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7)화 (67/133)

마법사의 약속

황성에서 출발한 미렌의 마차는 수도를 한 바퀴 돌고난 뒤 다시 황성으로 돌아오는 동선이었다.

그리고 그 일정에 맞추어 황제의 축사가 시작된다. 그러고 나면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이었다.

마차는 순조롭게 황성에 도착했다.

황성 앞은 평소와 달리 문을 개방한 채 백성들을 받아 내고 있었다.

물론 미렌과 라이언이 생활하는 실질적인 황성 안쪽은 개방되지 않았지만, 특별히 황성 바깥쪽이나마 들어갈 수 있는 날이라는 설렘에 많은 백성들이 이 앞을 찾았다.

성의 뒤편에 마차가 서자 말에 타고 있던 이올라오스가 내려 미렌의 에스코트를 도왔다.

“매번 그런 식이십니까?”

“무엇이요?”

“매번 그런 식으로…… 본인을 할퀴어 폐하를 위하시냔 말입니다.”

“나는 나를 할퀸 적이 없습니다.”

이올라오스가 그 말에 눈을 찌푸렸다.

당장 어젯밤 과로로 쓰러졌던 사람이 저토록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는데, 저게 본인을 할퀴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경께서는 죽음을 앞뒀던 적이 있습니까?”

“기사는 언제나 죽음을 각오한 채 폐하를 모십니다.”

“아니,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미렌은 이올라오스의 손을 놓아 버렸다.

대신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먼저 걸어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죽을 날을 받은 채 살아 본 적이 있냐는 말입니다.”

“그런 적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이언은 축사를 위해 황성 첨탑의 높은 곳, 발코니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제 심장이 열 살이 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더군요. 그렇게도 열심히 뛰고 있었는데.”

“…….”

“그다음엔 성인이 되지 못할 거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값비싼 결혼을 해야 한다고, 어차피 죽을 목숨, 더 비싸게 팔아야 한다는 소릴 들었어요.”

그래서 폐하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뒤따르는 이올라오스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첨탑의 계단은 폭이 좁고 층계가 높아서 높은 구두와 긴 드레스를 입은 미렌이 오르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올라오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을 뿐이다.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첫날밤을 보낼 때, 폐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정원에 복숭아나무를 심어야겠어.’

‘어째서요?’

‘당신이 좋아하니까. 다음 해에는 수확할 수 있겠지.’

우습게도 미렌은 그때 라이언이 미렌과의 결혼을 수락한 이유에는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도 있다고 생각했다. 곧 죽을 황후라니, 얼마나 만만하던가.

그런데 그 남자가 제게 다음 해의 복숭아를 약속했다.

미렌은 아마 그때부터 눈길을 떼지 못했던 거라고, 회상했다.

“그다음 계절엔 제게 꽃이 펴서 예쁘다고 해 주셨습니다. 다음번 계절엔 말대로 복숭아를 수확해 먹었어요.”

“…….”

“제가 죽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해 주신 분은 그분이 처음이셨습니다.”

첨탑의 계단은 길었다. 그러나 미렌은 투정 하나 없이 묵묵히 올랐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뒤돌아 선 라이언이 존재했다.

저 계단 너머로 눈부신 햇빛이 흘러들어 왔다.

미렌은 잠시 그곳에 서서 라이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내가 살고 싶게 만들어 준 사람을 위해 사는 게 어째서 나를 할퀴는 일입니까?”

그 순간 백성들을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미렌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때부터 미렌은 이올라오스를 잊었다. 오로지 라이언만이 눈에 들어왔다.

올곧게 걸어가자 라이언은 말없이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곧이어 제 앞에 도착한 그녀를 품 안 가득 껴안았다.

만백성이 바라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폐하, 다녀왔습니다.”

“미렌, 조심히 다녀왔나? 햇볕이 너무 강하더군. 당신의 피부가 걱정돼서…….”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는 라이언과 미렌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올라오스는 끝끝내 뒤돌았다.

그는 호위 기사가 있어야 할 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첨탑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음지로 걸음을 옮겼다.

햇빛 아래에 선 라이언에게 다가가는 황후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달랐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평이 가득한 그녀가 이상할 만큼……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

“탑주님, 오늘부터 축제래요.”

“그래서?”

“놀러 안 가세요?”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 위에 올린 채 누워 책을 읽던 헤겔이 그것을 내려 뒀다.

머리 위에선 불쌍한 리키가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채였다.

“이미 다녀왔어.”

“언제요?!”

“아까 아침에. 황후의 행진이 있었잖아.”

“거길요? 사람 엄청 많던데.”

“그래서 공중에서 봤지.”

잘 웃더라. 잘 걷고.

밤새도록 황성 근처를 맴돌았던 헤겔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아침, 미렌 에드가는 눈을 떴다.

물론 당연히 미렌 우드는 아직 잠든 채였다.

미렌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점점 미렌 우드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게 황후로서 미뤄 둔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변명이었다.

미렌 우드에게도 미렌 우드의 삶이 있었다.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연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헤겔은 그녀에게 그저 선택권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미렌은 미렌 에드가의 삶을 조금 더 안타깝게 여긴 것 같지만.

“수도에서 함부로 마법을 쓰셨다간 잡혀간다니까요!”

