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를 위한 에스코트
“미렌, 오늘 밤에는 거리에 다녀올까.”
축사를 마치고 내려오던 라이언이 넌지시 물어 왔다.
미렌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움찔 떨었다.
라이언의 말대로 그와 축제를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미렌 우드가 깨어나지 못한 지 벌써 20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또한 당장 며칠 뒤가 잡화점 아저씨와 프레니티에 돌아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 전에 미렌 우드가 수도에서 벌인 모든 일을 정리해야만 했다.
“밤에는…… 그래요. 다만 지금 당장은 제가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 라이언.”
“이런. 내가 당신의 생각을 하지 못했어. 어서 침실로 돌아가지.”
원래라면 오후에도 내도록 라이언과 함께 축제의 개막식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했지만, 라이언이 그것을 막아 주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역할이라 라이언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먼저 라이언을 돌려보낸 뒤 마리아와 함께 침실로 돌아왔다. 무거운 드레스와 액세서리만 내려 둔 채 침대 위에 올랐다.
“피곤하세요, 전하?”
“조금. 아무래도 일어나자마자 움직인 게 무리가 되었나 봐. 그래도 마리아, 무슨 일이 있거든 꼭 깨워 주도록.”
“예. 푹 주무세요.”
방 안에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커튼을 치자 미렌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모든 시녀들이 나가고 홀로 방 안에 남은 마리아가 어둠 속에서 그런 미렌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
“음…….”
“이런! 우드 님, 드디어 눈을 뜨셨습니까?”
“집……사님?”
오랫동안 누워 있던 덕분에 가라앉은 목에서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미렌이 헛기침을 하며 목을 다듬는 사이 집사가 차 한 잔을 건넸다.
“의원이 말한 것보다 오래 잠드시기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부인께서도 약재를 구하러 가셨고요.”
“부인께서 직접이요?”
“예. 레이디 우드는 우리 가문의 귀중한 손님이시잖습니까?”
“……제가요?”
“백작님도 레이디 우드를 부디 잘 보필하라 하셨습니다. 황후 전하와 연이 있으신 분이라고.”
집사의 말에 미렌이 이마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축제 전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 백작의 오해를 단단히 산 듯했다.
‘그자의 이름이…… 미렌 우드, 맞지요?’
‘……최근 들어 내가 부리고 있는 자입니다.’
‘허허, 공교롭게도 제 아들과도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백작과 미렌의 대화에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바빴다.
현재 중립적인 위치에 놓인 황후가 아끼는 데다 이올라오스 트리온과도 인연이 깊은 ‘미렌 우드’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미렌은 어서 미렌 우드가 수도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머물다 가려던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아, 그리고 이올라오스 경께서 레이디 우드가 깨어나시거든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떤 말이요?”
“그게……. ‘내기의 승패를 가려야 하니 오늘 오후 황성으로 오라는 전언이 있으셨습니다.’라고요.”
“네?!”
눈을 크게 뜬 미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기’의 승패에 대해.
만일 여기서 지면 미렌 우드는 황제인 라이언의 아래에 들어가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만일 미렌 에드가와 미렌 우드가 함께 자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나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미렌이 서둘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황성으로 가십니까?”
“예. 급히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침 잘되었습니다. 오늘이 황성 개방일이라 백작 부인께서도 그쪽으로 가실 겁니다. 마차를 함께 타고 가시지요.”
“전 혼자서도 괜찮…….”
“그럴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알프레도.”
미렌의 말이 뚝 끊어지며 백작 부인 특유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약재를 두 손 가득 든 시녀와 함께 들어오고 있는 부인이 보였다.
미렌이 입을 다물고 저를 바라보자 백작 부인은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그다음,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다만 우드 양도 준비가 필요하겠어요.”
“준비……요? 무슨 준비요?”
“우드 양은 따라만 오면 된답니다. 알프레도?”
“네, 부인.”
“우드 양을 모셔 가세요.”
순식간에 양팔이 잡힌 미렌이 질질 끌려갔다.
미렌은 그 상태 그대로 끝까지 다정다감하게 웃고 있는 백작 부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
“이 드레스가 낫지 않겠어요?”
미렌 에드가의 어머니는 오래전 그녀가 어릴 때 죽었다.
또한, 미렌 우드의 어머니는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온 평민 출신이셨다.
그러니 미렌에게는 평범한 귀족 부인의 ‘치장’이 무엇인지 알 기회가 없었다.
“우드 님께는 이 색이 가장 잘 어울리시지 않나요?”
“으으음, 아니, 그건 빼요. 너무 저렴해 보여.”
몇 번의 의상을 갈아입은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걸이에 걸린 대기 옷들이 아직 수십 벌은 되었다.
이제껏 황후인 미렌은 딱히 화려하게 치장할 일이 몇 번 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가 언제나 최종 결정자라 딱히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만일 정 고민되면 마리아에게 시켜 드레스를 선택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마리아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이건 너무 아이 같지 않니?”
“어머. 얘, 그건 너무 유행이 지났잖니.”
“그런 못난 건 어서 갖다 버리렴.”
드레스 선택에만 한 시간여가 걸렸다. 거기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그것을 걸치자 이미 30분은 더 지나 있었다.
드디어 화장할 차례가 되자 미렌이 힘 빠진 얼굴로 백작 부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꾸며야 할까요? 전 그저 이올라오스 경께 가는 건데.”
“당연하죠, 우드 양.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와 함께 가잖아요? 우드 양이 부족해 보이면, 내 체면이 서겠어요?”
“그렇군요…….”
