“그렇습니다.”
그가 말한 사형수들은 오늘 오전에 이미 형이 집행된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를 남긴 라이언이 이번엔 고개를 돌려 미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올라오스는 네가 공작 부인의 진범을 찾았다더군.”
“폐하, 우드 씨와 함께한 부단장, 로이아 테넷 경이 제게 보고를…….”
“이올라오스, 나는 네게 대답하라 명한 적이 없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이올라오스가 입을 다물었다.
마찬가지로 눈을 내리고 있던 미렌은 슬쩍 눈동자를 들었다가 라이언의 검은 두 눈과 마주치곤 파르르 떨며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제가 대답해야 할 때인 모양이다.
“각하의 방에서 우연히 수면초를 발견했습니다. 그건 분명 공작 부인의 방에서 났던 향과 같은 약초입니다.”
“그래.”
“다만, 각하의 숨겨진 공간이 모두 공작 부인의 초상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살인 동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마지막 질문을 하며 미렌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은 아직도 자신보다 한참 작은 그녀를 턱 끝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채였다.
그의 눈빛에는 놀람 따위의 감정이 서려 있지 않았다.
대신 지루하다는 듯,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눈동자만이 있었을 뿐이다.
“알고 있었다면?”
“……”
“달라지는 게 있는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미렌이 파드득, 고개를 다시 숙였다.
황제를 함부로 바라보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다.
“한 번이라도 이 나라를 움켜쥐었던 사내들에겐 모두 비슷한 특징이 있어.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하나같이 제 아내에게 미쳐 있다는 사실이지.”
미쳐 있다.
라이언의 한마디에 미렌은 문득 죽은 제 아버지, 에드가 공작이 떠올랐다.
귀족파를 이끌며 권력을 움켜쥐었던 그녀의 아비 또한 아내에게 미쳐 있었다.
그러니 딸인 미렌 에드가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제 아내를 죽여 버린 주범이었으므로.
그리고 현 귀족파의 수장인 베르디움 공작 또한 공작 부인에 대한 마음이 기묘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공작이 제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말입니까?”
“순서가 잘못되었군.”
“예?”
“직접 죽였으니 사랑한 것이다.”
미렌은 끝끝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의문이 남은 표정을 짓자 용케도 그것을 발견한 라이언이 말해 왔다.
“네가 이해하지 못할 마음이다. 이해하려고도, 공감하려고도 하지 말도록.”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나라를 움켜쥔 게 공작뿐이라고 생각하나?”
나지막이 전해진 라이언의 한마디에 미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 또한 미쳐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라이언이 비소를 머금었다.
“내 부인에겐 비밀로 하지. 심약한 이라 심장에 무리가 갈지도 몰라.”
미렌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지도 못한 채 그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옆에 선 이올라오스는 이미 그게 당연하다는 듯 부복한 채였다.
라이언을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만큼 얻어 가는 게 있었다.
미렌은 어쩌면 자신이 황후로선 닿을 수 없던 라이언의 마음에 이 몸으로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내기의 승패를 결정할까 하는데. 이올라오스.”
“예, 폐하.”
“네가 사형수들을 잡긴 했으나 진범을 밝힌 건 미렌 우드였다. 동의하는가.”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렌은 제 앞에 그려진 그림자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그가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창가 앞으로 다가간 라이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언했다.
“이번 내기는 황후의 승리로 하지.”
미렌으로선 속을 쓸어내릴 수 있는 한마디였다.
아무리 그래도 라이언과 두 몸 모두를 맞대는 건 위험했다.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그녀를 절망으로 끌어 내리는 한마디가 전해졌다.
“감사합…….”
“다만.”
“예?”
“이올라오스, 이렇게 패배하면 죄인들을 잡아 온 네가 억울하겠지.”
이올라오스 경, 제발 아니라고 해 줘요.
그런 간절한 눈빛으로 이올라오스를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거들떠도 보고 있지 않았다.
충직한 그는 제 주군만을 오로지 바라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여, 황후의 승리와 동시에 이올라오스의 승리 또한 인정한다.”
“그게 무슨……! 자, 잠깐, 폐하,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분명 패자의 부하가 승자의 아래로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승자인 이올라오스가 승자인 황후의 아래에 갈 수도 없었다.
그녀가 재빨리 머리를 굴리는 사이 라이언이 치아가 드러나도록 웃으며 말했다.
“패자인 미렌 우드가, 승자인 이올라오스의 아래로 가도록.”
“폐하!”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럼 그동안 프레니티 영지에 갈 수도 없단 건가?
그러나 라이언은 억울해하지 말라는 듯 달래는 어조로 덧붙였다.
“또한, 패자인 내가 승자인 황후의 아래로 들어가겠다.”
라이언의 한마디에 이올라오스와 미렌의 머릿속으로 똑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저…… 치사한……!
아마도 이렇게 둘씩 나눠지는 것이 라이언이 생각한 이상적인 그림이었을 것이다. 물론 오로지 라이언만의 생각이다.
하지만 겨우 평민에 불과한 미렌은 더 반박하지도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그럼 나가 보도록. 지시할 게 있다면 추후 이올라오스를 통해 전하지.”
“예, 폐하. 저는 우드 씨를 모셔다 드린 뒤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먼저 인사를 마친 이올라오스가 손짓하자 멀거니 서 있던 미렌도 다급하게 인사를 하고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 했다.
그런데 나가기 직전 문득 라이언이 한마디로 미렌을 붙잡았다.
“미렌 우드.”
“예?”
“곧 고향으로 내려갈 예정이라지.”
“네,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프레니티엔 복숭아가 많은가?”
“비록 지금은 수확기가 아니지만, 올해는 작황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그 뒤로 나가라는 말이 없자 미렌은 잠시 멋대로 나가도 되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라이언이 먼저 질문을 던져 주었다.
“복숭아를 좋아하나?”
“이래도 나름 복숭아 농사꾼의 딸이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렇군. 나가 봐도 좋아. 이올라오스를 따라가라.”
예, 하고 대답을 마친 미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라이언이 왜 마지막에 그런 말들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로 남은 라이언은 자리에 앉아 미렌이 나간 문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동안 해가 움직이며 그의 발밑에 있는 그림자가 조금씩 짧아졌다.
“이상해.”
어느 순간 극도로 짧아진 그림자는 거대하고 두렵던 맹수의 것과 달리 조그만 초식 동물처럼 작아져 있었다.
“미렌, 당신이 보아도 이상하지?”
내가 이토록 약해지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