“황성 마법사들 중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탑주님은 그게 문제예요. 어쩜 그렇게 안일하시대요?”

헤겔이 어깨를 으쓱했다. 리키는 분해하면서도 그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어 입을 댓 발 내밀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남쪽 마탑의 직인을 찍어 보내라고 하셨잖아요.”

“어.”

“아무것도 안 오던데요?”

천부적인 능력과 달리 게으르기 짝이 없는 마탑주 덕분에 모든 서류의 최종 결재는 리키가 도맡았다.

그 때문에 그의 별명이 불쌍한 리키가 된 것이기도 했다.

리키가 헤겔이 버려 둔 책을 집어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사이 헤겔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잖아.”

“전쟁이요?!”

“그래, 전쟁. 리키, 벌써 귀가 멀어 버린 거냐?”

“저, 저전, 전쟁이라뇨?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야.”

몸을 일으킨 헤겔이 그대로 일어섰다.

리키보다 월등히 큰 키로 내려다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참지 못한 테룬 공국이 결국 일으키는 거지.”

“네에?! 왜요?”

“그야, 제국이 오늘 테룬 공국의 범죄자들을 사형시켰으니까.”

오늘은 축제 날이기도 했지만 얼마 전 있었던 공작 부인 살해 사건의 범인들을 사형하는 날이기도 했다.

물론 진짜 범인은 그들이 아니겠지만.

그건 테룬 공국이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인 라이언의 입장에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명색이 공작 부인이 살해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들을 테룬 공국민이라는 이유로 풀어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 남쪽 마탑은 그 전쟁에 참가한다.”

“네에에에?!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그러니 직인을 준비해 두라 했잖아.”

“싫어요! 전쟁 절대 싫어!”

“언제부터 네가 마탑주였지, 리키?”

리키가 억울한 얼굴로 헤겔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이미 싸늘한 표정의 헤겔은 그를 달래 주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지는 건 리키였다.

“다른 마탑들은요?”

“아직 몰라. 하지만 내가 참가하면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지.”

“맞다! 이번 연회에서 오퓨커스 님이랑 만나셨다면서요?”

“말조심해라. 둘이서 만난 게 아니라 알페카도 있었어.”

“어, 진짜요? 두 분이서 드디어 연애한다는 소문이 마법사들 사이로 쫙 났는데.”

“리키.”

“네?”

“불쌍한 리키.”

거기까지 말한 헤겔이 순식간에 주먹을 쥐고 리키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쥔 리키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때려요!”

“네가 헛소리를 하잖아. 오퓨커스랑 내가 연애?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니면 아니라고 하시면 되지…….”

리키의 입술이 툭 튀어나오자 헤겔은 그걸 한 대 때려 주려다 참았다.

한 번 더 때렸다간 리키가 가출해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요, 두 분 잘 어울려요.”

“한 대 더 맞을까?”

“으악! 폭력 결사반대!”

두 분 다 하나도 안 착한 게 진짜 잘 어울리는데…….

거기까지 중얼거리던 리키는 결국 한 대를 더 맞았다.

손을 턴 헤겔은 리키를 내려 두고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리키가 머리를 감싼 채 재빨리 헤겔의 뒤를 종종 따라갔다.

“알페카 님이나 오퓨커스 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멜리크 님도 전쟁에 참가하실까요?”

“제일 환영할걸.”

“어? 진짜요?”

“대놓고 인체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잖아?”

헤겔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리키가 우뚝 멈춰 섰다.

오싹 소름이 돋아서 팔을 슥슥 문질러야 했다.

“근데 저번 전쟁에는 참가 안 하셨잖아요. 이번엔 왜 해요?”

“저번에는 내전이기도 했고, 우리는 아니더라도 스승님이 했으니까.”

리키가 말한 저번 ‘전쟁’은 라이언이 승리한 전쟁이기도 했다.

마침내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황위를 차지한 사내의 승리.

그 당시 헤겔은 막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당시에도 공격 마법으로 이름을 날리던 터라 위험한 제안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그는 그것들을 모두 거절했다.

스승님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탑주님은 공격 마법 하기 싫어하시잖아요.”

“내가?”

“네! 방금 전에도 힐링 마법 서적이나 보고 계셨으면서.”

“그건…….”

“과로에 관련된 거였죠?”

헤겔이 눈을 찌푸렸다.

그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담당하는 리키가 이럴 때는 몹시도 불편했다.

리키는 눈치라곤 전혀 없이 연이어 헤겔이 곤란할 만한 질문을 던져 댔다.

“그런 분이 이번 전쟁엔 왜 참가하세요? 업적 같은 걸 원하지도 않으시잖아요.”

“업적을 원했으면 내가 직접 반란을 일으켰겠지.”

리키가 저도 모르게 오…… 하고 소리를 냈다.

헤겔이라면,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성미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욕심이 없었다.

그의 스승도 헤겔의 유일한 단점이 그것이라 말했다.

“그럼 왜 참가하시는데요?”

“누가 울면서 부탁했어. 그래서 약속을 해 버렸다. 원하는 걸 이루어 주겠다고.”

“네에?!”

“왜 놀라?”

“아뇨, 누가 운다고 해서 들어주실 분이 아니잖아요! 탑주님이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데!”

헤겔은 참지 못하고 리키의 머리를 한 번 더 두드렸다.

결국 리키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0