“나는 없던 딸이 생긴 것 같아서 너무 즐거운 걸? 우리 애 좀 봐요, 옷 입히겠다고 앉혀 두면 앉아 있겠어요?”
“이올라오스 경이 그럴 분은…… 아니시죠.”
만일 이올라오스였다면 곧바로 일어나서 웃는 낯으로 부인의 면전에다 대고 쓸데없는 짓이라 말했을 것이다.
제 아들을 떠올리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백작 부인이 보석 하나를 들어 보였다.
“우드 양은 이게 낫겠죠?”
화장을 받던 미렌이 한쪽 눈을 살며시 떠서 보석을 살폈다.
그런데 미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너무 저렴해 보이는 것 같아요. 루비가 낫지 않을까요?”
“어머! 우드 양이 보는 눈이 있네요. 그대로 골랐으면 실망할 뻔했어요.”
그 말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보석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일가견이 있는 터라 저도 모르게 거절해 버리고 말았다.
곧 준비를 마친 미렌 우드와 트리온 백작 부인이 마차에 올랐다.
배웅을 나온 집사가 따스한 낯으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이올라오스가 마중을 나온다는군요.”
“경께서요?”
“아무리 나라도 복잡한 황성의 길까지는 알지 못하니까요. 우리 애가 참 다정하죠?”
은근히 이올라오스의 어필을 하는 백작 부인의 말을 미렌이 애써 무시했다.
때때로 백작 부인은 노골적으로 미렌을 제 며느리로 들이고 싶다는 티를 냈다.
“사실 원래 이렇게 다정한 아이가 아닌데, 우드 양이 관련되면 유달리 더 그런 것 같아요.”
“아마 기우이실 겁니다.”
“기우라뇨? 전혀요. 무엇보다 이올라오스가 제 이름을 부르라 했다면서요. 내가 부르는 건 끔찍이도 싫어하면서.”
“이올라오스 경이요?”
“그 애 앞에서 나는 매번 얘야, 트리온? 이 정도가 최선이에요.”
덜컹이는 마차 덕분에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백작 부인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넌지시 말했다.
“내가 낳았지만 키우진 않았거든요.”
“……그게 무슨…….”
“아이가 폐하의 옆으로 간 게 두 살 때였어요. 그 아인 그때부터 폐하를 모시기 위해 살았답니다.”
백작 부인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감돌았다. 이올라오스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다.
“1년에 겨우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한 어미였어요. 그러다 어엿한 기사가 되었을 때였나, 내게 그러더군요.”
“…….”
“가깝지 않은 사이에서 제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고위 귀족들의 이름은 가까운 사이에서, 서로가 허락했을 때만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면 대부분은 당연히 이름을 부른다.
그러니 이올라오스는 아마도 그녀를 제 어머니라 생각하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열 살 때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떠난 뒤로 5년 만에 본 아이였어요. 어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법도 하죠.”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와 떨어진 이올라오스에게는 가족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저택보다 황성에 있는 숙소가 더 집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게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귀족의 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할 고통이죠. 다만……. 그 아이가 하필이면 트리온으로 태어나서, 젖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보낸 게 마음이 아파요.”
“부인께서도 늘 마음 졸이셨잖아요. 부인이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어머.”
손으로 입가를 가린 부인이 미렌을 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부인이 갑작스레 웃자 미렌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난 그래서 우드 양이 좋아요. 평생 재미없게 살아온 그 아이가 우드 양과 있을 때면 그나마 생기가 도는 것 같아서.”
“이올라오스 경은 저를 친구로 생각하시니까요.”
“친구? 그럴 수도 있겠네요. 비밀인데, 사실 우리 애는 아직 친구를 사귈 줄 모른답니다.”
정말로 비밀을 말하듯 부인이 속삭여 왔다. 미렌도 그 재치 있는 반응에 나직이 웃었다.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멈추자 미렌이 먼저 문을 열었다.
백작 부인을 에스코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홀로 내리긴커녕 누군가에게 허리와 손이 잡혔다.
홀린 듯 타인의 에스코트를 받은 채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이올라오스였다.
“우드 씨, 오셨습니까?”
“언제부터 기다리셨습니까?”
“알프레도로부터 곧 도착하신다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얘 좀 봐.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니?”
미렌과 대화를 나누던 이올라오스가 뒤늦게 마차로 돌아가 어머니의 에스코트를 이어 했다.
무뚝뚝한 아들 그 자체였지만 그래도 손길에는 애정이 묻어났다.
황성 앞에는 트리온 가문 말고도 수많은 귀족 가문들의 마차가 서 있었다.
백작 부인이 가려는 사교 파티가 오늘 하루 종일 황성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미렌에게 꽂히는 시선이 많았다.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를 조금 더 눌러썼다.
미렌은 사교 파티에 가려고 황성에 온 게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하신 겁니까?”
“무엇을?”
이올라오스는 대답 대신 턱짓으로 미렌을 가리켰다. 챙이 넓은 모자와 고급스러운 드레스 형식의 원피스를 입은 미렌이 유달리 예뻤다.
그가 눈을 찌푸린 채 그녀를 멀거니 바라봤다.
“그럼, 네 어미 솜씨지. 우드 양이 무척이나 아름답지?”
“하아…….”
낮게 한숨 쉰 이올라오스는 미간을 풀지 않은 채 미렌에게 다가갔다.
제 큰 키로 은근슬쩍 미렌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려 버린 이올라오스는, 그대로 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지켜보던 백작 부인이 짧게 웃었다.
“내 아들이지만 서툴러도 너무 서투르다니까.”
사뿐사뿐. 고양이처럼 가벼운 부인의 발걸음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